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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체계/항공무기

무기의 일생 <15>해군의 두번째 자체 제작 항공기, 서해호

1951년 11월22일 해취호의 추락 이후 53년 휴전 성립 때까지 해군의 항공기 제작 시도는 일시적으로 중지됐다. 하지만 조경연 대위를 비롯한 항공반 요원들은 해군의 자체적인 항공기 제작 열망을 결코 포기하기 않았다.
휴전 직후 조대위는 새로운 수상 비행정 제작을 위한 일련의 계획을 담은 보고서를 해군총참모장(현재의 참모총장)에게 제출, 승인과 함께 예산 지원을 받았다. 해군의 두 번째 자체 항공기 제작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53년 9월15일 진해 해군 공창의 창장은 조대위를 항공기 제작에 관한 책임자로 임명했다. 조대위는 10월20일 2호기 제작을 위해 항공반을 재조직하고 경험 많은 기술 문관 23명을 모집했다. 그들은 70평 가량의 창고를 개조, 임시 항공기 제작 공장으로 정하고 작업에 착수했다.
조대위는 54년 1월 공군에서 복무하던 그의 친구 배덕찬 중령으로부터 180마력짜리 L-5 경비행기 엔진을 무상으로 획득했다. 또 해군 병기감 박병태 대령이 지원해 준 재원으로 항공기의 동체 부분을 이루는 재료와 계기 등을 일본에서 구입해 왔다. 준비를 완료한 그는 항공반 요원들과 함께 항공기 구성품들을 제작·조립했다.
조립 작업은 새로 합류한 정학윤(鄭鶴允)이라는 훌륭한 기술 문관의 활약으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는 광복 전 일본 항공기술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항공기 동체 구조와 날개의 각도 등에 관해 전문적인 조언을 많이 해 주었다. 그렇게 하여 항공기 골격을 비롯한 날개·동체·조종 계통·엔진 장착부 등 대부분의 중요 부분이 항공대 요원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단발 수상 정찰기가 완성됐다.
이 항공기의 첫 시험 비행은 54년 5월3일 진해만에서 정학윤 문관이 실시했다. 시험 비행차 수상을 활주하면서 여러 차례 이륙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조사 결과 항공기의 부양 장치 부분과 무게 중심(center of gravity)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항공반 요원들은 항공기를 다시 양륙, 문제가 있는 부분을 수리하고 무게 중심을 재조정했다. 그 결과 5월 말에 실시한 두 번째 시험 비행에서는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항공기는 이후 계속된 두 차례의 시험 비행을 거친 후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항공기 명명식은 54년 6월14일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 해군총참모장 박옥규 제독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항무과 부두에서 열렸다. 본래 이 항공기의 이름은 해군 장병들에게 명칭을 공모한 결과 ‘충해호’(忠海號)로 내정돼 있었지만 한문에 능한 이대통령이 충해호 대신 직접 ‘서해호’(誓海號·SX-1)라는 이름을 붙였다.
‘서해’는 이대통령이 이순신 장군이 읊었다는 한시 중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誓海漁龍動, 盟山草木知)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 이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연안 수역 보호를 위해 해안에서 일정 거리에 평화선을 설정, 그 구역 내에서 일본 어선의 조업을 금지하고 있었다. 서해호는 함대에 예속돼 일본 어선의 평화선 침범을 감시하는 역할을 주로 수행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서해호의 수상 착륙 장치인 알루미늄 부주(浮舟·float)와 본체를 연결하는 부위에 부식 현상이 심하게 발생했다.
당시에는 부식을 방지하는 특수 페인트와 코팅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수상기였던 서해호의 기체 수명이 단축된 것이다. 결국 해군은 이듬해 5월 서해호의 운항을 중지하고 기체도 해체했다.
해취호와 마찬가지로 서해호도 개발 후 대량 양산된 항공기는 아니다. 하지만 50년대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독자적인 무기 체계 개발을 위해 노력을 기울인 건군 초창기 국군의 노력을 잘 보여 주는 눈물겨운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