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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1주년] 감춰진 역사, 은폐된 진실 - 징용 조선인에겐 지옥섬…일본인에겐 꿈의 섬이었다

감춰진 역사, 은폐된 진실 - 징용 조선인에겐 지옥섬…일본인에겐 꿈의 섬이었다

르포- 군함도·미쓰비시 중공업 조선소


日 세계문화유산 등재 1년 지났지만…

강제징용 설명 없고 조선인 시설은 출입금지

“가족적인 탄광 공동체” 홍보뿐… 관광지로 전락

전쟁국가 노리는 아베 정부·전범기업 미쓰비시

어두운 역사 외면…반성 없이 과거 영광만 꿈꿔

 

군함도 위로 솟아있는 콘크리트 폐허. 1974년, 미쓰비시가 운영하던 하시마 탄광이 폐쇄된 이후 오랜 기간 무인도로 방치돼 건물의 원래 형태를 알아보기조차 어렵다. 사진=양동욱 기자

 

대한민국의 광복절 8월 15일은 일본의 ‘종전기념일’이다. 미국의 원폭 투하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일본, 다시는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 지 무려 71년이 흘렀다. 그러나 한·일 과거사 문제는 여전히 마구 엉킨 실타래와 같다. 최근 일본 방위성은 2016년 방위백서에 독도를 자국의 고유 영토로 표기했다. 조선인 강제 징용 역사를 감추고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하시마(端島·일명 군함도)는 또 다른 갈등의 표상(表象)이다. 역사 왜곡은 한·일 관계 진전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국방일보는 광복 71주년을 맞아 세계문화유산 등재 1년을 맞은 군함도와 71년 전 원폭이 투하됐던 일본 규슈(九州) 나가사키(長崎)현 일대를 현지 취재, 한·일 역사 갈등의 현주소와 미래를 살펴봤다.




약속은 이행될 기미가 없다


지난달 18일, 군함도 관광선을 운영하는 나가사키 항구에 도착했다. 아침 9시, 이른 시각임에도 ‘축! 군함도 세계문화유산 등재 1년’ 깃발 아래 수많은 관광객이 모여들었다. 지난해 일본은 “강제 징용 사실을 알리는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하고, 군함도 등 조선인 강제동원 시설 7개소를 포함한 23개소를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목적을 달성한 일본 정부는 태도를 바꿨다. 1년 사이 축하 깃발과 기념품 판매소, 홍보관 따위가 생겼을 뿐이다. 약속은 이행될 기미조차 없다.


항구 인근에서 야마사해운 등 4개 회사가 ‘군함도 관광선’을 운영한다. 배표는 대략 4만 원 정도로 비싼 편. 그러나 사전예약 없이는 표를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한 매표소는 열린 지 10여 분 만에 ‘완판(完販)’ 딱지가 붙었다. 표를 못 산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배표를 목에 건 200여 명의 승자(勝者)들이 ‘블랙다이아몬드 호’에 올랐다. 승객은 대부분 일본인과 중국인, 나머지는 서양인들이다. 한국인은 없었다. 배에서 만난 중년의 일본인 사토 씨는 “군함도를 보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을 데리고 멀리 고베에서 왔다. 세계문화유산을 볼 수 있다니 감격스럽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안내원이 그에게 준 군함도 홍보물 어디에도 ‘강제 징용’이란 단어는 없었다.


약 20분을 달려, 가장 군함을 닮은 모양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에서 배가 멈췄다. 관광객들은 감탄과 함께 사진을 찍기 바빴다. 섬에 근접하자 그 위로 솟아있는 음산한 콘크리트 폐허가 관광객을 맞이했다. 섬을 밟으려면 300엔짜리 ‘상륙 견학티켓’을 또 내야 한다. 불평하는 이는 없었다.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의 모습.  사진=양동욱 기자


해저 탄광에서 12시간씩 노동…감금·학대 시달려


안내원을 따라 섬을 돌아봤다. 10m 높이의 시멘트 방파제로 둘러싸인 군함도는 독도의 3분의 1 남짓한 작은 섬이다. 본래 작은 돌덩이에 불과했던 섬 주변을 인공적으로 메워 지금의 크기가 됐다. 메마른 인공섬에 남은 것은 무너진 철골 더미뿐이다.


견학 통로는 섬 남서쪽 극히 일부 지역으로 제한된다. 해저 탄광 갱도 입구, 강제징용자 숙소 등 정작 보고 싶었던 지역은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안내원이 한 건물을 가리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라고 소개하며 “목욕탕, 병원, 엘리베이터, 파친코! 최신식 시설이 하시마에 가장 먼저 들어섰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하시마 사람들은 당시 최고의 부자였고, 일본의 미래를 위해 일했기에 존경받았다”고 했다. 그가 말한 ‘사람들’은 섬의 주인이었던 미쓰비시(三菱)의 직원과 가족들이다. 까마득한 해저 탄광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린 조선인들은 ‘사람들’에 포함되지 않는 것인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미쓰비시는 1890년 하시마를 헐값에 인수, 해저탄광을 뚫어 제국주의 일본에 전쟁 동력을 제공했다. 미쓰비시의 2대 총수 이와사키 이야스케의 전기(傳記)에는 ‘하시마의 광대한 해저에 잠든 무한한 보물 창고는 미쓰비시의 손으로 열리게 됐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 보물을 캐내는 가장 힘들고 위험한 작업은 조선인 강제징용자의 몫이었다. 국무총리실 강제동원피해조사위원회는 1943~1945년 하시마에 대략 500~800명의 조선인 강제노동자가 있었다고 추정한다. 이들은 열기로 숨이 막히는 지하 700~1000m 해저 탄광에서 허리도 펴지 못한 채 매일 12시간씩 2교대로 일했다. 감금과 학대 속에 겨우 연명하다 가혹한 매질과 사고로 죽었다. 견디다 못해 탈출하려다 익사한 사람도 부지기수다. 화장(火葬) 명부를 통해 밝혀진 조선인 사망자만 120명이 넘는다. 이 섬이 감옥섬, 혹은 지옥섬으로 불린 이유다.


“이 섬은 일본의 미래였습니다! 가족적인 탄광 공동체 생활이었습니다!” 안내원이 외쳤다. 역사적 진실을 숨긴 채 관광섬으로 둔갑한 하시마, 세계문화유산이 응당 지녀야 할 ‘탁월한 보편적 가치’는 실종 상태였다.



관광객들이 군함도에 입도해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있다. 한국인 강제 징용에 대한 언급은 없다. 사진=양동욱 기자


족쇄 푼 일본 군수산업과 미쓰비시 조선소


군함도에서 돌아와 나가사키 항구에 섰다. 동쪽으로 녹색의 거대한 크레인이 보였다. 지난 1909년 만들어진 미쓰비시중공업의 ‘자이언트 캔틸레버 크레인’이다. 군함도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 크레인은 하중능력 150톤의 전동 크레인으로 준공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가동 중이다.


조사에 따르면 나가사키 조선소 일대의 강제 징용 조선인은 최소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전함을 비롯한 일본의 전쟁수행 도구를 만들다 감전사·추락사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1945년에는 일본의 전쟁거점에 끌려왔다는 이유로 ‘원폭’이라는 재앙마저 겪어야 했다. 나가사키에서 피폭으로 죽은 조선인은 최소 2만 명이다.


미쓰비시는 제국주의 일본에 각종 무기를 제공하는 군수산업으로 급팽창한 전범기업이었다. 대함거포주의(大艦巨砲主義)의 상징, 전함 무사시와 가미카제 자폭 전술로 유명한 전투기 제로센(零戰)이 미쓰비시의 대표 작품이다.


제국주의 일본의 패망과 군수재벌 해체로 잘게 쪼개졌던 미쓰비시는 단계적인 재결합을 거쳐 다시 거대 그룹으로 부활했다. 미쓰비시는 자신의 역사를 ‘미쓰비시 100년사’라고 부른다. 반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보상 요구를 거부할 때는 “태평양전쟁 시기와 지금의 미쓰비시는 별개의 기업”이라는 식으로 꼬리를 자른다. 모순적이며 편의적인 논리다.


일본은 지난 2014년 ‘무기 수출 3원칙’을 ‘방위 장비 이전 3원칙’으로 대체, 47년 만에 무기 수출의 족쇄를 스스로 풀었다. 일본 최대 방산업체 미쓰비시에게 반가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미쓰비시는 지금도 전투기·이지스함·호위함 등을 생산, 과거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군수산업을 이끌고 있다. 이날도 조선소는 무언가 거대한 것을 만드는 듯, 희뿌연 연기와 열기를 하늘로 뿜어냈다. 그것들이 나가사키 앞바다에 뿌연 먹구름처럼 드리워졌다.


관광객들이 군함도 내부시설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안내원의 설명이 끝난 지점에는 출입금지 안내판이 붙어 있다. 사진=양동욱 기자


반성 없는 미래는 과거로의 회귀


TV를 켰다. 이곳 일본에서도 북한 탄도미사일 발사가 단연 화제다. 한 일본 언론인은 “북한 미사일이 우리 바다인 일본해(동해)에 떨어졌다”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 흥분은 자국민들에게 ‘안보 불안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나가사키 거리 곳곳에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포스터에는 ‘이 길을 강하게, 앞으로’라고 적혀 있다. 그가 이끄는 자민당은 최근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했다. 그의 숙원인 일본을 ‘전쟁 가능한 나라’로 바꾸는 개헌안 발의의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군대를 가진 ‘보통국가’ 회귀에 대한 일본 국민의 의견은 갈린다. 대규모 반대 시위가 열리는 등 저항이 만만치 않은 한편, 이런 변화에 동조하는 세력도 늘어났다. 이런 갈등 속에, 일본 정부는 2016년 방위예산을 역대 최고 수준인 5조541억 엔으로 편성했다. 이는 우리의 방위예산보다 무려 41%나 많은 금액이다.


자민당의 선거 전단을 바라보던 일본 청년이 말했다. “중국·북한·주변국 모두 국방력을 강화하고 있다. (원폭 때와 같이) 일방적인 피해자가 될 수 없다. 일본도 자신을 지킬 힘을 가질 때다.” 일본 역시 한국 입장에서는 가해자라는 걸 알고 있는지 물었다. “한국인은 왜 과거에만 집착하는가? 이미 정부 간 합의는 끝났다고 알고 있다.” 청년은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지난 2001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독일 에센의 촐페어라인 탄광에는 나치 체제 하의 강제노역 관련 자료가 출입구부터 전시돼 있다. 독일 최대 철강회사인 크루프는 유대인 강제노역 피해자들에게 전후 두 차례에 걸쳐 거액을 보상했다. 과거의 영광을 꿈꾸는 일본, 같은 2차 대전 전범국인 독일이 오늘날 신뢰와 리더십을 되찾은 이유를 되짚어 볼 일이다. 


나가사키에서=  김상윤 기자 < ksy0609@dema.mil.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