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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주년 3.1절 특집] 겨레의 꽃 유관순 열사를 기리다

일제에 맞서 싸운 꽃다운 열여덟 살…지지 않는 ‘독립의 꽃’으로 남으리

 

내가 아는 유관순 열사는…


유관순 열사의 가까운 가족 중에는 현재 유 열사의 오빠 유우석 선생의 며느리 김정애(82) 여사가 생존해 있다. 본지는 김 여사와 전화 인터뷰를 통해 당시 유 열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더불어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생전 증언도 모아 봤다.

<참고자료: 유관순 열사 다큐멘터리 ‘소녀의 기도’, 유관순 열사 기념관>

“떠도는 소문과 달리 평온한 얼굴로 눈감으셨어요”-

 유 열사의 조카며느리 김정애 여사


“시어른들께서 말씀하시기를, 유관순 열사가 어렸을 때부터 상당히 의협심이 있었대요. 동생들이 싸우고 들어와서 울면 그걸 따져서 물었답니다. 그래서 동생들이 잘못했다면 ‘그것은 너희 잘못이다’라고 단호하게 얘기하고 끝을 냈다는 거예요. 보통은 자기 동생들 편을 들잖아요. 생각하는 것이 상당히 남달랐던 것 같아요. 항간의 소문에 유관순 열사 시신이 여섯 토막으로 잘렸다는 얘기가 있어 시아버님께 여쭤봤어요. 사실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이화학당에 잠시 안치됐었는데 그때 가서 직접 보니 돌아가신 모습이 너무 평화로웠대요.”

“혼자서 한글 깨치고 성서 읽던 영특한 아이”

- 친오빠인 독립운동가 유우석 선생

 

“그 시절엔 한글을 반절이라고 했지요. 아무도 관순이에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그 반절을 혼자 익혀서 성서를 읽더니 외워대지 않겠어요. 재주는 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는 것 싫어하고 고집도 셌던, 소녀다운 장난기 가득했던 친구”

- 유 열사와 함께 이화학당에 다녔던 보각 스님(속명 이정수)


“5년간 관순이와 같은 기숙사 생활을 했어요. 관순이는 지기 싫어하고 고집이 세며 때론 18살 소녀다운 장난기 있는 아이였습니다. 이화학당 기숙사는 공부 종을 친 다음 자기 전에 기도 종을 치면 방에 있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기도를 하게 돼 있어요. 그날은 관순이가 기도하는 날이었는데 기도를 끝낼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는 것을 ‘명태 이름으로 빕니다’라고 했어요. 친구들은 모두 배를 잡고 웃었고 이 소리를 듣고 사감 선생이 달려와 학생들에게 품행점수를 낙제점을 줬습니다. 알고 봤더니 관순이는 우리 집에서 보내온 명태 반찬이 하도 맛있어서 명태 생각에 그렇게 기도했다고 해 친구들이 다시 한 번 웃게 했어요.”

“땋은 머리 휘날리며온 동네를 휘젓곤 했죠”

- 천안 고향 마을에 살았던 김원숙 씨


“내가 열일곱에 5~6가구밖에 살지 않는 이 마을에 시집을 왔을 때 유관순 열사는 다섯 살쯤 됐을 겁니다. 귀밑머리, 황새머리, 조랑머리로 머리를 세 갈래로 땋고 사내처럼 동네를 휘젓고 다녔습니다.”
 

■ ‘겨레의 꽃’ 유관순 열사를 기리다 

다음 달 1일은 온 민족이 하나 되어 국내외 각지에서 독립을 위해 일제에 맞서 싸운 3·1운동이 일어난 지 97주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했던 우리 선열들의 기개와 강인한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모두의 가슴을 울린다. 일제 식민지 시절 선조들은 민족의 얼을 지켜왔고 그 가운데 영원한 열여덟 살의 소녀 유관순이 있다. 아우네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한 유 열사는 3·1절이면 늘 등장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억하며 3·1운동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보자.

 

3·1절을 앞두고 육군32사단 승리연대 천안대대 장병들이 유관순 열사 사적지 내에 세워진 ‘유관순 열사 동상’에서 유 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며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코끝에 찬바람이 닿지만 아련히 봄을 기다리게 하는 지난 24일. 3·1절을 며칠 앞두고 육군32사단 승리연대 천안대대 장병들과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에 위치한 ‘유관순 열사 사적지’를 찾았다.

유 열사의 자취와 정신을 추모하고자 마련된 이곳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유관순 동상’이었다. 맑고 강한 눈망울, 꼭 다문 입술은 어린 나이임에도 굳은 결기가 느껴졌다.

장병들이 ‘유관순 열사 기념관’에 들러 유 열사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유관순 열사 탄신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 2003년 4월 1일 개관한 ‘유관순 열사 기념관’에서는 유 열사의 탄생부터 순국까지 일대기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내부에는 열사의 사진이 담긴 수형자 기록표와 호적등본, 재판 기록문 등이 전시돼 있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에 조성된 ‘유관순 열사 기념관’ 전경.

 


대표적인 고문 도구인 벽관을 열어보던 본부중대장 이용원 중위는 “한 사람이 들어가기도 힘들 정도로 매우 비좁아 2∼3일 정도 갇혀 있으면 전신마비가 된다는 설명에 독립운동가들이 이렇게 고통받으며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희생했다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만 든다”고 말했다. 고교 동창들과 함께 이곳을 찾은 서현정(21·경기 용인시) 씨는 “교과서로만 접했던 유관순 열사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는 계기가 됐고, 사적지가 생각보다 잘돼 있어 많은 사람이 이곳을 방문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적지 중앙 계단 꼭대기에는 유 열사의 영정을 모신 추모각이 들어서 있다. 태극기를 무릎 위에 올린 유 열사의 영정이 걸려 있다. 장병들은 나라를 걱정하는 표정과 의기에 찬 모습이 뒤섞인 유 열사를 바라보며 예를 다해 묵념했다.

이국진 상병은 “그 당시 유관순 열사는 지금 저보다 어린 나이로 무섭고 두려웠을 텐데 어떻게 독립운동을 했는지 놀랍다”면서 “장병으로서 조국을 지킬 수 있게 해준 열사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또 순국자 추모각에는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순국한 47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장병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고, 군인으로서 가져야 할 국가관과 애국심을 본받았다.

사적지에서 동쪽으로 3㎞ 지점에는 열사의 생가가 있다. 유관순 열사가 태어난 곳으로, 지난 1991년 복원된 생가 안방에는 독립만세 운동을 논의하는 모습이, 건넌방에는 동료들과 태극기를 만들고 있는 유관순 열사가 모형으로 제작돼 있다. 박준열 일병은 “해마다 3·1절이 되어야만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를 떠올리는 것 같아 죄송하다. 사적지에 직접 와서 보니 더 많은 애국심이 끓어오른다”며 “유 열사의 진정한 애국애족 정신과 위국헌신의 자세를 본받을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유관순 열사의 생애

1919년 만세운동 후 수감… 옥중에서도 독립 투쟁

 

경성복심법원 재판 기록문.

 

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수형자 기록표.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현 이화여고)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학교 옆 정동교회를 다니며 나라와 민족에 대한 열정과 애국심을 키웠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그해 3월 5일에는 학생단 시위에 참여해 체포되기도 했다.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학교 휴교령을 내렸고, 그로 인해 고향인 병천으로 내려와 김구응, 조인원, 유중무 등과 함께 4월 1일 장날을 이용해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 만세운동으로 유관순 열사의 부모를 비롯해 19명이 순국하고 3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유 열사는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수감 중인 1920년 3월 1일 3·1만세운동 1주년을 기념해 옥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펼쳤으며, 이로 인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유 열사는 결국 출옥을 이틀 남긴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20분, 서대문형무소에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순국했다.

숨을 거두기 전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