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의 일생 <14>해취호

해군 최초의 항공기

 

 

 

육군·공군과 달리 해군의 항공사(史)는 외국에서 도입한 항공기가 아닌 비행이 불가능한 미군 항공기를 해군이 자체적으로 개조·운용한 것으로 시작된다.
동아일보는 이 사실을 1951년 8월23일자 사회면에서 ‘해군 기술 장교의 창안으로 육상 비행기를 수상 비행기로 개조하는 데 성공하여 과거 18일 진해 공작부 해상에서 시험 비행에 개가를 올리었다’는 내용의 기사로 말해 주고 있다.
주인공은 해군의 조경연(1918~1991) 예비역 중령과 그가 제작한 해취호(海鷲號·바다독수리).
해군특별교육대 9차로 입대, 임관한 조경연 중위는 일찍이 10대·20대 나이에 항공기를 개발하겠다는 열정을 보여 그의 고향에서는 ‘비행기 만든 사람’으로 불렸다. 비록 이륙 실패로 귀결됐으나 그는 나무를 깎아 만든 동체에 오토바이 엔진과 직접 만든 부품을 부착한 목재 모형 비행기를 제작, 멍석을 깐 논바닥 활주로를 달린 것이다.
조중위는 압록강함(PF-62) 전기사관으로 임무를 수행하던 51년 1월 목포항에 잠시 계류하면서 미 공군 소속으로 불시착한 채 방치되다 폭파 해체를 눈앞에 두고 있던 AT - 6기 한 대를 발견한다. 그는 개조하면 해군의 수상 정찰기로 쓸모가 있겠다는 생각에 함장 박옥규 중령에게 이 항공기를 인수하고 싶다고 보고했다.
함장은 조중위의 뜻을 받아들여 이를 해군본부에 보고하고 해군은 이 문제를 두고 미 군정 당국과 교섭을 벌인 끝에 ‘한국 해군에서 교육 자료용 항공기로 사용한다’는 조건 하에 인도받았다.
항공기가 진해로 이송되면서 역시 해군 공창(工廠)으로 전속된 조중위는 공창장의 도움을 받아 각 작업장에서 일제 때 진해 항공창에서 근무했던 기술 문관 14명을 선발, 1951년 4월1일 항공반을 조직하고 항공기 수리·개조에 들어갔다. 마침내 넉 달 반이 지난 8월15일 항공반은 수상 착륙 장치인 알루미늄 부주(浮舟·float)를 장착한 새로운 모습의 항공기를 선보였다.
조중위는 시험 비행할 조종사가 없어 고민에 빠지기도 했으나 당시 진해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던 미 공군 18전폭기 대대의 듀피 대위가 자진해 시험에 나서 성공을 거뒀다. 듀피 대위는 “성능이 훌륭한 편”이라고 평가했다.
해군은 이에 10일 뒤인 25일 진해 통제부 항무과 부두에서 명명식을 갖고 이 항공기를 ‘해취호’로 이름 지었다. 이로써 해취호는 한국 함대에 예속된 최초이자 유일한 항공기가 됐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개발 항공기라기보다 최초의 독자적인 개조 항공기로서 자리하게 됐다.
해취호 완성과 더불어 해군은 공군에 파견돼 있던 조용익 소령과 박기수 대위를 해군으로 복귀시켰다. 일제 시대 때 조종사·정비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이들은 듀피 대위로부터 비공식적으로 비행 교육을 받고 해취호의 조종을 맡았다.
해취호는 해군의 사기를 드높이며 함대의 해상 경비 작전 지원, 업무 연락, 인원 수송 등의 임무를 수행해 나갔으나 취역 만 3개월도 안돼 비극적인 삶을 마감하고 만다.
1951년 11월22일 해취호는 진해∼포항 간 해상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진해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항 인근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일몰이 지난 데다 비구름이 몰려와 시정이 극도로 좋지 않았다. 착수(着水)할 지점인 해군사관학교 앞바다로 내려오던 해취호는 갑자기 급상승하더니 다음 순간 배면으로 해상에 추락하고 말았다.
이 사고로 조종사 박대위와 정비 장교 조소령이 순직했다. 또 추락 사고 여파는 함대 항공대는 물론 해군 전체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조대위를 비롯한 해군 항공반이 다시 항공기를 제작하기까지에는 3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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