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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이후 北 도발사례

육·해·공 안 가리고 43만여 건 도발 뒤 화해 ‘화전 양면’ 반복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이후 남북관계는 북한의 도발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2012년 국방백서에 따르면 무려 43만여 건에 이른다. 도발은 하늘과 육지, 바다, 심지어 해외까지 가리지 않는다. 북한은 도발 뒤 화해라는 화전 양면전술을 변함없이 구사해 왔다.

 1960년대에는 주로 무장공비를 침투시키며 우리 안보를 위협했다. 1968년 1월 21일에는 김신조 등 북한군 124부대 공비 31명이 청와대까지 위협하는 이른바 ‘1·21 사태’를 일으켰다. 1970년대에는 땅굴 도발이 이어졌다. 1974년 경기도 연천의 제1땅굴을 시작으로 1975년 철원의 제2땅굴, 1978년 파주의 제3땅굴이 연이어 발각됐다. 1990년에는 양구에서 제4땅굴이 발견됐다. 1976년에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도끼만행 사건’을 자행해 세계를 경악시켰다. 1983년에는 버마(現 미얀마)의 수도 랑군(現 양곤)에서 우리 대통령을 목표로 폭탄테러를 자행하는 만행을 저질러 우리 측 인사 수십 명이 희생당했다. ‘서울 올림픽’을 1년 앞둔 1987년에는 인도양 상공에서 대한항공기를 폭파시켜 115명의 무고한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1992년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일방적으로 탈퇴해 한반도가 전쟁 발발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하지만 북은 핵을 포기하지 않고 현재까지 위협수단으로 활용해 전 세계의 비난을 받고 있다. 1996년에는 잠수함으로 침투하던 무장공비들이 강릉에서 발견돼 우리 군과 경찰, 예비군이 49일간의 소탕작전 끝에 무장간첩 1명을 생포하고 13명을 사살했다. 근래에도 도발 야욕은 끊이지 않아 1999년과 2002년 두 번에 걸친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의 도발로 1·2차 연평해전을 초래했다. 2010년에는 천안함을 공격하고 연평도를 포격해 우리 군 장병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北 대화 제의 후 잠수함 전력 70% 출격

전방 포병전력 2배 증강 전형적 화전양면전술

 

북한군이 남북 간의 대화를 제의한 21일 이후 전선지역 포병전력을 2배로 늘리고, 잠수함·잠수정의 활동도 평시 대비 10배가량 확대하는 등 전형적인 화전양면전술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군의 한 관계자는 23일 “명령만 내리면 바로 사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진지에 배치된 북한군 포병 전력이 2배 증강됐다”고 말한 뒤 “북한군 잠수함의 기지 이탈도 평시의 10배 수준”이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또 “기지를 떠난 잠수함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므로 한미동맹이 연합전력으로 최대한 대응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잠수함과 잠수정의 경우 북한이 보유한 전체 전력 70여 척의 70%가 기지에서 출격해 우리 군이 구축함과 P-3C 대잠초계기 등 탐지전력을 증강, 추적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군 관련 전문가는 북한의 이러한 이중적 행태에 대해 “고위급 당국자 접촉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기 위한 전략적 행위임과 동시에 협상 결렬 시 추가 도발을 위한 사전 포석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