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으로 본 정전협정-고바우 김성환 화백

‘피란’ 대신 다락방에 숨어… 종군 화가로…“총탄 빗발치는 서울그 거리들을 그렸죠”



전쟁 시작부터 서울 함락까지

돈암동·혜화동 일대 돌며

수많은 스케치 그려

‘고바우’도 다락방서 탄생

 

그림 속 밀짚모자 쓰고

봇짐 멘 남자가 바로 나

 

서울 수복 뒤

중공군 투항 권고 삐라 그려

美 기관지 성조지 1면 장식도

 

정전협정 때  느낌? 글쎄…

전투에 참여했던 10대들

그 ‘이름없는 용사’ 기억해야

 

시신 널브러져 있어도

수습할 수 없었던

참혹한 전쟁 잊어선 안 돼

 

 




“북한군 탱크가 줄지어 있는 곳에 미군 B-29 폭격기가 포탄을 쏟아부었어요. ‘꽝! 꽝!’ 하는 소리가 나서 보니 북한군이 뒤늦게 대공포 같은 것을 쏘더라고요. 그런데 비행기 근처에도 안 닿더라는 거죠. 솜사탕처럼 피어난 연기가 없어지고 나니 폭격기는 유유히 사라지고 없었어요. 그때 직감했죠. ‘(이 전쟁은) 이기겠구나’.”


노화백(老畵伯)의 기억은 생생했다. 포화가 피어오르던 6·25전쟁 당시 격변의 풍랑을 직격으로 맞았던 서울을 생생히 그려낸 뒤 전장으로 뛰어들어 생사를 오가는 현장을 기록했던 갓 스물의 만화가는 아직도 전쟁의 참혹한 풍경을 잊지 못하는 듯했다. 전쟁 한복판에서 그렸던 작품들을 펼쳐 보이며 그때의 장면을 하나하나 설명하는 모습은 열정이 넘쳤던 약관(弱冠)의 모습 그대로였다. 단 네 컷의 짧은 만화 속에 촌철살인의 해학과 비판을 선보이며 국민의 애환을 달랬던 ‘고바우 영감’의 주인공 시사만화가 김성환(84) 화백 이야기다.


지난 21일 경기도 분당구 자택에서 만난 김 화백은 60여 년 전 치열했던 기억을 생생히 전했다. 18살의 어린 나이에 연합신문을 통해 시사만화가로 데뷔한 그를 ‘시대를 기록하는 만화가’로 만들어준 ‘고바우 영감’ 역시 전쟁 중 탄생했다.


“(1950년) 6월 28일 탱크를 몰고 서울로 들어온 북한군은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마구 잡아갔어요. 특히 낙동강전투에서 많은 군인들을 잃은 뒤로는 더 심해졌죠. 그때 난 서울 정릉에 살았는데 피란을 가지 않았어요. 마땅히 갈 곳도 없었고…. 정릉집 다락방에 짐을 쌓아놓고 90일 정도를 숨어 있었어요. 고바우는 그때 구상했죠. 다락방에 숨어서 그렸던 200여 명의 만화 주인공 중 하나가 고바우예요.”


김 화백은 은신처에서 벗어나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곳곳을 그려냈다. 특히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서울이 함락당한 6월 26일에서 30일까지 집에서 가까운 돈암동과 혜화동 일대를 돌며 수많은 스케치를 남겼다. 인상적인 것은 당시 그림 대부분에 밀짚모자를 쓰고 봇짐을 멘 남자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김 화백 자신이었다.


“곳곳을 살펴보고 있는 나를 그림 속에 넣었어요. 밀짚모자를 쓰고 농사꾼인 척했죠. 그땐 농사꾼이 귀해서 해치지 않았거든요. 서울이 함락당하기 전에는 나를 ‘기자’라고 소개하고 곳곳을 살펴보기도 했어요. 간단히 스케치를 하고 집에 돌아와 마무리를 하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죠.”


북한 치하의 서울 생활은 어땠을까? 김 화백은 “불안은 했지만 버틸 만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많이 힘든 시기였지만 다들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었다”며 “명동 같은 번화가에서는 양복에 넥타이를 하고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김 화백 역시 ‘생계의 유혹’을 받기도 했다.


                        김성환 화백이 육군본부 휼병감실에 몸담을 당시 제작했던 신문 ‘웃음과 병사’. 김성환 화백 제공



“북한군이 순조롭게 남하할 때였어요. 아는 화가(그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가 불러서 충무로에 나갔는데 한 건물 안에서 많은 사람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죠. 김일성이 탱크를 타고 이승만 대통령을 쫓아다니는 것 같은 내용의 그림들이었죠. 나를 부른 화가가 ‘함께 일하자’고 했어요. 일주일에 두 번씩 나오면 쌀을 준다나? 그땐 쌀이 엄청 귀했어요. 그래도 하기 싫더라고요. 그냥 ‘안 나가겠다’고 하고 말았죠. 그리고 다시 국군이 서울에 들어온 뒤 그때 북한에 협조하던 많은 사람이 잡혀가서 고생했어요.”


서울 수복 뒤 김 화백이 국방부 정훈국에서 신문 만화와 이른바 ‘삐라’라고 불리는 전단지를 그릴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회유에 넘어가기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 좀 그린다는 사람들이 죄다 감옥에 가고 남은 사람이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국군 장병들을 위해 만들어진 신문 ‘승리’에 그림과 글을 실었다.


“처음에는 대우가 좋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원이 끊겼죠. 그래서 1953년쯤엔 육군본부 휼병감실(군인가족들에게 쌀을 주는 곳)로 옮겨가 ‘웃음과 병사’란 신문을 만드는 일을 했어요. 만화도 그리고 글도 쓰고…. 장병들의 사기를 올리는 선무활동을 했죠. 휼병감실에 있을 때 육군6사단 7연대에서 종군 활동도 했어요. 최전방 참호 속에서 자고, 그림도 그렸죠.”


그는 이 시기에 미군 기관지 성조지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김 화백은 중공군의 공세 당시 유엔군사령부의 요청으로 북한군과 중공군용 투항 권고 삐라를 각각 그렸다. 전황이 북쪽에 유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생한 그림 덕분인지 이 삐라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고 한다. 이런 그의 활약이 성조지 1면에 대서특필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김 화백은 정전협정 당시도 기억했다. 하지만 “뭐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종을 ‘땅’ 치고 협정이 성립된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한 뒤 “대부분 그냥 그렇구나 하는 반응이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사진들, 만세를 부르거나 국군이 줄지어 입성하는 모습 등은 사실 현실성이 떨어진다”며 “다만 국군 장병들이 그나마 질서가 잡혀있었던 것 같다”고 기억했다.


혼돈 속 서울, 그리고 참혹한 전장을 누비며 그는 많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김 화백은 특히 ‘이름 없는 용사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전장에서 초상화를 많이 그렸는데 10대들이 많아요. 대부분 겁이 없었죠. 젊은 사람들이 많이 희생한 것이죠. 전쟁은 항상 그래요. 그 사람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죠. 그 사람들 덕분에 이렇게 사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김 화백은 말끝을 흐렸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시신이 산산조각 나 널브러져 있어도 아무도 수습할 수 없었던 참혹한 전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도 끝나지 않은 전쟁 속에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있는 장병들에게 “자부심을 가지라!”고 당부했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전시예요. 전시에는 장병 여러분 같은 젊은 친구들이 참 중요해요. 여러분이 있음으로써 후방에서 국민들이 무사히 지낸다는 의식을 절대 잊으면 안 됩니다.”


 

잊혀질 뻔한 기억, 잊지 말아야 할 아픔, 담아내다

‘종군화가’  김성환  3년간 기록 ‘조선전쟁 스케치’ 화보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빼앗긴 서울은 혼돈 그 자체였다. 포화로 가득한 현장에서 ‘피란’ 대신 ‘기록’을 선택한 젊은 만화가 김성환 화백은 9·28 서울 수복까지 90여 일을 다락방에 숨어 지내며 빼앗긴 서울의 참상을 그려냈다. 이후 국방부 정훈국을 거쳐 육군본부 휼병감실에서 종군 활동을 했던 김 화백은 총탄이 빗발치는 현장에서 우리 군의 모습을 직접 확인, 기록했다.쿠사노네 출판회가 김 화백으로부터 제공 받아 2007년 발간한 ‘조선전쟁 스케치’에는 ‘종군화가 김성환’의 생생한 그림과 기록이 담겨 있다. 이제 몇 권 남아 있지 않다는 ‘조선전쟁 스케치’를 선뜻 대여해 준 김 화백은 “전쟁을 잊어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국방일보는 정전협정 63주년을 맞아 김 화백이 기록한 전쟁화의 일부를 공개한다.



육군 소속으로 종군 활동을 하며 전장을 그린 김 화백은 시간이 날 때마다 장병들의 초상을 그리곤 했다. 

이 그림은 안기호 일병의 모습. 김 화백은 “전쟁터에서 만난 병사들 대부분은 어린 친구들이었다”고 기억했다. 




1950년 9월 29일, 전날 서울을 되찾은 국군이 을지로 2가 앞에서 시가전 끝에 사로잡은 북한군 포로들을 이송하고 있다. 

흰 옷을 입고 있는 포로들 가운데 맨 뒤에서 걷고 있는 이는 다리에 총상을 입어 바지가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함락시킨 북한군이 전차를 몰고 돈암동 대로를 지나가고 있다. 

왼쪽 하단 밀짚모자를 쓴 김 화백의 머리 위로 북한 인공기가 휘날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김 화백은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서울의 일상을 덤덤히 그려냈다. 

1950년 9월 15일 독립문 일대를 찾은 김 화백(그림 오른쪽 돌벽에 기대 앉아 있는 밀짚모자를 쓴 남자)은 

주변을 스케치하던 중 완장을 찬 남자(그림 오른쪽 부분)에게 발각돼 징집당할 뻔했지만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1951년 10월 29일 우리 군 견인포가 북한군 진지를 향해 포격하는 모습. 김 화백은 전쟁터 곳곳을 돌며 현장을 기록했다. 



맹수열 기자 < guns13@dema.mil.kr > 

사진 < 조용학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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