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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자료/함께하는 이야기

넉넉한 들판... 미륵정토 꿈꾸는 호국의 고장



충남 논산



<흔히 은진미륵으로 불리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꼽힌다>

 

지명에 산(山)이라는 글자가 있으나 여정은 들녘에서 시작해 들녘으로 끝나는 고장 논산(論山). 흔히 육군훈련소인 연무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고장은 충청도 미륵신앙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또한 계백장군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의 현장이요, 조선 선비정신이 살아 숨 쉬는 학문의 터전이기도 하다.

 


‘놀뫼’, ‘놀미’라고 불리던 마을


충남 논산(論山)은 조선시대의 연산(連山), 노성(魯城), 은진(恩津), 석성(石城) 이렇게 4개의 현이 합쳐져 이루어진 고장이다. 1914년 이들을 합쳐 논산군이라 할 때 ‘놀뫼’의 ‘놀’을 논(論)으로 ‘뫼’를 산(山)으로 바꾸게 된 것인데, 논산시 지명 유래 자료를 살펴보면, 논산은 원래 노성군 광석면 논산리의 ‘놀뫼’ 또는 ‘놀미’라고 불리던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논산천은 금강과 이어져 강경과의 교통이 편했고, 당시 많은 배들이 강경을 거쳐 이곳 놀뫼까지 들어와 이 마을 이름이 점차 이 지방의 지명을 대표하게 된 것이라 한다.


논산의 가장 으뜸 명소는 은진미륵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이다. 높이가 18m로서 우리나라 석불 중 가장 크다. 고려시대 여느 지방의 불상들처럼 머리가 크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히진 않았지만, 충청도 지방에서 유행하던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면서 제작 연대가 확실하다는 면에서 중요한 점을 인정받고 있다.


은진미륵을 밑에서 올려보면 정말 거대하다. 절을 하기 좋은 가장 좋은 포인트는 물론 미륵불의 발치이겠지만, 감상하기 가장 빼어난 곳은 왼쪽 돌계단을 밟고 올라간 지점에 있는 전각 앞이다. 이곳에서 보면 왼쪽으로 은진미륵·석등·석탑이 차례로 내려다보이는데, 그 너머로는 논산의 너른 들녘이 끝없이 펼쳐진다. 그래서 시각적으로 사람은 더욱 작게 보이고, 부처는 좀더 크게 보인다.


                              <논산시 노성면의 명재 윤증 고택>


논산 북쪽 노성면엔 명재고택(중요민속자료 제190호)이 있다. 제자들이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을 위해 지어줬다는 이 집은 화려하지 않지만 기품이 있다. 흔히 ‘백의의 정승’이라 불리는 명재는 임금이 대사헌·이조판서·우의정 등 수많은 벼슬을 내렸지만, 재야에 묻혀 단 한 번도 출사하지 않은 인물. 그렇지만, 명재는 자신의 스승이면서 동시에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의 거두 송시열(1607~1689)에 맞서 끊임없이 비판의 상소를 올렸다.


개인으로 보면 송시열과 윤증, 가문으로 보면 은진 송씨와 파평 윤씨, 당파로 보면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대결은 결과적으로 노론의 전횡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를 흔히 회니시비(懷尼是非)라 한다. 송시열의 집이 회덕(지금의 대전 읍내동)이었고, 윤증이 니성(지금의 논산 노성면)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용어다. 이 갈등은 아직도 파평 윤씨와 은진 송씨 후손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앙금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논산 동쪽의 연산엔 들를 데가 여럿이다. 우선 연산은 조선 최고의 예학자로 추앙 받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1548~1631)의 고향이다. 한전리 서원말엔 사계가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닦던 돈암서원(遯岩書院
·사적 제383호)이 있는데, 서원 왼쪽 편에 터를 잡은 응도당(凝道堂·보물 제1569호)은 서원 건물로는 규모가 제법 큰 편이다. 사계의 제자는 서인과 노론계의 대표적 인물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으니 얼마나 많은 유생들이 사계의 문하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계 집안은 조선 최고의 명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학문이 깊어 나라의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는 문묘에 배향된 인물은 모두 18명인데, 한 가문에서 김장생·김집처럼 부자가 같이 문묘에 배향된 경우는 광산 김씨뿐이다. 또한 광산 김씨는 전주 이씨, 연안 이씨 가문과 함께 각각 7명의 대제학을 배출했는데, 이들이 모두 사계 후손들이다. 돈암서원에서 3km 정도 떨어진 연산 고정리엔 김장생·김집 묘소와 사당, 그리고 양천 허씨의 정려가 마을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계백과 5천 결사대가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황산벌


한편, 연산은 660년(의자왕 20) 계백장군이 5천 결사대로 김유신의 5만 신라군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벌인 황산벌 전투의 현장이다.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은 연산의 천호리·연산리·표정리·관동리·송정리 등을 포함한 넓은 범위다. 가까운 충곡리엔 계백장군 유적지가 있는데, 예전부터 계백장군 묘라고 전해오던 분묘를 잘 복원해놓고, 10년쯤 전엔 백제 군사박물관도 세워놓았다.


흔히 우리는 백제의 멸망 원인을 의자왕의 향락 때문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것보다는 백제가 국제적인 밀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자신이 아니라 고구려를 공격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실수를 했고, 이로써 지방에 분산된 전력을 제대로 활용도 못한 채 처참히 무너진 것이다. 고구려 또한 나당연합군이 자신을 공격하는 줄 알고 방어에만 치중한 나머지 동맹국이었던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도 지원군을 보내지 못했다.


천호리의 개태사(開泰寺)는 국도변의 평지에 터를 잡고 있는 작은 절집이다. 영웅들이 자웅을 겨루던 후삼국시대 말기, 그 마지막 전투는 고려 왕건과 후백제 신검이 936년(태조 19) 벌인 일리천(지금의 경북 선산) 전투다. 신검은 이 전투에서 왕건에게 패주하였고, 이곳 황산에서 항복하게 된다. 승리한 왕건은 황산의 이름을 ‘하늘의 가호를 내려준 산’이란 뜻을 지닌 천호산(天護山)이라 바꾸고 개태사를 지었다. 국가의 환란이 있을 때마다 호국기도를 드리던 고려의 호국사찰로서 전성기엔 1천 명이 넘는 승려가 머물렀다고 하니 규모가 상당했을 것이다.



<936년 태조 왕건이 후백제 신검을 무찌르고 개택사를 세울 때 조성한 개택사지석불입상>

정식 명칭이 개태사지 석불입상(보물 제219호)인 개태사 불상들은 936년 개태사를 세울 때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지금의 자그마한 절집에서 당시의 위용을 느끼기란 불가능하다. 물론 증거는 남아있다.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생긴 철확(충남민속자료 제1호)은 지름이 무려 2m, 높이가 97cm, 둘레는 6.28m나 되는 가마솥이다. 이 가마솥은 개태사 부처님보다 훨씬 더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개태사 정법궁은 ‘대한민국 최고의 호국종찰’임을 자임하는 개태사의 성격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는 전각이다. 가운데엔 부처님, 그리고 왼쪽엔 관우, 오른쪽엔 단군을 모시고 있는데, 부처님 좌대엔 ‘남북통일 세계평화’라고 적혀있고, 단군 영정 앞엔 ‘국조단황상제(國祖檀皇上帝)’라는 글귀가 적힌 연등이 걸려있다. 또 관우 앞에 놓인 신칼 몇 자루도 눈길을 끈다.


논산의 남동쪽 산간 지역도 빼놓을 수 없다. 논과 밭이 가득한 논산에서 그나마 산악지대로 꼽히는 지역이지만 볼거리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양촌 쌍계사에서 한겨울의 모란·연꽃 내음 실컷 맡고, 다리 한쪽만 묻힌 성삼문 묘소에선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절개에 묵념을 올리고, 비운의 후백제 견훤왕의 무덤에선 견훤이 되어 남쪽의 전주를 그리워한 다음엔 강경으로 향하자.

 


시간이 멈춘 듯 느껴지는 강경 읍내 풍경


논산 남서쪽 금강가에 자리 잡은 강경읍으로 들어가려면 우선 강경천에 있는 미내다리를 구경해야 한다. 논산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께서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너는 연산의 가마솥, 은진의 미륵불, 그리고 강경의 미내다리를 보았느냐.” 논산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번쯤 볼만한 사연이 있는 다리다.



<강경천 기슭에 있는 미내다리. 개태사 가마솥, 관촉사 은진미륵과 함께 논산을 대표하는 명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강경만큼 흥망성쇠의 명암이 확실한 고을도 많지 않다. 육로와 수로의 장삿길이 이어지는 강경은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까지도 대구·평양과 함께 3대 시장으로 꼽혔다. 조선시대만 해도 강경포구엔 성어기인 3월부터 6월까지 넉 달 동안이면 하루 100척이 넘는 배들이 드나들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이미 전기·수도 시설이 갖춰졌고, 극장까지도 있었다. 당연히 은행·경찰서·법원·병원 등도 앞 다투어 들어섰다.


강경의 명성은 1940년대까지 이어갔다. 그러나 광복 후 군산항이 황폐화되고, 한국전쟁 때엔 공공기관이 모여 있던 강경이 집중폭격을 당하면서 읍내 중심지 대부분이 파괴됐다. 이후 한때 전국 규모를 자랑하던 강경장은 시골 읍내 작은 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시용 배 몇 척만 떠 있는 강경 포구에 석양이 지고 있다>

‘내리는 사람만 있고 / 오르는 이 하나 없는 보름 장날 막버스 / 차창 밖 꽂히는 기러기떼, / 기러기뗄 보아라 / 아 어느 강마을 / 잔광(殘光) 부신 그곳에 / 떨어지는가.’


―박용래 시인의 ‘막버스’ 전문


강경 출신인 박용래 시인이 이 시를 발표한 1979년 무렵의 강경 분위기가 이 시엔 잘 드러나 있다. 그렇게 또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다지 변한 게 없다. 석양이 질 무렵, 쇠락한 강마을의 노을 드리워진 포구를 따라 거닐어보자. 강경의 심장이었던 강경포구. 그 갈대숲 너머엔 과거를 영광을 추억하는 전시용 배가 몇 척 떠있다. ‘맛깔젓 2호, 맛깔젓 3호, 맛깔젓 4호….


사진 & 글 : 여행작가 민병준 
sanmin@empal.com 



여행정보

●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논산-천안간 고속도로→서논산 나들목→논산 / 중부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지선→논산 나들목→논산 (수도권 기준 2시간~2시간30분 소요)



●맛집 = 우어회는 금강 하류의 강경을 비롯해 부여·군산 등에서 맛볼 수 있는 초봄의 별미다. 보통 2월 무렵부터 잡히기 시작한다. 황산대교 근처의 황산옥(041-745-4836)은 90년 가까운 세월 동안 4대가 이어오고 있는 유명한 별미 집이다. 3~4명이 맛볼 수 있는 우어회 30,000원. 생복찌개(소) 60,000원, 복찌개(소) 40,000원, 생복탕(1인분) 25,000원, 복탕(1인분) 12,000원.




순대는 연산의 별미. 연산원조순대집(041-735-0367)은 이 지방의 전통 방식으로 순대를 빚는다. 맛도 좋고, 양도 푸짐하다. 순대국밥 5,000원, 순대(중) 7,000원.
 






●숙소 =
논산시 취암동의 오거리 일대엔 조선호텔(041-733-1012)을 비롯해 아테네모텔(041-733-2868), 미라클모텔(041-732-0101) 등 숙박시설이 많다. 관촉사가 있는 관촉동 주변엔 산장파크(041-736-9177), 미륵모텔(041-735-1804), 세인파크(041-736-2303) 등이 있다. 탑정호를 끼고 있는 가야곡면 종연리 레이크힐호텔(041-742-7744)이 조용하고 전망이 좋은 편이다. 강경 황산리 금강 쪽엔 계룡장여관(041-745-4189), 옥녀봉 근처엔 유명파크(041-745-4320) 등이 있다.

※참조 = 논산시 대표전화 041-730-3224 www.nonsan.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