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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체계/육상무기

무기의 일생 <5> 정찰용 장비에 37㎜ 기관포 탑재 M8 장갑차

무기의 일생 <5> 정찰용 장비에 37㎜ 기관포 탑재 M8 장갑차

 

6·25전쟁 발발 당시 우리 군에 전차는 없었지만 장갑차마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48년 12월10일 창설된 육군 독립기갑연대 장갑대대가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27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42년 5월 개발된 M8 장갑차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서 정찰용으로 운용된 장비로 포탑에 37mm 기관포를 탑재한 것이 특징이다.

 

 


건군 초기 육군이 별다른 중장비를 보유하지 못했던 만큼 위풍당당한 모양새를 갖춘 M8 장갑차는

항상 화제와 주목의 대상이었다. 정부 수립 1주년을 기념,

49년 8월15일 열린 국군 시가행진에서도 시민들로부터 가장 큰 박수를 받은 장비가 M8 장갑차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수시로 경무대나 행사장에 출동하기까지 했다.

6·25전쟁 발발 이후 기갑연대의 M8 장갑차들은 집중 운용되지 않고 분할, 각 사단에 배속 운용됐다.

 
육군 기갑연대 정보과 계원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안용현(安龍鉉·갑종50기·76)예비역 중령은

“화력 지원보다 정찰과 통신 지원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M8 장갑차를 분할 운용한 것”이라며

“M8 장갑차에 장착된 SCR-506 무전기는 장거리 통신에 적합했다”고 설명했다.


SCR-506 무전기는 통신 가능 거리가 최대 100마일에 달했다.

안씨는 “강원도 강릉의 M8 장갑차에서 송신한 육성이 서울 남산의 기갑연대 통신소에서

똑똑히 들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각 사단 자체 통신 장비도 변변찮던 시절이라

M8 장갑차의 SCR-506 무전기가 각 부대와 육본 사이의 통신 연락에 큰 기여를 했다.

불행하게도 전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M8 장갑차도 느긋하게 정찰과 통신용으로만 운용될 수는 없었다.

 
50년 6월 말 육군 7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출동한 M8 장갑차들은 ‘T-34 전차를 막으라’는 지시를 받고

경기도 의정부 축석령에 투입되기도 했다.

사실 M8 장갑차는 말 그대로 장갑차여서 장갑이 얇고 주포의 화력이 약한 탓에

전차를 상대하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었다.

안씨는 “당시 M8 장갑차의 37mm 주포로 철갑탄을 아무리 쏘아대도

T-34 전차의 장갑에 맞아 퉁겨 버렸다”고 증언했다.


M8 장갑차가 전투에서 무용지물만은 아니었다. 전차를 상대하기는 힘들었지만

탑재한 37mm 기관포는 보병 지원용으로 강력한 화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국군이 50년 7월 초 경기도 김포와 영등포 일대에서 북한군 6사단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칠 때 M8 장갑차는 큰 활약을 했다.


50년 7월8일 충북 진천지구 전투에서는 수도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M8 장갑차가 출동했다.

수도사단장 김석원 장군도 M8 장갑차로 북한의 T-34 전차를 상대하기를 원했다.

김장군도 장갑차로는 T-34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려는

고육지책으로 M8 장갑차를 선두에 세운 것이다.

김장군의 의도는 성공해서 아군 보병들이 M8 장갑차를 전차로 착각,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진천전투에 참전했던 장갑중대 중대장 고(故) 박용실(朴容實)중위는

“코끼리를 향해 달려드는 쥐의 심정으로 M8 장갑차를 몰고 돌격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M8 장갑차의 37mm 주포로 T-34 전차의 캐터필러를 명중시켜

기동 불능 상태에 빠뜨리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개전 초 전차 한 대 없는 상황에서 성능 이상의 대활약을 펼친 M8 장갑차는

여러 전투에서 차례로 파괴, 50년 말께 거의 전량 소모돼 버렸다.

안씨는 “50년 11월 청진전투 무렵까지도 M8 장갑차가 남아 있었으나

50년 12월 흥남에서 기갑연대가 철수할 무렵에는 운용 가능한 M8 장갑차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아쉽게도 현재 국내의 각 부대나 전쟁 관련 기념관에는 단 한 대의 M8 장갑차도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