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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6ㆍ25전쟁 11대 전투 : <5> 대한해협해전

1950년 6월 26일 해군 단독 첫 승전보전쟁 승패 가른 분수령
호국보훈의 달 기획 6ㆍ25전쟁 11대 전투 <5> 대한해협해전

 

해군 장병과 가족, 국민 성금으로 마련한 우리 해군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에서 3인치 함포를 장착하고 있다. 해군제공

 

지난해 6월 26일 열린 대한해협해전 전승 기념식에서 이지스 구축함 세종대왕함(맨 앞)과 차기호위함 인천함(둘째)을 비롯한 해군 함정들이 해상 사열을 위해 기동하고 있다.조용학 기자

 

 

국민 성금으로 마련한 해군 최초 전투함 백두산함

부산으로 침투하려 남하하던 북 무장수송선 격침

 

#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 출항

 

1950년 6월 25일 오전 9시 진해통제부사령관 김성삼 대령이 진해 군항에 정박 중인 백두산함(PC-701)을 방문했다. 백두산함은 해군장병과 가족, 국민들의 성금으로 구매한 우리 해군 최초의 전투함이다.

 

그는 “동해안 옥계·임원 해안에 인민군이 상륙하고 있으니 즉각 출동해 적을 격퇴하라”는 해군본부의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이날 오후 3시 출항 기적을 울린 백두산함은 오후 8시12분 울산 앞바다를 항해하던 중 동쪽 수평선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포착했다. 백두산함은 20여 분을 전속 기동해 배 한 척을 발견했다. 선체를 검은색으로 칠한 미식별 선박은 국기도, 이름도 없었다.

 

백두산함이 30분 동안 국제 발광신호로 국적·출항지·목적지를 물었지만 괴선박은 묵묵부답으로 계속 남하했다. 백두산함은 더 가까이 접근해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는 신호를 수십 차례 보냈다. 미식별 선박은 그래도 응하지 않았다.

 

최용남(당시 중령) 함장은 적 함정이 틀림없다고 확신, 포탄 장전을 명령했다. 밤 11시51분 전투배치를 완료한 백두산함은 미식별 선박 우현 100m까지 접근했다. 선수(船首 : 배의 앞부분) 갑판에 함포가, 선교(船橋 : 배를 지휘하는 곳) 뒤에는 중기관총을 천으로 덮어 놓은 게 보였다. 갑판에는 완전무장한 군인이 빼곡히 타고 있었다.

 

최 함장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추적할 것을 지시한 후 해군본부의 명령을 기다렸다. 다음날 새벽 0시10분 사격명령이 내려졌고, 20분 후 3인치 함포가 불을 뿜었다. 포탄은 미식별 선박 가까운 곳에 떨어졌다. 조준사격이 아닌 위협사격이었다. 미식별 선박은 57㎜ 주포와 중기관총으로 대응했고, 이로써 적 함정이라는 게 밝혀졌다.

 

# 적 수송선, 병력 600여 명과 수장

 

백두산함은 즉각 격파사격에 돌입했다. 포 요원들은 가랑비가 내리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포탄을 발사하는 데 구슬땀을 흘렸다. 20여 발 중 5발이 적 함정에 명중했고, 선체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최 함장은 적 함정을 격침시키기 위해 근접사격을 명령했다. 백두산함은 적 함정 1.7㎞까지 접근해 3인치 포탄 10여 발을 발사했다. 포탄은 칼로 찌르듯 선체를 타격했고, 불꽃과 검은 연기가 적 함정을 뒤덮었다.

 

백두산함은 적 함정과의 거리를 900m로 좁히고 화력을 집중했다. 12.7㎜ 기관총탄도 춤을 추듯 날아가 선체 곳곳을 때렸다. 이때 3인치 포탄이 직경 30㎝에 불과한 적 함정의 마스트 꼭대기를 박살 냈다. 최첨단 장비를 보유한 현대 해전에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백두산함 승조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새벽 1시10분. 적 함정이 20도 정도로 기울며 침몰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적 함정이 최후의 발악으로 발사한 57㎜ 포탄 한 발이 백두산함 조타실 왼쪽 밑부분을 관통, 승조원 4명이 다쳤다. 백두산함과 적 함정의 거리는 불과 400m였다. 최 함장은 사격권 밖으로 침로 변경을 지시했다.

 

부상자를 치료하고 함포 고장을 응급조치한 백두산함은 새벽 1시35분 다시 격전의 현장으로 향했다. 4시간에 걸친 탐색에도 적 함정은 보이지 않았다. 옷가지와 기름 등만 떠다닐 뿐이었다. 백두산함은 6월 26일 새벽 1시38분 적 함정이 완전히 침몰한 것으로 판단, 해군본부 명령에 따라 새벽 5시45분 동해안 묵호 근해로 북상했다.

 

치열한 전투 결과 우리 해군은 2명이 전사하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북한군은 1000톤급 수송선이 침몰하고, 병력 600여 명과 무기·식량·탄약 등이 수장된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