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50. 9.15’ 6·25 전쟁의 판도를 바꾸다
호국보훈의 달 기획 6ㆍ25전쟁 11대 전투 <2> 인천상륙작전

 

 

美 7함대 주축, 함정 261척·국군 2개연대 등 7만여 명 작전 개시

서울 탈환·38선 돌파·낙동강 반격·압록강과 두만강 진격 원동력

 

●작전 성공으로 주도권 장악

 

6·25전쟁 당시 국군과 UN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서울탈환, 낙동강선에서의 반격과 연결작전, 38선돌파, 압록강과 두만강으로의 진격작전을 펼칠 수 있게 된다.

맥아더 UN군사령관은 1950년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했을 당시 한편에서 적의 주력을 저지하는 사이 또 다른 한편에서 적의 배후를 강타하여 적에게 2개의 전선을 강요한다는 내용의 대담한 상륙작전을 구상했다. 이 구상은 블루하트작전으로 명명, 미1기병사단이 7월 하순에 인천으로 상륙작전을 하는 것으로 계획됐다.

 

하지만 당시 전선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자 미1기병사단을 전선으로 긴급히 투입, 7월 10일 계획은 취소됐다. 그럼에도 맥아더의 상륙작전 구상은 합동전략기획단(JSPOG)에 의해 계속 연구 발전돼 크로마이트작전으로 발전됐다.

 

이 계획에 따라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것이다. 이때 가담한 총병력은 7만5000여 명이었고, 함정은 261척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8월부터 준비가 시작됐다. 미7함대사령관인 스트러블 중장이 상륙기동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돼 7합동기동부대(JTF7)가 편성됐다.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UN군 해군과 공군은 9월 7일부터 14일까지 동해와 서해에서 양동작전을 펼쳤으며, 이 기간에 공군은 총 3250여 회나 출격해 전략·전술 표적을 타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7합동기동부대는 9월 15일 이전에 항공기 및 함포지원사격으로 인천 월미도 등을 무력화시켰고 미7함대 세력을 주축으로 한 해군함정 261척과 미10군단 예하 국군 2개 연대를 포함한 미군 2개 사단 등 7만여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지상군 부대를 통합 지휘해 9월 15일 새벽 2시에 인천에 대한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오전 6시 30분부터는 상륙 돌격을 실시해 인천을 탈환하게 된다.  

 
●9월 28일 서울 수복


이때 북한군의 저항은 미약했다. 다음날 새벽 미10군단은 인천 일대에서 저항하는 북한군을 소탕한 후, 18일에는 김포공항을 탈환하고 영등포로 진출할 준비를 갖췄다. 19일 서울탈환작전으로 전환한 미10군단은 행주-능곡-연희동, 영등포-마포, 노량진-서빙고-남산 등 3개 방면에서 서울로 진출해 시가전을 치른 끝에 9월 28일 서울을 완전 탈환했다.

 

이 과정에서 미10군단의 일부 부대는 수원-오산 방향으로 진출해 26일 낙동강전선에서 북상 진격한 미1군단 선발대와 만났다. 이렇게 해서 29일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유엔군사령관이 임석한 가운데 서울 수복을 경축하는 행사가 거행됐고 한국정부는 이날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하게 됐다.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낙동강전선에 집중 투입된 북한군의 주력을 포위할 수 있게 됐고 개전 이후 수세 일변도의 방어 작전에서 벗어나 이때부터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공세작전을 펼칠 수 있게 됐다. 이 밖에도 이 작전은 UN과 자유우방국가들이 38도선에 의한 한반도의 분단 상태를 타파하고 통일의 실현을 위한 UN군의 군사작전을 지지하게 되는 동기를 부여한 의미 깊은 작전이었다.

 

이처럼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서울탈환, 낙동강선에서의 반격과 연결작전, 38선돌파, 압록강과 두만강으로의 진격작전을 펼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Posted by 어울림 국방홍보원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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