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수호하라!
‘위대한 임무’ 완벽 수행 73년
국민과 함께한 국군 발자취
일본군 무장 해제·남한 질서 유지 위해
정전협정 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의거 주둔
경기도 평택시의 미군 기지 캠프 험프리 내에 위치 한 주한미군사령부 본청 모습. 평택=국방일보 조정원 기자
대한민국에는 육·해·공군과 해병대 외에 또 다른 군대가 있다. 주한미군이다. 주한미군은 대한민국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미군을 총칭(總稱)한다. 주한미군의 역사는 1945년 9월 시작됐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오키나와에 있던 미24군단이 일본군 무장해제와 점령 임무를 위해 남한 지역에 들어오면서 주한미군의 역사가 시작됐다. 최초의 주한미군이었다. 그로부터 73년의 세월이 흘렀다
미24군단의 본대가 1945년 9월 8일 남한 지역 점령 임무 수행을 위해 인천항을 통해 들어왔다. 미 군정시대 및 주한미군시대의 개막이었다. 주한미군점령군사령관 겸 미24군단장은 하지(John R. Hodge) 육군중장이었다. 그는 태평양전쟁에서 후퇴할 줄 모르는 공격적인 지휘관으로 명성을 얻음으로써 ‘태평양의 패튼’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남한의 총독’과 다름없었던 하지 장군에게 주어진 임무는 조선총독으로부터 항복을 받는 것, 남한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18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의 무장해제 및 일본본토 송환, 남한지역에 대한 치안 및 질서 유지, 그리고 장차 한반도에 들어설 통일정부 수립 지원 등이었다.
하지만 주한미군사령관 겸 미24군단장이던 하지 장군에게 군정(軍政)은 처음부터 벅찬 임무였다. 하지 장군은 경력으로나 성격상으로나 군정 임무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철저한 전투형 장군으로서 점령 임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미국 일리노이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장교후보생 과정을 거쳐 장교로 임관한 후 전투에서의 공적을 통해 장군에 오른 하지는 정치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수한 야전형 지휘관이었다.
최초 미군에서는 남한 지역 점령군사령관에 중일전쟁(中日戰爭) 당시 중국 장제스(蔣介石) 밑에서 참모장을 맡았던 스틸웰(Joseph W. Stillwell) 육군대장을 임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장제스 총통이 미10군사령관이던 스틸웰 장군의 남한 지역 미군사령관 임명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장제스는 중일전쟁 시 자신의 참모장으로서 자신의 지휘 방식에 사사건건 반대했던 스틸웰 장군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 패망 후 스틸웰 장군이 중국과 가까운 남한 지역 미군사령관에 임명되는 것에 반대했다. 그 결과 스틸웰 대장이 지휘하는 미10군 대신 하지 중장이 지휘하는 미24군단이 남한 지역 점령 임무를 맡게 됐다.
1960년 당시 주한미군의 기동훈련 모습. 필자 제공
하지 장군의 미24군단은 예하의 미7사단, 미40사단, 미6사단 등 3개 사단으로 최초 남한 지역 점령 임무를 수행했다. 이를 위해 하지 장군은 먼저 조선총독부 청사로 쓰였던 중앙청에서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로부터 정식 항복을 받고 남한통치에 들어갔다. 그때가 1945년 9월 9일이었다. 이때 중앙청에는 일본 일장기(日章旗) 대신 미국 성조기(星條旗)가 게양되면서 주한미군 시대가 열렸다. 이후 미24군단은 남한 지역 내 일본군 17만9273명과 일본 민간인 70만4613명을 일본으로 송환했다. 이어 한반도의 일본군포로수용소에 수용돼 있던 연합군 포로 680명을 석방했다. 연합군 포로는 미군 140명, 영국군 469명, 호주군 71명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최초의 주한미군인 미24군단과 첫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은 그 임무가 끝났다. 이에 미24군단은 1949년 6월 29일까지 완전히 철수하고, 국군의 훈련지원을 위해 군사고문단 약 500명만 남겨놓았다. 초대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장군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8월 27일 남한 지역 통치권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넘겨주고 서울을 떠났다. 후임 주한미군사령관은 쿨터(John B. Coulter) 소장이 맡았다. 하지만 미24군단이 완전히 철수한 1949년 7월 1일부터는 주한미군사고문단(KMAG) 단장인 로버츠(William L. Roberts) 준장이 주한미군사령관직을 겸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 극동군사령관이던 맥아더 원수는 펜타곤의 지침에 따라 한반도의 전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처치(John Church) 준장을 미극동군사령부 전방지휘소장 겸 연락단장으로 수원에 보냈다. 이후 한국에 온 처치 장군은 주한미군사령관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한국의 미군 중 가장 선임이었다. 전쟁 후 최초의 주한미군사령관이었다. 이후 미24사단장 딘(William Dean) 소장이 한국전선에 최초로 투입되면서 주한미군사령관을 겸하게 됐다. 후에 주한미군사령관은 미8군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 중장으로 바뀌었다.
6·25전쟁 동안 대한민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중 서열이 가장 높은 직책이 미8군사령관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미8군이 한반도에 사령부를 설치한 이후 주한미군사령관은 미8군사령관이 맡게 됐다. 전시 주한미군사령관의 임무는 미국의 전쟁정책에 따라 최초에는 38선 회복,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한반도의 통일, 중공군 개입 이후에는 다시 38선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 수호였다. 그 과정에서 주한미군사령관은 한국군 증강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주한미군의 성격도 변했다. 그 이전까지 주한미군은 미국의 정책과 전략에 따라 일방적으로 움직였다. 미국은 필요하면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하고, 임무가 끝나면 철수시켰다. 광복 후의 주한미군이 그랬고, 6·25전쟁 전후 주한미군이 그랬다. 대한민국의 입장과는 무관하게 미국의 필요에 따라 주둔하거나 철수했던 것이다.
2017년 경북 포항시 송라면 독석리 해안에서 열린 한미 해군·해병대 연합 여단급 상륙훈련 ‘결정적 행동’에서 한국형 상륙돌격장갑차(KAAV)와 완전무장한 한미 해병대원들이 상륙훈련을 하고 있다. 포항=국방일보 이헌구기자
하지만 6·25전쟁 이후 주한미군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해 주둔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에는 “미합중국의 육해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허용하고, 미합중국은 수락한다”고 돼 있다. 이에 따라 정전협정 체결 후 주한미군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해 공식적으로 주둔하게 됐고, 주한미군사령관도 1957년 7월 1일 유엔군사령부가 일본 도쿄에서 서울 용산으로 오면서 유엔군사령관이 겸하게 됐다. 이후 주한미군사령관은 1978년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창설되면서 한미연합군사령관이 맡았다. 물론 한미연합사령관은 유엔군사령관을 겸하고 있다. 그들의 주 임무는 제2의 6·25전쟁 방지를 위한 대한민국의 방위였다.
주한미군은 73년의 세월 동안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했다. 8·15광복 후에는 군정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 수립에 기여했고, 6·25전쟁 시에는 유엔군과 함께 자유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리며 싸웠으며,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해 대한민국 방위와 ‘제2의 6·25전쟁 방지’를 위해 2018년 현재까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서 주한미군은 강력하고도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하며, 대한민국의 또 다른 군대로서 변함없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남정옥 전 군사편찬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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