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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6ㆍ25전쟁 11대 전투 : <3> 춘천지구전투

민·관·군 일치단결 국군 최초로 대승 거둬
호국보훈의 달 기획 6ㆍ25전쟁 11대 전투 <3> 춘천지구전투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승리한 구국의 전투로 평가 받아

국군 한강·낙동강 방어선 구축…유엔군 참전 가능케 해

 

● 북한군 ‘3일 작전’ 좌절시켜

 

춘천지구전투는 6·25전쟁 초기 국군6사단이 기습 남하하는 북한군 2군단 2사단과 12사단을 맞아 1950년 6월 25일부터 27일까지 사흘간 춘천 옥산포, 소양강, 봉의산 일대에서 민·관과 합심해 거둔 국군 최초의 대승이다.

 

북한군의 남하를 3일간 지연시킨 이 전투를 통해 국군은 춘천과 수원을 거쳐 서울을 포위하려던 북한군의 ‘3일 작전’을 좌절시켰고 국군의 한강·낙동강 방어선 구축과 유엔군 참전을 가능케 했다. 말 그대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구한 구국의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이 전투에서 국군6사단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적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방어전을 전개, 북한군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이로 인해 북한군 2군단의 춘천과 홍천 축선 진출이 지연됐다.

 

결과적으로 북한군 2군단은 예하 병력을 춘천-홍천-이천-수원 축선으로 우회기동시켜 국군의 병력증원과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그들의 1단계 작전에 기여한다는 당초의 작전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됐다.

 

반면에 국군은 한강남안에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게 됐다.

 

국군6사단 7연대는 우측 7사단과의 협조점으로 설정된 가평 적목리로부터 춘천 동북쪽의 764고지(계명산) 남쪽에 이르는 방어정면을 담당하고 있었다.

 

연대는 북한군의 주공이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 화천-춘천 방면에 3대대를, 조공의 공격로로 예상되는 양구-춘천 방면에 2대대를 배치했다.

 

화천-가평 간 접근로에는 3대대 10중대를 방어정면에 배치하고 11중대는 대대예비로 춘천에 두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북한군 2사단은 3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를 화천-춘천과 화천-가평 축선에 투입, 공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주공축선에 6연대를, 조공축선에 4연대를 투입하는 한편 17연대를 예비로 뒀고 화천-가평 축선에는 6연대 예하의 2대대를 공격부대로 편성했다.


●소양강 도하 시도한 적 격퇴

 

북한군 2사단의 기습공격을 받은 7연대는 38도선상의 경계진지로부터 철수해 소양강 북안의 164고지와 우두산 일대에 주저항선을 구축, 개전 당일 춘천을 점령하기 위해 소양강 도하를 시도하던 적을 격퇴했다. 이후 소양강변 및 봉의산 일대에 예비진지를 편성하고 27일까지 적의 공세를 저지한 후 춘천 외곽의 원창고개 일대에 방어선을 형성했다.

 

또 화천-가평 축선의 3대대도 고수령(고시락고개)과 홍적령(홍지기고개) 등에서 지형적인 이점을 이용하며 지연전을 전개, 적의 진격을 3일간 저지한 후 6월 27일 금곡으로 철수했다.

 

작전은 작전경과 측면에서 3단계로 전개됐다. 1단계는 최초 38도선 경계진지 전초전으로부터 주저항선 전투가 전개되는 개전 당일의 상황이다.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화천-춘천 축선에서 북한군 2사단은 모진교를 점령한 후 국군 7연대의 주항선인 역골-164고지-우두산 선까지 이르렀고, 인제-홍천 축선에서는 북한군 12사단이 국군 2연대의 주저항선인 어론리 일대까지 진출했다.

 

2단계는 주저항선을 포기하고 최후저항선 또는 예비진지에서 전투를 전개하는 개전 2∼3일차, 즉 6월 26일과 27일의 상황이다. 국군 7연대와 2연대는 주저항선 일대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했으나 지형의 이점을 통한 효과적인 방어 작전을 위해 소양강 남안과 말고개로 철수, 각각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마지막으로 3단계는 최후저항선이 와해되고 거점도시가 피탈된 후 지연전을 전개하는 6월 28일과 29일의 상황이다. 국군 7연대는 6월 27일 춘천이 피탈되자 춘천-홍천 간 도로를 따라 철수하며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했고, 2연대는 최후거점인 말고개에서 4차에 걸쳐 북한군의 돌파를 격퇴한 후 지연전으로 돌입했다.

 

이 전투에서 국군 6사단은 병력과 화력 면에서 절대 우위에 있는 북한군 2군단 주력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함으로써 적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나 수도 서울의 피탈은 중동부지역의 방어선 조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결국은 춘천을 포기하고 전선의 균형을 유지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성공적인 작전 수행에 밑거름


한편 국군6사단의 좌측에서 북한군의 주공인 1군단에 맞선 국군7사단은 적의 막강한 화력과 전차부대의 집중공격을 받고 개전 다음날 의정부를 피탈당했고, 이어 6월 28일에는 서울이 함락됨으로써 한강 이남으로 분산 철수했다. 그러나 6사단의 우인접 사단인 8사단은 육군본부의 사전조치로 무기 및 장비를 그대로 유지한 채 전략적 후퇴를 함으로써 장차 성공적인 작전 수행에 밑거름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