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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체계/기타

6·25전쟁 당시 사용된 무기 시리즈① 한국군 10대 무기

6·25전쟁 당시 사용된 무기 시리즈

한국군 10 무기

 

 

올해는 인류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비극이자 우리민족에게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긴 6·25전쟁이 발발한지 66주년이 되는 해이다. 세계 최초의 이념전쟁이기도 했던 6·25 전쟁은 공산주의에 분연히 저항하는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강력한 의지였으며, 당시 우리 젊은 용사들의 엄청난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 평화를 만끽하며 살고 있다. 오늘은 6·25당시 우리 국군에 의해 사용되었던 10대 무기를 알아보며 그날의 우리 국군을 느껴보자.

 

➀ M-1 Garand 소총
미국에서 개발된 M-1 Garand 소총은 세계 최초로 대량배치에 성공한 반자동 소총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대활약했으며, 6·25전쟁에서도 역시 빛나는 활약을 했다. 우리 국군은 전쟁 개시 전부터 M-1을 보유하고 있었고, 전쟁 발발 후에는 미국의 지원으로 전군에 배치되었다. 북한군 병사가 5연발 볼트액션 방식의 소련제 모신나강 소총을 사용한데 반해, 우리 국군이 사용한 M-1은 8연발의 반자동방식이었기 때문에 보병 간 전투에서 압도적인 화력의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6·25전쟁 이후 미국은 M-1을 개량하여, 20연발 탄창을 장착하고 완전자동사격이 가능한 M-14를 제식소총으로 채용해 월남전에 사용했다. 우리 국군도 60년대 말까지 M-1을 사용했으나, 월남파병 이후 점차 M-16으로 교체되었다.

 

M-1소총을 메고 행군중인 국군의 모습. 거의 자기 키 만큼이나 길고 무거운 소총을 들고 국군은 용감히 싸웠다. 참전용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대체로 M-1소총의 우수성에 대해 만족감을 표시했다.

 

➁ M-1/2 Carbine 소총
M-1/2 카빈 역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 개발된 소총이다. M-1은 우수한 소총이긴 했지만 비교적 크고 무거워 운전병이나 통신병, 현장 지휘관 등에게는 부담스러운 소총이었다. 따라서 미군은 크기가 작고 반자동 사격이 가능한 M-1 카빈을 개발해 일선에 보급하게 된다. 6·25전쟁에서도 M-1이 동양인들에게 다소 크고 무거웠던 반면, M-1 카빈은 동양인에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크기와 무게의 소총이었다. M-1 카빈 모델은 15발 탄창을 사용했으나, 6·25 전쟁 때부터 사용된 M-2 카빈은 완전자동사격이 가능해 30발 탄창을 사용하였다.

 

전쟁당시 빨치산 토벌중인 국군의 모습. 산악지대의 게릴라 소탕전에서 가볍고 장탄수가 풍부한 카빈은 매우 인기있는 무기였다.

 

➂ 81mm 박격포
역시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개발,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서 활약했다. 원래 연막탄과 화학탄을 운용하기 위한 M1 화학탄 박격포의 후신으로 개발되었다. 그리고 박격포에서는 비교적 드문 편인 강선식 포신, 탄 역시 일반적 박격포탄의 안정핀이 없는 일반 총탄이나 포탄 형태에 가깝다. 강선식은 연사속도가 좀 느려지고, 강선의 두께 만큼 포가 과열에 약해지는 단점이 있으나 바람에 영향을 덜 받는다. 조준경을 포구 근처에 끼워서 조준하기 때문에 쏘기 전에 반드시 분리 했던 점 또한 M2의 특징이자 단점 중 하나. 6·25 당시 산악전에서 큰 힘을 발휘했으나, 혹한에서는 얼어붙은 땅이 반동을 흡수하지 못해 가끔 포판이 깨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포병화력이 많이 부족했던 국군에게는 알토란같은 화력지원수단이었다.

 

6·25 전쟁당시 81mm 박격포를 사격중인 미군병사들의 모습. 포병화력이 변변치 않았던 우리 국군에게도 요긴한 하력지원수단이었다.

  

➃ M3 105mm 곡사포

6.25 발발 당시 북한군이 보유한 야포에 비해 국군의 포병화력은 사거리나 화력 모두에서 절대 열세였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쟁 초기에도 국군 포병부대는 그야말로 놀라운 분투를 펼쳤고, 국군에 제대로 된 포병전력이 없을 거라 생각한 북한군을 매우 당황하게 만들었다. 특히 창군 당시 국군이 보유한 최고의 중화기였던 105mm M3 곡사포는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신화를 썼던 국군의 자부심이었다. M3 곡사포는 한국전쟁 발발 당시 국군이 보유한 최대 중화기였다. 사실 6.25 직전 국군수뇌부는 북한군의 전력 증강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수차례에 걸쳐 충분히 맞설 수 있는 전차와 야포 그리고 전투기의 공급을 미국에 요청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남침 능력을 오판하여 우리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 때문에 포병 장비도 당시 미군의 표준이라 할 수 있는 155mm 곡사포는 고사하고 보병 지원용으로 대량 사용하던 M101 105mm 곡사포도 지원하지 않았다. 대신 국군에게 2.36인치 로켓포와 57mm 대전차포, 그리고 M3를 공급하여 주었다. M3는 공수부대용 곡사포로써 포신이 짧아 당시 여러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던 M101 105mm 곡사포에 비해 사정거리가 거의 절반으로 줄어든 화포였다. 하지만 국군은 이를 해방된 내 나라를 지켜 주는 소중한 자산으로 여겨 귀하게 다루었고, 실전에서 야무진 활약을 했다.

 

우리 국군의 유일한 곡사포였던 M3. 공수부대용이라 포신이 짧은 것이 특징. 그 만큼 사거리나 위력이 줄어들었으나 우리 국군은 제한된 여건 속에서도 최대한의 성과를 내었다.

 

➄ 바주카
6·25 개전 초, 대전차병기가 변변치 않았던 국군은 북한군의 T-34 전차를 보고 대 혼란에 빠졌고, 폭탄을 들고 육탄돌격을 하는 처절한 전투를 했다. 미군은 이걸 보고 국군을 비웃었으며, 당시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2.36인치 바주카포로 충분히 T-34를 격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군의 예상과는 달리 T-34에 대해 거의 효과가 없었다. 무려 22발이나 2.36인치 로켓을 얻어맞은 T-34도 있었으나 멀쩡했다. 다행히 미군은 이미 신형 3.5인치 바주카를 개발해놓은 상태여서 이를 곧바로 한국으로 공수, 손쉽게 T-34를 격파할 수 있었다. 한국군도 이를 지급받아 대전 방어전에서는 단 한발로 T-34를 격파하기도 했다.

 


3.5인치 바주카를 메고 가는 국군병사의 모습. 3.5인치 바주카는 북한군의 T-34 뿐아니라 벙커파괴에도 발군의 능력을 발휘했다.

 

➅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는 전쟁 발발 당시 국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유일한 장갑전투차량이었다. 총 27대를 미국으로부터 공여 받았으며 모두 독립기갑연대에 배치되었다. 미국이 이 장갑차를 공여한 이유는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에 기갑부대를 창설할 필요는 있으며, 그 때 경험이 있는 기갑요원을 확보하기 위해 얼핏 보기에는 전차와 비슷하며 탑승원 수나 좌석 위치가 전차와 비슷하나 장갑차이며 방어력 및 화력이 약해 공세적으로 쓰기에는 어렵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그레이하운드가 한국에 도입된 후에는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38선을 순회하면서 국군전차로 선전하기도 했고, 심지어 T-34를 상대로 대전차전을 벌여T-34를 격파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개전당시 한국군이 보유했던 유일한 기갑차량인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포탑 때문에 전차로 오해받았지만 어쩔 수 없는 장갑차다.

 

➆ M36 잭슨 자주포
M36은 본격적인 전차가 아닌, 엄밀히 말해 대전차 자주포이다. 하지만 전차가 아쉬웠던 한국군 입장에서는 소중한 존재였다. 게다가 화력만큼은 당시 미국의 주력전차인 M26 퍼싱과 사실상 동일했으며, 구경도 90mm라 지원 포격용으로도 요긴했다. 1953년 1월부터 정전 때까지 53전차중대 3소대장으로 M36 경전차를 몰고 전장을 누빈 김봉기(金鳳起·75·갑종24기)예비역 대령은 “보병을 지원하기 위해 우렁찬 굉음을 울리며 M36 경전차를 몰고 가서 90mm 주포를 사격하면 보병들의 사기가 오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당시 M36은 주로 소대급 단위(전차 5대로 구성)로 실전에 투입돼 보병의 돌격전에 기동 간 화력지원을 하는 형태로 운용됐을 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과 같이 대규모 전차전을 벌인 사례는 없다”고 설명했다. 이 당시에는 이미 북한군에 기갑전력이란 것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육군에서는 1959년 퇴역했으며 이후 상당 기간 전방 지역 고지에서 고정포로 운용됐다.

 

M36 잭슨 대전차자주포에서 전투준비중인 한국군 병사들의 매우 희귀한 사진. 주로 보병 화력지원에 쓰였다.

 

➇ F-51D 무스탕 전투기
2차 대전을 통해 최고의 전투기로 평가되었던 미국의 「노스 아메리칸 F-51D 무스탕」. ‘하늘의 캐딜락’이라고 불리며 태평양전쟁에서는 이오지마에서 일본 본토 폭격에 나서는 보잉 B-29폭격기의 호위기로서 또 지상공격기로서 많은 활약을 했다. 전후 막이 오른 제트시대의 문턱에서 거의 폐기 처분될 운명이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다시 현역에 복귀했다. 당시 아시아지역의 미 공군은 필리핀을 위시한 각지에 주둔 하고 있던 부대의 프로펠러전투기들을 제트전투기로 대체하는 중이었다. 10 기의 T-6 텍산 연습기와 12기의 연락기가 공군 전력의 전부였던 한국은 전쟁 발발 직후 미국에 긴급지원을 요청, 10기의 무스탕 전투기를 지원받아 공군의 주력으로 삼았고 동시에 미 공군은 한국 공군에 대한 전력 확충계획인 ‘바우트 원’ 작전을 진행하여 전쟁 기간 중 한국 공군의 전투력 향상과 함께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했다. 특히 미 공군도 성공하지 못한 승호리 철교 폭파를 성공한 것은 물론, 평양 대공습과 전술공군작전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근접항공지원을 통해 351고지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렇게 미 공군의 지원 아래 한국 공군은 전쟁기간동안 북한군에 대한 괄목할만한 작전을 수행했고, 많은 희생이 따랐음에도 100회 이상 출격한 조종사들이 수두룩할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으나, 우리 공군의 제트기화는 전쟁 후에나 실현되었다.

 

폭탄과 로켓으로 무장한 한국 공군의 F-51D 무스탕 전투기. 승호리의 신화를 쓴 전투기이다.

 

➈ 백두산함 (PC-701)
1949년에 대한민국 해군이 창설되었지만, 제대로 된 전투함이 단 한척도 없었던 당시 우리 해군은 자발적으로 ‘함정건조 거출위원회’를 결성했다. 간부에서부터 사병까지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조성하였고, 일부 수병들은 고철이나 폐품을 팔아 보탰다. 심지어 간부 부인들은 삯바느질로 기금마련을 도울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4개월 만에 1만 5천 달러의 기금이 조성되었고, 이에 감동한 우리 정부는 4만 5천 달러를 지원, 마침내 미국 해양대학교의 실습선인 퇴역 초계정 ‘화이트헤드 소위’호를 인수한다. 배를 인수하러 갔던 장교 15명은 경비절감을 위해 약 두 달간 배에서 숙식하며 엔진만 멀쩡했던 배를 직접 수리했다. 이윽고 1949년 12월 26일, 대한민국 해군의 첫 전투함인 백두산함(PC-701)이 탄생하였다. 백두산함은 귀국하면서 하와이에 들러 3인치 주포를 장착하였고, 다시 괌에서 포탄 100발을 구입해 1950년 4월 10일 진해항에 입항하였다. 그리고 불과 두 달여 후 6·25전쟁이 발발 한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10시경, 출격을 명받고 동해로 향하던 백두산함은 1,000톤급의 괴선박과 조우한다. 이 배는 당시 전투함이 없었던 한국 해군의 약점을 이용해 부산을 점령, UN군의 지원을 차단하고자 600여명의 게릴라를 태우고 잠입 중인 북한의 무장수송선이었다. 이윽고 1시간동안 백두산함은 자기 덩치의 두 배가 넘는 적함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마침내 적함을 격침 시킨다. 미국의 역사학자 노만 존슨은 ‘백두산함의 승리는 6·25전쟁의 승패를 가른 중요한 분수령 이었다’고 평가했다. 민관군이 함께 탄생시킨 대한민국 해군의 첫 전투함, 백두산함은 우리에게 첫 승전보를 알려준 귀중하고도 영광스러운 전투함이다. 

 

PC-701 백두산함의 모습. 전쟁 당일, 결정적인 전투의 승리로 대한민국을 구해낸 우리 최초의 군함이다.

 

<백두산함 관련 다큐 영상입니다>


➉ 대한민국 국군장병들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전쟁 6·25에서 그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무기는 바로 우리 국군용사들이었다. 전쟁 직전, 10만이 조금 넘었던 국군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 기적적으로 버텨내었고, 이후 UN군의 도움을 받아 무장과 훈련수준이 충족되자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전쟁 종반에 서부전선은 UN군이, 동부전선은 국군이 담당하였는데, 현재의 휴전선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서쪽에 비해 동쪽이 훨씬 북으로 올라가 있다. 백마고지전투 등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격전지에서 우리 국군은 피한방울과 땅 한 뼘을 바꿔가며 사투를 벌였고, 그 결과 무려 14만에 달하는 전사자가 6·25 전쟁동안 발생했으며,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 자유민주주의의 안락함 속에서 살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국군은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하고 있으며, 북한의 그 어떤 군사적 도발도 조기에 분쇄할 수 있는 강군으로 성장했다.

 

백마고지 전투 후, 고지에서 만세를 부르는 국군병사들의 모습. 이들의 피가 오늘날의 번영을 가져왔다.

 

다음주에 이어질 이야기 '6·25전쟁 당시 북한군 10대 무기' 편도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