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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주차 특별정신교육 - 6·25전쟁 속 남아공 공군의 두 가지 이야기

 ■ 첫 번째 이야기

 

 6·25전쟁 당시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 때의 일이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남아프리카공화국 전투비행대대 소속 F-51 무스탕기 조종사이던 데이비스(Davis) 대위는 1950년 12월 5일 오전 청천강 북쪽 안주 부근에서 중공군이 사용할 탄약과 포탄을 실은 적 화물차를 발견하고 공격해 명중시켰다. 그러나 저공 비행하던 자신의 비행기도 그 파편으로 인해 추락하고 말았다. 다행히 그는 추락하면서도 노련하게 착륙을 시도해 오른쪽 어깨에만 부상을 입었다.

 그가 추락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동료 조종사 리파우스키(Lipawsky) 대위는 그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비행대대 본부에 구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본부에서 전해온 것은 구조헬기가 모두 출동 중이니 대기하라는 응답뿐이었다. 리파우스키 대위는 동료가 추락한 지점 상공을 맴돌며 애를 태우고 있었다. 이제 곧 데이비스 대위는 적의 포로가 될 운명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인근 상공에서 관측임무를 수행 중이던 미 제25사단 소속 헬기 한 대가 현장을 목격하고 구조작업에 나서게 됐다. 조종사인 미 해군 로런스(Lawrence) 대위가 조심스럽게 현장에 접근해 헬기를 착륙시키자 동승했던 관측장교인 밀릿(Millit) 대위가 달려가서 부상당한 데이비스 대위를 부축해 자신의 좌석에 앉혔다. 그러나 헬기가 2인승이었기 때문에 밀릿 대위는 데이비스 대위를 대신해 적진에 남아 있기로 했다. 다른 나라 장교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 것이다.

 이에 감동한 리파우스키 대위는 밀릿 대위를 위해 현장 상공에 머물며 구조대가 올 때까지 공중엄호를 하기로 했다. 결국 몇 시간이 지난 뒤인 일몰 직전에야 밀릿 대위도 헬기로 무사히 구조됐다. 밀릿 대위와 로런스 대위의, 국적을 초월한 이러한 전우애는 후일 모든 유엔군 조종사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었다. 

 

 

 

 ■ 두 번째 이야기

 

 1951년 5월 중공군의 5월 공세 때의 일이다. 5월 11일 16시40분경 남아공 전투비행대대 소속 편대장인 브라우(Braau) 소령은 F-51 무스탕기 4대를 이끌고 평안북도 신계리 부근에서 중공군 보급차량 10여 대를 발견하고 네이팜탄 공격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크루거(Kruger) 중위의 F-51기가 적의 대공포에 맞아 갑자기 붉은 화염에 휩싸인 채 추락했다. 다행히 크루거 중위는 낙하산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어깨뼈가 탈골되고 왼쪽 손과 얼굴에 중화상을 입었다.

 브라우 소령은 급히 본부에 구조를 요청했으나 무전연락이 되지를 않았다. 게다가 연료마저 부족한 상태에 이르게 됐다. 브라우 소령은 부하인 클러로우(Clulow) 대위와 멘츠(Mentz) 중위를 즉시 수원비행장으로 복귀시키고 자신은 홀로 남아 크루거 중위를 엄호하면서 구조대의 도착을 기다렸다.

 클러로우 대위와 멘츠 중위가 기지로 돌아간 후 18시45분경에야 대대로부터 증원된 무스탕기 4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브라우 소령의 무스탕기는 연료가 떨어져 기지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급히 새로 도착한 편대장에게 크루거 중위의 엄호를 인계하고 서서히 지상으로 기체착륙을 시도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의 기체는 산기슭에 곤두박질하고 말았다.

 소령은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얼굴이 피범벅이 되도록 심하게 다쳤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브라우 소령은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크루거 중위에게 달려갔다. 일몰 시각이 다 된 19시15분에야 구조 헬리콥터가 도착했고 이들은 모두 구조돼 본부로 복귀할 수 있었다. 자신의 부하인 크루거 중위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브라우 소령의 행동은 ‘전우애’ 그 자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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