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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자료/함께하는 이야기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제 5땅굴'을 찾아라!

 

정전협정후 60년!

그동안 북한은 휴전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도발을 시도해왔다.그 중에서도 그들의 남침야욕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남침용땅굴입니다.

 

지난 18일은 제2땅굴이 발견된지 38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1974년 11월15일 제1땅굴이 발견된 후 지금까지 4개의 땅굴이 발견, 이후 땅굴발견에 대한 보고는 없었으나 최근들어 북한의 핵무기에 버금가는 잠재적 대남 도발 침투 전력으로 평가 받는 땅굴의 존재가 최근 언론을 통해 다시 부각되고 있어 지금까지 돌아보았던 땅굴들 정리해 보겠습니다.

 

 

■ 제1땅굴


1974년 11월15일 아침 7시30분, 북한의 남침의욕이 적나라하게 들어난 남침용땅굴이 발견됐다. 당시 육군 25사단소속 선임하사 구중섭이 지휘하는 육군 수색조가 수색임무 를 수행하던 중, 땅 밑에서 수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고 수상이 여겨 그 곳을 파던 중 북한 초소로부터 갑자기 사격을 받았다. 이에 우리 군도 응사하면서 조사를 계속 한 결과 땅굴이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 바로 남침용 제1호 땅굴이다.

 

 

 

지난해 11월 15일 육군 25사단에서는 제1땅굴 발견 37주년 기념 ‘Remember 제1땅굴’ 행사가 진행됐다. 부대입구에 들어서자 우뚝 서있는 부대상징탑에서 보이는 555숫자중에서는 제5땅굴을 찾자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당시 땅굴을 발견했던 예비역 박광호 소령(63세, 당시 수색 중대장)과 예비역 구정섭 상사(63세, 당시 해룡연대 수색중대 선임하사)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 북한이 땅굴을 판 목적은 남침 시 1시간 내에 1개 연대 규모를 침투시키고, 남파 간첩의 비밀 통로로 이용하며, 요인의 납북 시에 빠른 길로 이용할 수 있고, 우리 군의 기밀을 탐지해 내기 위한 것 등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지표에서 250~450cm 깊이로 잔디가 죽지 않을 정도로 얕게 파고 철근이 세가닥 들어간 조립식 콘크리트를 사다리꼴로 엮어 튼튼하게 만들어졌다.

 


서울로부터 52km, 개성으로부터는 2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제1땅굴은 1976년부터 1988년까지 국민안보 교육 목적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어 오다가 1988년 이후 안전문제로 일반인 공개가 중단되고 있다.

 

■ 제2땅굴

 

 


1973년 푸른별 청송부대 이기태 상병과 김효섭 일병에 의해 최초 폭음을 청취한 이후 민·관·군은 땅굴을 발견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2년 후 제 2땅굴은 시추작업에 의해 발견되었고 귀순자의 증언과 과학적인 조사로 인해 북한의 대남침략용 땅굴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북한은 다이너마이트 장전공 방향, 갱도 배수로, 그리고 사용된 굴착공법 등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땅굴 발견시 내부수색작전에 투입되었던 중사 김호영외 7명의 대원은 북한이 차단벽에 설치해놓은 지뢰와 부비트랩에 의해 산화했다.

  

 

그러나 북한이 땅굴을 팠다는 세가지 증거가 있다.


1. 다이너마이트의 장전공이 방향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 북에서 폭발을 하면서 갱도공사를 했다는 증거
2.  갱도 배수로의 방향이 남에서 북으로 향하고 있다.
   - 갱도공사후 물을 빼내는 2중작업을 피하기위해 1000미터당 약 3도의 경사를 두고 공사를 진행했음.
3. 북한과 우리 대한민국의 굴착공법이 다르다.
   - 북한이 파내려온 구간은 폭발공벙을 이용 벽면을 그을린 반면, 우리 대한민국은 대형굴착기를 이용하여 벽면색갈의 변함이 없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있은 후 국내에 평화무드가 조성되어 국민들의 통일의 환상에 젖어 있을 때, 북한이 지하 50-160미터의 견고한 화강함층을 뚫고 군사분계선 남쪽 1.1km가지 파내려온 제2땅굴은 유사시 아군 후방으로 병력을 침투시켜 국가혼란을 조장하고 국군의 방어태세를 무력화하여 한반도를 공산화하기위한 기습남침용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 제3땅굴


육군 1사단에 의해 1978년 10월 17일 판문점 남쪽 4km 지점인 군사분계선 남방 435m지점에서 발견된 제3땅굴은 1시간에 3만 명의 병력과 야포 등 중화기를 통과시킬 수 있는 규모이다. 군사분계선 남방 435m지점까지 연장되어 당시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땅굴로 주목을 받았다.

 

 

제3땅굴은 총길이 1,635미터, 지하 73미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2미터, 폭2미터의 둥근 아치형 땅굴로 현재는 265미터만 도보로 견학할 수 있었다. 관람시 소지한 물품은 보관대에 보관하여야 하며 사진등의 촬영은 불가능하다.

 

 

DMZ영상관의 로비에 있는 추념의 불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3년 1개월동안 600여만명의 사상자를 낸 한국전쟁은 우리민족 모두에게 커다란 상처를 안겨주었다. 민족분단의 아픔과 함께 피흘리며 죽어간 숱한 동족들의 애환을 안고 있는 휴전선 여기, 그들의 염원을 담아 "추념의 불"을 밝힌다...라고

 

 

 

제3땅굴이 위치한 DMZ안보공원에는 전시관과 영상관, 안내소등과 함께  DMZ소공원에서는 DMZ음수도 맛볼 수 있다.


■ 제4땅굴

 

강원도 산악지역에는 남침용 땅굴이 만들어 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을 깨고 1990년 3월 3일 강원도 양구군의 동북쪽 26km 지점의 비무장지대안에서  남침용땅굴이 발견되었다. 이른바 제4땅굴로 동부전선에서는 최초로 발견된 땅굴이다.

 


1989년 8월 백두산부대 전초수색대는 청음탐지활동중 지하의 땅굴굴착소리를 감지하고 이에 집중적인 탐지작전을 수행하여 1989년 12월 24일 최초발견에 성공했다. 제4땅굴은 최초발견부터 시추공공사, 관통, 그리고 역갱도공사까지 국군이  단독작전으로 발견한 최초의 땅굴이기도 하다.

 

<역갱도>

 

 

당시 제4땅굴을 발견하고 수색작전중 분대원을 구하고 산화한 화제의 군견이 있었으니 이 군견이 바로 육군 제21사단의 탐지견 헌트(독일산 세퍼드종인 헌트는 당시 나이 4세)이다. 198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최초 발견된 제4땅굴을 역갱도작업으로 관통된 이듬해 3월 3일 땅굴 수색 및 소탕작전이 시작됐고 이때 수색팀과 함께 탐사견으로 헌트가 투입됐다. 제1땅굴 발견당시에는 3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제2땅굴 발견후 수색작전중에도 당시 김호영중사외 7명이 적의 지뢰와 부비트랩에 산화하기도 했기에 땅굴 수색작전은 매우 위험한 작전이었다. 적의 유독가스와 지뢰매설이 예상되는 암흑같은 갱도내에서 수색작전중 군사분계선 330미터를 남겨 둔 지점에서 헌트는 화약냄새를 맡고 위치를 알려주기위해 뛰어가다가 북한군이 설치해 놓은 수중 목함지뢰를 밟고 산화하게 된다. 헌트의 희생으로 수색작전중인 1개 분대원들의 생명을 구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분대원의 목슴을 대신하여 산화한 헌트는 군에서 인헌무공훈장을 수여받고 군견으로서는 최초로 장교계급인 소위로 추서됐다. 충견 헌트는 죽어서도 북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4땅굴 안보전시관 내부모습>

 

 

동부전선에서도 제4땅굴이 발견되며 북한이 전전선에 걸처 남침용 땅굴을 굴착했음을 입증됐었다.


현재 제1땅굴을 제외하고는 모든 땅굴이 안보관광과 체험 휴식을 동시에 취할 수 있도록 시설을 대폭 교체하고 정비해 안보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다.

 

 

남침 1시간 내에 중무장한 군인 수천 명을 침투시킬 수 있는 땅굴, 이 땅굴을 발견하지 못했을 경우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적은 아직도 땅굴을 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디엔가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제5, 제6의땅굴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끊이지 않고 있는 도발현장에서 분단의 고통과 아픔을 깨닫고, 항상 경각심을 가지고 긴장의 고삐를 놓아서는 안될 것이다.

 

또 언제 어디에서

어떤 도발로

우리의 평화로움을 위협할지 모르기 때문에.....!

 


임영식기자 <국방홍보원 블로그 어울림 기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