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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선따라 15000km 안보대장정 - 강화 교동도] 발길 닿는 곳마다… 눈길 가는 곳마다…심장이 뛴다, 호국 숨결에…

발길 닿는 곳마다… 눈길 가는 곳마다…심장이 뛴다, 호국 숨결에…

 

 

어스름한 바다안개 속에 끝없이 늘어선 모래사장. 해안선은 경계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에서 해안선은 그 존재 자체가 경계의 상징이다.

해안선은 역사다. 해안선은 5000년이 넘는 한민족의 역사를 소리 없이 지켜본 산증인이다. 금수강산을 둘러싼 해안선은 늘 그 자리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고 있다.

해안선은 조국을 위해 장렬히 산화한 영혼들의 넋이 살아 숨 쉬는 호국의 허파와 같다. 아름다운 강산을 빼앗으려 칼을 들이민 외세에 당당히 맞섰던 호국영령들이 잠든 안식처,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 조국과 가족을 위해 피 끓는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친 최전선이 바로 해안선이다.

지난해, 분단의 상징에서 통일의 상징으로 거듭나고 있는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를 동서로 횡단한 국방일보는 올해 이의 연장선상에서 한반도를 감싸고 숨 쉬는 해안선을 연중 특별기획으로 다룬다. 대한민국 육지와 섬의 해안선 총 길이는 무려 1만5000㎞. 국방일보는 오랜 시간 그 자리에서 한반도의 희로애락을 지켜본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그 속에 살아있는 호국안보의 숨결을 매달 독자들에게 전해드리고자 한다.

서쪽에서 남쪽으로, 다시 동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특별기획 '해안선 따라 1만5000㎞'. 그 첫 시작은 발로 닿을 수 있는 서쪽 최전방, 교동도다. 외지인의 발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아 순수함을 유지해온 교동도는 이제 막 기지개를 켜고 새로운 변화의 물결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다시 태엽을 돌리기 시작한 '시간이 멈춘 섬' 교동도는 기나긴 해안선을 따라 걷는 이번 여정의 시작점으로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강화 교동도 실향민들엔 제2의 고향세월의 흔적들이 아프다

 

최근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교동도지만 좁은 해역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안보의 최전선’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칼바람이 몰아치던 지난 20일에도 해안선을 지키는 해병대2사단 ○○소초 장병들은 해안철책을 따라 철통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조선시대 교동도는 외국의 사신들이 수도 한양으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해상 요충지'였다. 인조 7년(1629년) 지어진 둘레 430m의 교동읍성은 예전의 영화를 방증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간신히 1개의 문만 남은 교동읍성은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준다.

 

 

교동도에는 6·25전쟁의 포화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황해도 주민들이 모여 살고 있다. 북녘땅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에 있는 망향대는 실향민들이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북쪽에 계신 할아버지·아버지를 위한 제단'이란 비문에는 실향민들의 애절함이 담겨 있다.

 

 

'시간이 멈춘 섬'. 교동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실향민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룡시장은 1960년대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각종 장치가 가득하다. 슈퍼마켓 벽면에 그려진 천진난만하고 어린 '아이스케키 장수' 옆으로 무심한 듯 지나가는 주민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교동도를 '시간이 멈춘 섬'이라고 부른다. 1970년대에서 멈춘 듯한 마을의 모습. 섬을 대표하는 대룡시장 곳곳에 쌓인 먼지마저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런 교동도가 변하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과거가 매력적인 이유는 과거가 우리에게 더 이상 아무 영향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쉴 새 없이 변화하는 도시의 삶에 지친 이들에게 교동도의 풍경은 분명히 매력적이다. 지난 2014년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교동도는 민간인들의 출입이 한결 자유로워졌다. 이미 5년여 전 한 인기 예능프로그램에 소개된 뒤로 이 '시간이 멈춘 섬'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6·25전쟁 당시 건너온 실향민들에게 '새로운 고향'이 돼 준 교동도의 시계는 한동안 멈춰 있었다. 이제 다시 교동도 시계의 태엽은 천천히 회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교동도에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켜켜이 쌓여 있는 세월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지금부터 '느리게 걸으며 느낄 수 있는' 교동도의 구석구석을 사진과 함께 소개해보고자 한다.

 

 

북녘 땅과 3km 안보요충지... 무명용사들 투혼 아직 뜨겁다

 

강화 교동도

 

 

‘어미섬’인 강화도 서쪽에 위치한 별립산 정상에 오르면 기다란 연륙교(連陸橋)에 의지해 육지와 연결돼 있는 교동도가 한 눈에 보인다. 교동도는 현재 사람이 발로 걸어 닿을 수 있는 우리나라 서쪽 최전방이다. 군사적 요충지, 안보의 현장, 삶의 터전 등 다양한 얼굴을 가진 ‘신비의 섬’ 교동도는 오늘도 해병대 2사단의 경계 속에 일상의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다. 한재호 기자

 

 

수은주가 바닥으로 치닫던 지난 20일 강화도 창후리 선착장 옆 무태돈대 위에서 바라본 교동도는 고요 그 자체였다. 매서운 바닷바람을 뚫고 출항에 나선 어선 몇 척과 바닷새들만이 간간이 정적을 깰 뿐이었다.


교동도와 연륙교로 이어져 있는 강화도는 예로부터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고려시대에는 몽골군과 맞선 최후의 보루였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수도 한양으로 향하는 해상 관문 역할을 했었다.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는 초소였던 무태돈대는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졌다. 병자호란 당시 중국에 인질로 끌려갔던 효종은 두 번 다시 같은 치욕을 겪지 않도록 강화도 해안선을 따라 진, 보 돈대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손자인 숙종 때 5진·7보·53돈대가 완성됐다. 19세기 말 외세에 맞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최전방 역시 강화도였다.

 

 

해병대2사단 해안경계. 사진=한재호 기자

 

● 무명용사들의 안식처, 이제는 北이 바라보이는 최전방으로


강화도의 부속섬인 교동도는 의외로 전쟁의 포화를 비껴나간 평화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교동도도 6·25 전쟁의 격랑은 피해갈 수 없었다. 교동도를 비롯한 서해안의 섬들은 적 해안을 봉쇄하고 적의 후방을 위협하며 첩보를 수집하기 위한 전략 도서로 구분됐다.


육지와는 달리 접근 자체가 어려운 섬의 특성은 우리 군의 작전 설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섬 진입 및 방어는 상륙 및 유격에 특화된 해병대가 주로 맡았다. 해병대는 1951년 4월 2일 독립 41중대를 편성, 황해도의 턱 밑에 위치한 교동도 진입에 성공했다. 지금도 교동도는 이런 선배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해병대 장병들이 지키고 있다.


교동도는 특히 특수부대와의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6·25 전쟁 당시 청년대, 학도호국대 등의 이름으로 활동했던 이들이 중심이 돼 만들어진 ‘육군 을지2병단’의 본부가 세워진 곳이 바로 교동도다. 서해 도서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벌인 을지2병단은 이후 미 극동군사령부에 소속돼 ‘타이거여단’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들은 수많은 전투를 거치며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으면서도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교동도에는 조국을 위해 싸우다 스러진 이름없는 이들을 기리기 위한 전적비가 마련돼 있다. 전쟁이 끝난 지 50년 가까이 지나서야 만들어진 전적비 한 켠에는 ‘북한에서 전투작전을 수행한 용감한 한국의 유격대원들과 미국의 특수부대원을 기리며.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교동향교. 사진=한재호 기자

 

 

● 3km너비 바다를 사이에 두고 북한과 대치

 

교동도 최북단에는 해병대 2사단 ○○소초가 자리잡고 있다. 소초는 3㎞ 너비의 바다(중립구역)를 사이에 두고 북한과 대치하고 있다. 유난히 하늘이 맑았던 이 날 소초 끝 감시초소에 서니 민둥산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포대가 육안으로도 보였다.

 


탁 트인 해안선을 경계로 북한과 맞닿아 있는 이 곳에서 근무하는 장병들의 마음은 어떨까? 혹시 무섭거나 불안하지는 않을까? ‘무적 해병’들의 대답은 씩씩했다. 해안 철책점검을 막 마치고 돌아온 이승윤 이병은 이렇게 말했다.
"소초에 배치된지 2주밖에 안됐지만 서측 최전방을 지키게 된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 덕분에 편히 주무실 부모님을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뿌듯합니다."

 

대룡시장.

 

 

● 실향민들의 눈물이 어린 해안을 걷다

 

 

교동도의 또 다른 이름은 ‘실향민의 섬’이다. 전쟁 끝나면 돌아가려고 잠시 머물다 가족과 생이별하게 된 사람들이 고향이 지척인 교동도에 터를 잡았다. 실향민들이 중심이 돼 만들어진 대룡시장에서 차로 10여분 쯤 들어가면 망향대가 보인다. 나즈막한 언덕 위에 자리잡은 망향대는 실향민들이 고향을 향해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북녘이 한 눈에 보이는 해안 철책 근처에 만들어졌다. 재이북부조 지단(在以北父祖 之壇). ‘북쪽에 계신 할아버지·아버지를 위한 제단’이라는 비석 아래는 실향민들의 눈물이 얼룩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교동도는 북한과 맞닿은 민통선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왕래가 자유롭다. 2014년 강화도를 잇는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통행은 더욱 편해졌다. 외부 방문객의 경우 교동대교 앞 검문소에서 출입증을 교부받아야 비로소 섬 출입이 허용되지만 다른 민통선 지역보다는 제약이 훨씬 덜하다. 3000여명이나 되는 주민들의 편의와 지역 관광활성화를 위한 조치다. 해병대 2사단과 강화군은 그렇게 국가안보와 지역 활성화의 사이에서 접점을 찾아가고 있었다.

 

유격군 충혼 전적비

 

 

● "용맹한 해병대 장병이 지키고 있어 안심"

 
기자가 방문한 날은 전국 최전방 곳곳에서 대북 확성기가 울려퍼지고 있는 중이었다. 북한이 지척인 이 곳 주민들의 심정은 어떨까? 오가며 만난 주민들의 말은 뜻 밖이었다.


"그리 불안하지는 않아요. 오래 살아서 그런가? 대북 확성기를 튼다고 해서 손님이 잠시 끊겼었는데 그 때서야 조금 실감이 나더군요." 대룡시장에서 식당을 운영 중인 ‘교동도 토박이’인 장상권 씨는 덤덤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한 주민은 "새삼스럽게 뭘…."이라며며 말끝을 흐리다가 "용맹하기로 유명한 해병대 장병들이 지키고 있어서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교동도 해안을 걸으며 느낀 섬의 공기는 복잡했다. 실향민의 한숨과 ‘셀카봉’을 든 관광객들의 웃음, 해안 철책을 따라 걷는 장병들의 날카로운 눈빛과 대조적인 주민들의 표정은 분명히 이질적이었다. 섬을 뒤로하고 다시 뭍으로 향하는 길. 기다란 연륙교 갓길에 차를 멈추고 돌아본 ‘민통선 속 섬’ 교동도는 이제까지와는 또 다른 묘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무태돈대

 

 

망향대.

 

 

인터뷰 - 대룡시장 이발사 지광식 씨

 

"피란 왔다가 이곳에 자리잡아

손 뻗으면 닿을 듯한 고향... 죽기 전엔 가보는 것이 소원" 

 

 

 

"차를 타고 가면 30분도 안 걸린다던데. 고향으로 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교동면사무소 인근 대룡시장 이발사 지광식(75) 씨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군 호동면이다. 아버지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 때부터 그 곳에 살던 토박이라고 한다. 그런 그가 교동도에 뿌리내리게 된 것은 6·25 전쟁 때문. 지 씨는 포화를 피해 먼저 교동도에 자리 잡은 아버지를 찾아 할머니,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피난을 왔다.

 

그렇게 교동도에 자리 잡은 지 씨는 황해도에 사는 친척들의 얼굴울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피난민들도 다들 지쳤지. 결국 이 곳(교동도)은 물론 근처 강화도나 인천 쪽에 다들 자리를 잡게 됐어." 지 씨의 설명이다.
교동도에 남은 실향민들은 대룡시장 형성의 주축이 됐다. "먹고 살기 위해" 지 씨가 선택한 길은 당시 성업하던 이발사. 이발소 한켠에는 1965년 7월 10일 그가 취득한 ‘이용사 면허증’이 당당하게 걸려있다.

 
"이 곳에서 자식도 낳고 손자도 봤지. 그래도 여전히 고향이 그리워요. 요즘처럼 명절이 가까워지면 고향 생각이 더 간절하죠."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 씨의 망향가(望鄕歌)는 계속되고 있다. 고향이 그리울 때면 바다 건너 황해도가 보이는 망향대를 찾아간다는 그는 "아직도 내가 태어난 집이 눈에 선하다"며 "죽기 전에 고향 땅을 한 번 밟아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