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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 나서는 가슴마다 ‘信의 무기’ 빛났다

참호 속에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이 있다. 인간은 고난의 때에 종교에 귀의하는 경향이 있으며, 종교는 고난의 때에 더욱 빛난다. 이는 전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참혹한 전장에서 종교는 죽음을 넘어서는 위대한 능력을 발휘한다. 본지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우리 군종제도의 역사와 6·25전쟁에 참전한 파란 눈의 군종장교들의 영웅적 이야기를 4회에 걸쳐 소개함으로써 참혹한 전장 속에서 더욱 빛난 군종장교의 역할과 신앙의 위대한 능력을 살펴본다.

 

'신앙전력화' 6·25전쟁 속의 군종장교

<1>군종장교 유래와 우리 군종제도의 역사

 

 
육군25사단 군종장교가 훈련 중인 병사를 가슴에 안고 기도하고 있다 

 

 

※4세기경 군종장교 어원 시작


 고대로부터 성직자들은 전장에서 고유의 역할과 임무를 수행해 왔다. 이것이 이어져 군종제도로 정착됐다. 군종장교(Chaplain)의 어원은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에 나간 마틴(Martin of Tours)이라는 로마 군인은 길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걸인을 만나 자신의 망토를 잘라 주었는데, 그날 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환상을 보게 된다. 이후 마틴은 종교에 헌신했고 거룩한 삶을 살았다. 후에 그는 수호성인이 됐고, 그의 망토는 거룩한 것으로 여겨졌다. 후대 프랑크의 왕들은 이것을 전쟁터에 가지고 나갔으며 가는 곳마다 승리했다.

 라틴어로 이 가죽 망토를 ‘카파(cappa)’라 했고, 이 망토를 넣는 성물함을 ‘카펠라누스(cappellanus)’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들고 전장에 나아갔던 성직자를 라틴어로 ‘카펠라니(cappellani)’, 프랑스어로 ‘사플렝(chapelains)’이라 했다. 이것이 군종장교의 어원이다.

 이후 중세 라티스본(Ratisbon) 공의회(서기 742년)에서는 군종장교의 공식적인 신분과 활동을 최초로 보장했다. 특히 군종장교의 무기 휴대를 금지했으며 비전투원으로의 활동을 보장함으로써 서구 군종제도의 근간이 됐다.

 

 ※우리 군종제도 시작의 직접적 배경이 된 6·25전쟁


 이처럼 군종제도는 그 시작에 있어서 결코 전쟁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우리의 군종제도 역시 전쟁을 통해 시작됐고 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장을 누비며 장병들과 함께하는 것이 우리 군종제도의 출발점이다.

 우리 군의 역사에서 군종제도는 미군과의 상호교류를 통해 최초로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비전투병과를 창설할 여력이 우리에게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병들의 정신무장을 위해 군종제도의 필요성을 인식한 이들은 군대 내에서 종교 활동을 통한 사생관 확립과 무형정신전력 강화를 위한 자구적 노력으로 민간 성직자들을 초청해 종교 행사를 진행함으로써 군부대 안에서의 종교 활동이 시작됐다. 이후 적극적인 군신자들이 군종제도의 필요성을 건의했으나 수렴되지 않은 채, 우리는 6·25전쟁을 맞게 된다. 그리고 6·25전쟁은 군종제도 시작에 매우 직접적인 배경이 된다. 전쟁으로 인해 성직자 종군의 필요성이 군 내·외부에서 강하게 제기된 것이다. 먼저 내부적 요청은 미 33사단 10공병대대에 근무하던 무명의 카투사 병사로부터 시작됐다.

 ‘성직자가 군에 들어와 전투에 임하는 장병들의 가슴을 신앙의 철판으로 무장시키고 기도로 죽음의 두려움을 없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올렸던 것이다.

  

 

 

  ※한경직 목사 등 산파 역할

 

 이것을 발단으로 감리교 선교사 쇼우 박사와 천주교 조지 N. 캐롤 안 주교, 그리고 극동사령부 군종참모 이반 L. 베넷 군목, 장로교 한경직 목사, 감리교 류형기 감독 등에 의해 성직자 종군의 필요성이 외부에서도 강하게 제기됐다. 이들은 한국군 군종제도의 산파 역할을 했는데, 여러 차례 정부와 논의 끝에 드디어 1950년 12월 21일 대통령 비서실 지시 제29호에 의해 육본 차원에서 검토가 지시된다. 그리고 1951년 2월 7일 육본 일반명령 제31호에 의거 육군본부 인사국 내에 군승과가 설치돼 마침내 장병 신앙 전력화를 위한 기틀이 마련됐다.

 이렇게 전쟁 중 필요에 의해 시작된 우리 군종제도는 무보수 촉탁시대(1951. 2. 28.~1952. 6. 15.)와 문관시대(1952. 6. 16.~1954. 1. 11)를 거쳐 이후 군종병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보수 촉탁시대와 문관시대를 거쳐오는 3년 9개월 동안 군목 모집 8차에 총인원 360명의 기독교, 천주교 성직자들이 전·후방 각처에서 종군했다. 그중 104명이 전역했고, 121명이 임관 보류돼 135명 만이 1954년 12월 13일 육군본부 광장에서 당시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장군에게 신고함으로써 비로소 현역시대가 시작됐다.

 

 

 

군종장교는 장병·현장 중심의 활동으로 바른 사생관 확립을 통한 신앙 전력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육군7사단 군종장교(맨 왼쪽)가 거점기도회를 인도하고 있다.

 

  ※베트남전에 군종장교 첫 파병

 

6·25전쟁 이후 육군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10개국 총 203명의 군종장교를 파병했다. 그중 142명의 가장 많은 군종장교가 파병된 베트남 전쟁은 우리 군종제도 변화와 발전에 또 하나의 새로운 출발점이 됐다.

 6·25전쟁 당시 기독교와 천주교로 시작된 군종제도에 불교도 함께 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1968년 11월 30일 5명의 불교 성직자들이 군종 24기로 임관해 종군했으며, 총 12명의 불교 성직자들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불교 성직자들의 종군으로 군종제도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이전에는 군모에 병과 표시로 십자가를 부착했으나, 이후에는 일반장교와 같이 계급장을 부착하게 됐으며 호칭 또한 ‘군목’에서 ‘군종장교’로 총칭하게 됐다(원불교는 2007년 6월 30일 군종 65기로 시작).

 이처럼 우리 군종제도는 전쟁과 함께 시작됐고 전쟁과 함께 변화하고 발전했다. 전시 전장에서 장병들과 함께하며 ‘전투에 임하는 장병들의 가슴을 신앙의 철판으로 무장시키고 기도로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는’ 고유의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시작된 군종 활동은 평시 장병 중심, 현장 중심의 활동으로 장병들의 바른 사생관 확립과 이것을 통한 신앙 전력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장병 중심, 현장 중심의 활동은 군종 활동의 본질이며 군종장교의 존재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