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최대의 작전-그 숨겨진 이야기

 

우리에게 66일 현충일은 호국영령들의 정신을 되새기는 날이다. 공교롭게도 66일은 2차 대전 당시 연합국에게도 매우 특별한 기념일이다. 바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일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지상 최대의 작전이라고 일컬어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나치독일의 숨통을 한 번에 끊기 위한 연합군 최대의 작전이었으며, 지금도 2차 세계대전의 가장 결정적인 작전으로 간주되어진다. 그런데 이 대규모 작전의 이면에는 우리고 모르고 있었던 몇 가지 일들이 숨어있다. 그 숨겨진 이야기들을 오늘 독자여러분들께 해볼까 한다.

 

 ▣ 포티튜드 작전-최고의 기만술

1944년이 되자 독일은 조만간 연합군이 프랑스 해안으로 기습 상륙작전을 할 것이라고 예측했으며, 실제로 미국은 1944년 초가 되자 독일 U보트의 방해를 뚫고 대규모 병력을 영국으로 보냈다. 상륙작전이 기정사실화 되는 상황에서 문제는 상륙의 시기와 지점이 되었다. 영국 내 독일 스파이들은 이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는데, LSC라는 영국 첩보부는 대규모 기만작전을 통해 이들 스파이를 역이용하기로 했다. LSC는 먼저 가상의 대규모 부대를 서류상으로 만들었다. 이와 함께 약 25만의 스키바인딩을 육군사령부에 신청했다. 첩보를 입수한 독일군 사령부는 생각한다. “25만의 스키바인딩? 그렇다면 연합군은 노르웨이에 견제 상륙을 한다!” 곧 노르웨이 방면에 있던 모든 독일군 부대에 비상이 걸렸고, 이 부대들은 상륙작전 당일까지도 노르웨이에 묶여있었다. 또한 당시 독일군은 연합군 상륙후보지로 노르망디파 드 깔레두 곳을 예상하고 있었다. 노르망디는 대규모 상륙부대가 상륙하기 좋은 장소였고, 파 드 깔레는 영국해협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가까운 지점이었다. LSC는 서류상의 가짜부대를 역시 서류상으로 깔레에 가장 가까운 항구로 이동시켰고, 이곳에 속이 텅 빈 가짜 보급품상자를 대량으로 전개하여 독일 첩보원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게 만든다.

 

연합군의 상륙작전은 7월경 파 드 깔레를 목표로 실시될 것이 확실함

 

이 기만작전으로 말미암아 연합군은 독일군에 대하여 시기와 방향상의 기습을 가하게 되었고, 노르망디상륙작전 성공의 첫 번째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영국에 도착한 미군의 P-51 전투기 몸체의 대군. 많은 양을 수송하기위해 분해된 상태에서 도착한 이 전투기들은 곧 조립되어져 독일군에게 불벼락을 쏟아냈다. 이렇듯 영국 곳곳이 마치 미군의 화물 집하장 같았다. 그리고 그 중에는 적을 기만하기위한 가짜 화물도 섞여있었다.

 

  ▣ 보급의 전쟁-작전성공의 숨은 공로자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진정한 영웅은 보급 장교들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딱히 선례로 삼을 작전도 없었으며, 상륙군과 해군, 그리고 육군 항공대까지 3군이 총 동원된 그야말로 지상 최대의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D-DAY 당일까지 연합군은 15만의 병력과 8천대의 차량을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시킬 계획이었다. 해군은 2,000척의 함선을 동원했고, 각 함선마다 병사 명단이나 장비 리스트 등 적재계획을 세워야 했다. 또한 각 함선이 얼마나, 어떻게, 무슨 화물을 실어 어디로 보낼지를 정확하게 지정해 운용해야 했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이 모든 계산은 당연히 정교한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미군은 예전부터 수학자들-특히 MIT출신-을 애용했는데, 이러한 복잡한 계산뿐만 아니라 암호해독과 제작에도 이들 수학자들의 활약이 컸다.

 

 

D-DAY를 위해 정박중인 연합군의 각종 함선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이다. 이들의 운용계획을 수작업으로 계산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상륙주정은 총 4,000척이 투입되었는데, 마치 공장의 컨베이어 시스템처럼 공격군 56,000명의 병력을 해안과 모함 사이로 왕복 수송했다. 아울러 병사 1인당 보급품의 양도 어마어마했다. 소총수를 기준으로 최전방의 병사는 1인당 하루 96발의 탄약, 3kg의 식량, 10리터의 물이 필요했다. 2주마다 군복 및 장비가 교체되었는데, 이를 한 달 기준으로 보면 1인당 거의 1톤의 보급품이 필요했다. 또 보병소대 하나가 한걸음 전진하기 위해 의무병, 취사병, 행정병 등 평균 18명의 지원인력이 필요했다. 종합적으로 미군은 상륙작전을 위해 약 1,800만 톤의 물자를 영국으로 수송했다. 일단 상륙에 성공하자 연합군은 이 1,800만 톤의 물자를 프랑스로 수송해야 했는데, 당시 대부분의 항구는 독일군 수중에 있었다. 여기서 가장 미국다운 해결책이 나온다. 바로 노르망디 앞바다에 항구를 만드는 계획이다. 6,000톤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콘크리트블록들이 만들어졌고, 이 블록들을 노르망디 해안까지 끌고 와 그대로 방파제를 만들었으며, 그 방파제 안쪽에 조립식 부두를 만들어버렸다. 이 임시부두는 배 75척이 정박 가능했고, 1분당 보급트럭 한 대가 출고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이 임시항구의 잔해들은 아직도 노르망디 해안에서 쉽게 볼 수 있다.

 

 D-DAY 당시 상륙주정의 모습. 마치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같은 모습이다.

 

여전히 노르망디 해변에 있는 당시의 부두 구조물. 이제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음과 동시에 프랑스 환경당국의 골칫거리가 되어있다.

 

 

 

  지옥의 오마하-왜 피해가 컸나?

 

1944년이 되자 독일은 조만간 연합군이 프랑스 해안으로 기습 상륙작전을 할 것이라고 예측했으며, 실제로 미국은 1944년 초가 되자 독일 U보트의 방해를 뚫고 대규모 병력을 영국으로 보냈다. 상륙작전이 기정사실화 되자 독일도 이른바 대서양 방벽이라는 것을 건설하여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했다. 4,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대서양 방벽의 책임자는 과거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롬멜 원수였다. 롬멜은 방어선이 너무 길면 보급도 제한되고 방어선 또한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어느 지점에 방어력을 집중해야 하는지 선택을 해야만 했다. 롬멜은 해안을 따라 약 12Km 마다 150mm 중포를 설치했고, 그 사이사이에 88mm 대전차포를 대각선으로 배치시켜 해안을 향해 십자포화를 퍼부을 수 있도록 했다. 이 포진지들의 긴 띠를 독일군은 진주목걸이라 불렀다. 더군다나 이 진지들은 강화된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져 매우 강력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철근콘크리트는 흔한 공법이 아니었으나, 롬멜은 탱크제작에 쓰려던 120만 톤의 강철을 전용해 벙커를 제작했다. 궁극적으로 롬멜은 연합군의 상륙 순간이 공격의 최적타이밍이라고 생각해 상륙 해안에 여러 가지 장애물을 설치했다. 장대 끝에 지뢰를 설치해 만조 때 살짝 잠기도록 한 부비트랩은 노르망디해안 전반에 걸쳐 34,827개가 있었으며, 그 외 장애물도 1만개가 넘었다. 정찰기를 통해 장애물들을 확인한 연합군은 이를 악마의 정원이라고 불렀고, 어쩔 수 없이 만조가 아닌 간조 때 상륙작전을 실시했다. 결국 이 결정은 연합군에게 크나큰 피해를 강요하고 만다

 

 

악마의 정원을 둘러보고 있는 독일의 롬멜 원수. 정작 D-DAY 당일 그는 아내의 생일을 맞아 베를린을 방문하고 있었다.

 

한편 연합군은 노르망디 해안 5곳에서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서쪽의 유타와 오마하는 미군이, 동쪽의 골드와 소드해안은 영국군이, 그리고 역시 동쪽의 주노 해안은 캐나다군이 상륙을 했다. 연합군은 보병의 상륙과 함께 전차도 상륙시켰는데, 당시에는 전차를 상륙시킬 주정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전차 자체에 부항스크린을 설치해 자력으로 파도를 해치고 상륙할 수 있는 D.D. 셔먼을 제작했다.

상륙이 시작되자 유타해안의 미군은 운이 좋게도 경미한 피해를 입고 해안을 장악할 수 있었다. 동쪽해안의 영국군과 캐나다군은 미군과는 달리 만조시간을 맞춰 상륙했다. 이들은 악마의 정원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최대한 해안에 접근해 상륙을 시도했기 때문에 꽤 많은 D.D. 전차가 상륙에 성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해안을 점령할 수 있었다.

문제는 오마하 해변이었다. 먼저 공중폭격이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이날따라 낮게 깔린 구름 때문에 오폭을 두려워한 폭격기들은 폭격지점 후방의 공터에 폭격을 하고 말았다. 1,745발의 폭탄이 투하되었으나 단 한명의 독일군 사상자도 나오지 않았다. 군함에서 발사된 로켓탄들도 대부분 바다에 빠졌고, 함포사격을 하려면 만조 때 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미군의 상륙을 총 지휘했던 브래들리 장군은 악마의 정원을 피하기 위해 예정대로 간조 때 상륙부대를 출발시켰다. 이 과정에서 D.D. 전차들은 거친 파도를 이겨내지 못 하고 대부분 가라앉고 말았다 

 

 

D-DAY 당시 연합군의 상륙위치. 노르망디는 항구가 없는 대신 해변이 비교적 넓어 상륙하기는 용이한 곳이었다.

 

D-DAY를 위해 개발된 D.D. 전차. 부항스크린이 내려진 상태이다. 많은 전차가 바다에 가라앉았지만, 상륙에 성공한 전차들은 작전 수행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결국 상륙부대원들은 상륙주정에서 내린 순간부터 약 270m의 해변을 무방비상태로 가로질러야했다. 당시 미군은 오마하해변을 방비하는 부대가 전투력이 약하고 외국인으로 구성된 2선급 부대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D-DAY 일주일 전, 러시아전선에서 막 돌아온 정예의 독일 제 352 보병사단이 이 지역에 배치되었다. 상륙주정의 램프가 열리는 순간 지옥이 펼쳐졌다. 당시 놀랍게도 오마하에서 불을 뿜은 보병화기는 단 120정 뿐 이었다. 하지만 그 중 4정이 문제였다. 바로 히틀러의 전기톱’ MG-42였다. 1분당 1,500발의 총탄을 발사할 수 있었던 MG-42는 연합군에게 죽음의 비를 뿌려댔다. 35kg의 장비를 짊어진 연합군 병사들은 굼뜨기 짝이 없었고, 곧 독일군 기관총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중대 하나가 전멸하는데 10분도 채 되지 않았으며, 총탄을 피해 상륙주정에서 물속으로 뛰어내린 병사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무거운 군장으로 익사했다. 독일군의 기관총은 미군 병사들을 한 지점에 몰아넣었고, 바로 이곳에 박격포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사실 오마하해변이 미군에 점령된 이유는 미군의 끊임없는 물량공세에 2시간 만에 독일군의 탄약이 바닥났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오마하에서의 미군 전략은 적의 방어망에 충분한 병력을 투입한다는 것 이었다. 적이 아군을 충분히 죽이지 못한다면 나머지 살아남은 병력이 적을 제압한다는 가혹한 방법이었다. 흔히 노르망디상륙작전을 지상 최대의 작전으로 칭하지만,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오마하에서의 미군전략이 잔인하고 치졸한 방법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에 반해 악마의 정원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만조를 이용해 병사들을 상륙시킨 영국군과 캐나다군의 전략은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되었다. D-DAY 당일 전사한 연합군의 숫자는 4,413명이었고 이 중 미군 전사자 숫자는 2,499명이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오마하에서 단 4정의 MG-42에 의해 전사했다.

 

상륙작전 이후의 오마하 해변. 여전히 수습되지 못 한 미군병사의 사체가 있다. 이러한 상륙작전의 경험 덕분에 램프가 뒤에서 열리는 상륙돌격장갑차량이 개발되었다. 

 

 


Posted by 어울림 국방홍보원 트랙백 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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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마리 밀덕 2016.04.29 17: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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