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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이세환 기자의 밀친] 전쟁사 시리즈 1탄 - 탄넨베르그 전투⑤

 

탄넨베르그 전투의 교훈

 

 독일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탄넨베르그 전투의 교훈을 다각도로 살펴보자. 먼저 독일을 동·서 양쪽에서 압박하는 연합군의 전략은 훌륭한 것이었다. 실제로 독일은 지정학적 위치가 매우 불리했기 때문에 슐리펜전술 같은, 창의적 이라기보다는 도박에 가까운 전략을 수립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러시아군의 상태였다. 현재의 기준으로도 대도시 인구에 맞먹는 30만의 병력을 병참지원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물며 당시 유럽에서 가장 뒤떨어진 수준의 군대를 유지했던 러시아군이 이를 원활히 수행한다는 것은 꿈에 불과했다. 러시아군은 필요한 각종 보급이나 운송수단 등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격을 시작했고, 그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더군다나 러시아군은 진격의 과정에서 정찰을 등한시 해 적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 했고, 암호조작능력을 가진 훈련된 인원이 전무하다시피한 관계로 모든 무선통신을 암호가 아닌 평문으로 전송해 자신들의 상황을 적에게 낱낱이 보고하는 매우 초보적인 보안상의 과오를 저질렀다.

 

 

반면 독일군은 비록 병력에 있어서는 러시아군에 열세였으나, 힌덴부르크나 루덴도르프, 그리고 호프만 같은 비범한 지휘관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독일군은 인적구성 및 훈련과 장비면에서는 러시아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탄넨베르그 전투는 병력의 질, 보급지원체계, 통신보안, 그리고 우수한 지휘관의 능력이 양적으로 우세한 적을 충분히 격파할 수 있다는 좋은 예이다.

 

나비효과

 

하지만 탄넨베르그 전투는 독일군에게 잠시 동안의 영광을 안겨주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독일군의 궁극적인 전략을 송두리째 뒤엎어버리고 말았다. 앞서 언급 한 바 있듯이 당시 몰트케를 비롯한 독일의 융커(전통적인 군벌 귀족) 출신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동프로이센 지방에 대한 러시아군의 침입에 지나칠 정도로 과민반응을 보였다. 급기야 서부전선에서 2개 군단을 차출해 동부전선으로 보냈고, 이로 인해 결정적 순간에 독일군은 프랑스와 영국군을 밀어붙일 수 없었다. 만약 이 2개 군단이 공세에 참여했더라면 파리는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서부전선에서 차출 한 2개 군단은 탄넨베르그 전투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은 반면, 프랑스와 영국군은 이틈에 반격을 준비해 96일부터 공세를 시작한다. 급기야 99일 독일 제1군과 제2군 사이에 사이가 벌어지며 포위 될 위기해 처해지자 몰트케는 후퇴를 명령했고, 이 때부터 지옥의 참호전이 펼쳐지며 인류 최악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더군다나 파리 점령의 기회를 놓친 독일은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다.

 

 

엉뚱한 나비효과

 

그런데 탄넨베르그 전투의 교훈을 전혀 엉뚱하게 받아들이는 군대가 있었다. 바로 일본군이다. 일본군은 이 전투를 분석하며 보급과 보안의 중요성, 그리고 우수한 지휘관의 필요성 등 건전한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양적인 열세를 포위 섬멸을 통한 단기 결전으로 해소할 수 있음과 동시에 '정신적 우세로 물질적 위력을 능가'할 수 있다는 엉뚱한 결론을 도출했다. 이로 인해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단기 결전에 대한 집착, 보급에 대한 무관심, 정신력에 대한 광신 등 현대전에 적합하지 않은 요소들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반자이 돌격에서 카미카제까지 전 병과를 막론하고 전술이나 전략적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전법을 구사해 스스로의 전력을 급속히 갉아먹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일단 현대전의 요소가 군수보급의 물량과 화력, 과학 기술에 달려 있다는 것 자체는 인식하고 있었지만, 일본이란 국가 자체는 이를 감당할 만한 역량이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