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상하이 항일유적지 탐방

 과거에서 찾는 미래의 희망, 중국 상하이 '항일 유적지를 가다'

 

 ‘광복’이 오기까지 우리 민족은 쉬지 않고 일제와 싸웠다. 그날은 우연히 주어진 게 아니다. 우리 민족의 피땀 어린 저항과 노력에 따른 결실이었다. 본지 조아미·조용학 기자는 지난달 12일부터 19 일까지 광복 70년을 맞아 국외 독립운동사적지의 대표 장소인 중국 상하이를 찾았다. 상하이는 독립투사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직해 집결하고 독립운동을 펼친 중심지다. 이곳에서 임정을 비롯해 만국공묘, 김구 가족 거주지 등을 탐방하며 조국광복을 위해 희생한 선열들의 위대함과 우리가 나아갈 길을 조망해봤다.

 

 

만국공묘 - 조국광복을 위해 온몸을 불사르다 순국한 독립운동가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던 만국공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이국땅에 묻혀야 했던 선열들의 쓰라린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아픈 역사의 현장을 지켜봤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정부가 오래오래 기억되고 더 잘 보존됐으면…”


   지난달 14일, 태풍 ‘찬홈’이 중국 전역을 강타한 뒤 찾아온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상하이 취재 3일째인 이날은 수은주가 35도를 넘나들어 온종일 습하고 강한 햇빛으로 온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마당로 306농 4호’. 손에 쥐어진 건 지도와 수첩, 카메라 그리고 펜뿐. 두 기자는 상하이 독립운동지 역사탐방 취재를 위해 하루에 평균 13㎞ 이상 걸으며 수첩과 카메라를 열심히 놀렸다. 상하이 지하철 1호선 황피남루역에 내려서 무작정 걷기 시작해 번지수를 찾았다. 거리상으로 10분이면 도보로 갈 곳을 중국어를 하지 못해 여러 번 길을 헤매다가 나뭇잎에 반쯤 가려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이정표를 발견했다.

 

 임시정부가 있는 이곳 신천지 지역은 찻길 하나를 두고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도시같이 개발 상태가 확연하게 차이나 보였다. 임시정부의 반대쪽 길가에는 유럽풍 느낌의 카페와 퓨전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들이 줄지어 손님들을 반겼다. 임시정부가 있는 쪽은 오래된 옛집을 비롯해 거미줄과 낙엽 부스러기로 뒤엉킨 건물들이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화살표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따라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픈 역사의 현장, 임시정부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조국 광복을 위해 상하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는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외에 7개 더 만들어졌다가 1926년 7월 상하이를 중심으로 통합됐다.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 의거가 있었던 1932년 4월까지 이곳에 있다가 일본의 반격으로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로 옮기게 됐다. 적갈색 벽의 3층 건물로 이루어진 임시정부는 ‘정부청사’라는 이름의 무게감과 달리 규모가 작고 허름해 보였다.

 

    애써 찾아왔는데 다음달 3일까지 리모델링 공사 중이어서 들어갈 수 없다는 비보(?)를 접했다. 중국인 공사 인부들 10여 명이 임시정부의 새 단장을 위해 시멘트로 바닥을 메우고, 페인트를 칠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공사 관계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노란색 형광빛만 가득한 내부에서는 막 전기톱으로 나무를 다듬어 온통 나무 가루로 가득해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였다. 먼지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건 당시 사용했던 집무실과 임시정부 청사 시절 사용된 자료와 사진 등이었다.

 두 시간여쯤 임시정부 안과 밖을 취재했다. 그 사이 의외로 한국 대학생들이 임시정부를 많이 찾았다.

 중국 산동대에서 어학연수 중인 문병조(26) 씨가 여자 친구와 이곳을 찾았다. 한참 동안 밖에서 공사 중인 임시정부 안을 살피며 “상하이에 오면 임시정부에 꼭 들러보고 싶어 찾았다”며 “한때 주권을 상실했던 조국의 비애를 느낄 수 있는 현장에 오니 마음이 숙연해진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어 대학생 8명이 단체로 이곳을 둘러봤다.

 상하이 교통대에서 어학연수 중인 한양대 중문과 3학년 전채령(22) 씨는 “한국인만 임시정부를 찾는 것 같다. 중국인 나아가 외국인들도 이곳을 방문할 수 있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오래오래 기억됐으면 좋겠고, 더 잘 보존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내년이면 사람 나이로 90살이 되는 임시정부. 90년 가까이 역사의 슬프고 아프고 기쁜 현장을 지켜봤을 것이다. 물결 모양의 벽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 듯 주름져 있다. 임시정부를 떠나기 전 손의 온기를 불어넣으며 이렇게 전했다.

 ‘감사합니다.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

 

윤봉길기념관 - 루쉰공원 내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지 앞에서 윤 의사의 업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장종섭(왼쪽)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 상하이지부 회장.

 


 매헌기념관 2003년 개관, 흉상·친필편지·순국전 사진 등 전시

 

  상하이 취재 넷째 날인 지난달 15일 오전 9시, 훙커우취에 위치한 루쉰공원(옛 훙커우 공원). 무료로 개방하고 있는 이 공원은 상하이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공원에 가득했다. 테니스를 치는 사람, 산책하는 사람, 삼삼오오 모여 담소 나누는 사람 등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특히, 아스팔트 바닥 위에 물로 붓글씨 연습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글로 ‘영원히 기념 당대영웅’이라는 글씨가 눈에 띄었다. 수소문한 끝에 겨우 중국인 할아버지라는 것만을 알아냈다. 매일 아침이면 이곳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는 한 교민의 얘기를 듣고 한 시간 넘게 기다렸지만 만나지 못해 못내 아쉽기만 했었다.

 

 그가 쓴 ‘당대 영웅’은 윤봉길 의사를 뜻하는 듯했다. 이곳 루쉰공원은 윤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일본 일왕의 생일연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를 도시락 폭탄으로 공격했던 장소다. 공원 내에 있는 매헌기념관은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를 기념하는 곳으로, 2003년에 개관했다. 그의 일대기를 조명하는 자료와 흉상, 친필편지, 순국하기 직전의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은 2년 가까이 리모델링을 마치고 지난 4월 재개관했다. 입장료는 15위안. 우리나라 돈으로 3000원이다. 기념관의 관리와 보호 차원에서 입장료를 받는다는 게 기념관 관리자의 설명이다. 진한 갈색의 2층 목조건물로 된 기념관에는 윤봉길 의사의 업적과 훙커우 공원 의거일과 관련된 역사 자료가 사진과 함께 설명돼 있다.

 

   한쪽에는 의거 3일 전인, 1932년 4월 26일 윤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입단 선서를 한 뒤 기념촬영한 사진이 걸려 있다. 태극기 앞에 서 있는 스물다섯 청년은 왼손에 폭탄을,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서 있다. 두려움과 긴장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단호한 결단을 내린 심정이 사진으로 전해졌다. 2층에서는 10분가량 분량으로 제작된 윤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나라를 지키고자 순국한 윤봉길 의사, 그 이름은 지금까지도 길이길이 전해져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와이탄 공원 - 상하이의 대표 관광명소 와이탄 공원에는 밤낮으로 여행객들로 붐빈다. 이국적인 분위기 속에서 웨딩 촬영을 하는 신혼부부들의 모습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김구 가족 거주지 -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 선생이 모친 곽낙원, 아내 최준례 그리고 두 아들과 3년 동안 머물던 곳. 현지인 경비원이 고급 식당 건물로 새롭게 지어진 건물 입구에 서 있다.

 

수많은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존재, 중국에만 400여 개
신채호 거주지·인성학교 터·신대한 발행지 등 신천지에 몰려 있어

 

   국외에 산재한 한국 독립운동사적지는 대략 900여 개. 그 가운데 중국에만 400개 이상의 사적지가 존재한다. 상하이에도 국외독립운동사적지가 확인된 곳만 20여 곳 정도 있었다.

   지하철 10호선 송위엔루 역에서 내리면 한인 독립 운동가들이 묻힌 송경령 능원(옛 만국공묘)이 있다. 임시정부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등 14기의 묘가 있다. 그중 박은식, 신규식 등 7기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이장돼 초석만 있고 나머지 7기는 아직 남아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이 도착한 선착장, 와이탄 공원. 3·1운동 이후 김구와 최명식 등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을 통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와이탄에서 1923년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 등 3인의 조선 청년이 일본육군대장 다나카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현재 이곳은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사진을 남기는 장소이기도 하다. 밤에는 고층 빌딩에서 나오는 화려한 네온사인 등 건물 조명이 황푸강에 반사돼 장관을 이루고 있다. 황피남루 350농의 주소는 김구의 가족이 1922년부터 1924년까지 거주한 곳이다. 옛 건물은 모두 헐리고 이 일대에는 고급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다.

 

  상하이 국외독립운동사적지 대부분은 신천지 지역 근처에 몰려 있다. 신채호 거주지, 인성학교 터, 신대한 발행지 등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지금 이곳은 몰라볼 정도로 변했다. 백화점과 명품 숍이 들어서 있어 옛터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유적지를 찾는 발길마다 느끼는 점은 한가지였다.

 

 갖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조국 광복을 위해 매진하던 선열들의 노력과 희생은 우리 가슴에 새겨져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광복 70년을 맞은 지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살신성인한 선열들의 독립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겨야 할 시기다.

 

 

Posted by 어울림 국방홍보원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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