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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참전용사 희망드림코리아] ⑯ 6.25전쟁 영웅 에티오피아 에스티파노스 씨



 

몸이 성치 않은 6·25 참전 용사, 에스티파노스 씨.

 

 

 

 

지팡이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는 에스티파노스 씨 부인.


 

 

 

기사사진과 설명

골목에 빨래를 널어 놓은 열악한 에스티파노스 씨 집.


 

 

 

 

강원도 지역에서 작전수행 중 청력 잃어

현재 7평 규모 가건물…전기도 안 들어와

“파병 기간 한국군이 만들어 준 파스타와 야채국이 가끔 기억납니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 65주년이 다가온다.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발발한 6·25 전쟁은 1128일(3년1개월) 동안 300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낳았다. 이로 인해 남북은 분단됐고 1000만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이후 6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눈부신 발전 뒤에는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많은 분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21세기 세계 최빈국 에티오피아도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한 혈맹이다.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지상군을 파병한 에티오피아는 1951년부터 1956년까지 6년간 총 6037명이 참전, 123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다.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 빈민가에 사는 에스티파노스(90) 씨는 한국전쟁 참전 영웅이다. 그는 6·25 전쟁 당시 강원도 춘천·화천 일대에서 작전을 수행하다 한쪽 귀의 청력을 잃어 평생 장애자로 살았다.

 에스티파노스 씨의 집은 한국촌(Korea Village)의 ‘아와레’에 있다. 이곳에서는 원룸주택처럼 집 한 채에 여러 세대가 사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동네는 하수구·화장실 등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아 거대한 쓰레기장을 방불케 한다. 버려진 오물로 악취가 진동한다.

 한국전쟁 영웅의 집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초라하다. 7~8평 규모로 매우 좁고, 판자로 어설프게 만들어진 가건물이다. 하루 종일 햇빛이 들지 않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지붕에 손바닥 크기의 구멍을 뚫고 투명 플라스틱으로 막아놓았는데 그곳으로 들어오는 빛이 유일한 조명이다. 공간은 작은 주방과 잠을 청할 수 있는 방 하나가 전부다.

 에스티파노스 씨는 “우리 집 주변은 한국과 지형이 유사해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전 강뉴부대 전사들이 적응훈련을 받던 곳이다.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한국에서 용감하게 싸우고 귀환한 참전용사들에게 이곳을 하사했다”면서 “이후 1970년대 에티오피아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재산을 몰수당하는 등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이때 코리아 빌리지의 상황도 급격히 악화돼 참전용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고 말했다.

 당시 사회주의 정권으로부터 겨우 목숨을 부지한 그는 현재 부인과 단둘이 살고 있다. 지팡이에 의존해야 겨우 움직이는 부인이 거동을 하지 못해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돌보고 있다.

 “이웃도, 사회도, 국가도 의지할 곳이 없어요. 아들 둘에 딸 하나가 있는데 딸은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두 아들은 배우지 못해 외국에서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집을 떠났습니다. 그 후 수년이 흘렀지만 연락이 없어요. 어느 나라, 어느 곳에든 살아 있기만 바라지요.”

 에스티파노스 씨는 한국전쟁 당시 고막을 다쳐 한쪽 귀의 청력을 완전히 잃었다. 통신선을 연결하던 중 적군의 포탄이 가까이서 터져 고막이 파열됐다. 그 길로 소리와 이별했다. 통신병이었던 그는 밤낮없이 전화선을 통해 전쟁 상황과 사상자 정보를 전달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작전에 투입되면 제일 먼저 적과 마주치고, 가장 늦게 철수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눈앞에서 포탄이 터져 동료 전우들이 스러져 가는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에스티파노스 씨는 한국전쟁 때 난생 처음으로 하얀 설탕 같은 눈을 보고 놀랐고, 혹독한 겨울 날씨에 또 한번 놀랐다. 그는 파병 기간 내내 배가 고팠다며 한국군이 만들어줬던 파스타와 야채국이 가끔 기억이 난다고 했다.

 위험천만했던 파병 생활을 마치고 에티오피아로 귀환했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아내의 비보였다. 한국에서 사투를 벌일 때 아내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오랜 기간 홀로 자녀들을 키우다 1990년 지금의 아내와 재혼했다.

 “지금은 가난하고 늙고 병들어 60여 년 전보다 더 추워요. 고국의 날씨는 따듯하지만 체감온도는 점점 더 떨어져 갑니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이지만 마음 따뜻하게 마감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