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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자료

대한민국해병대가 무적해병으로 불리워진 까닭은?

한국전쟁중인 1951년 6월 4일에서 20일까지 17일간의 치열한 전투끝에 승리하여 찬란한 금자탑을 쌓은 대한민국해병대의 도솔산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 과거의 역사적비극을 오늘의 문화축제 로 승화시켜 자유와 평화를 위해 꽃다운 젊음을 초개와 같이 던진 살신성인정신의 무적해병투혼을 우리민족의 호국의 등불로 빛내고자 통일염원축제인 도솔산전적문화제를 매년 양구군에서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럼 먼저 도솔산전투란 어떤 전투였는지 알아볼까요?
인천상륙과 서울탈환 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해병대는 이 외에도 다양한 상륙작전과 지상작전을 수행했는데, 지상작전 중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가 바로
도솔산 전투입니다. 유엔군이 5월 말에 실시한 ‘파일드라이버’(Piledriver) 작전의 일환으로 전개된 도솔산전투는 해병대하면 떠오르는 바로 "무적해병"의 칭호를 받게 된 해병대 7대작전중의 하나로서 해병대의 위상을 드높인 전투중의 하나입니다.

국군과 UN군이 1951년 춘계공세를 격퇴한 직후, 한국해병대 제1연대가 양구군 해안면의 해안분지 남서쪽에 있는 전략요충지 도솔산(1,148m)을 확보하기 위하여 ‚ 제1단계 작전(1951. 6. 4 ∼ 6. 12)시 공격 목표 ∼1’에서 목표 ‘16’까지 점령한 뒤 캔사스선으로 진출하였고‚ 제2단계 작전(1951. 6. 13 ∼ 6. 24)시 공격 목표 ‘17’에서 목표 ‘24’까지 점령하고 버지선까지 진출하여 도솔산과 대우산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산악지역에 배치된 북괴군 제5군단 제12사단과 32사단의 정예부대를 치열한 공방전과 무수한 희생끝에 격퇴하고 도솔산을 탈환하게 되는 17일간의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1951년 6월 4일 도솔산탈환에 실패한 미해병 제5연대와 임무교대한 한국해병대 제1연대가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암석지대를 이용하여 수류탄 및 중화기로 무장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고, 주간공격을 야건공격으로 전환하여 결사적인 동격작전을 감행하는등 난공불락의 진지를 현전 17일동안 피와 땀으로 얼룩진 끈질긴 공격끝에 24개목표를 점령하였습니다.
미 해병대가 고전하던 작전 지역을 인수해 이 기간 동안 국군 제1해병연대는 대단히 성공적인 작전을 실시하여 임무를 완수했고 작전 중에 총 24개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단계별로 점령하면서 작전의 효율성을 높였으며 미군들이 꺼리던 야간작전도 과감히 실시하는 작전 능력도 보여줬습니다.그러나 작전지역이 방어하던 적에게 대단히 유리했기에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제1해병연대는 전사 123명, 부상 582명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도솔산 작전상황도>
이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유엔군은 펀치볼을 감제하는 도솔산과 대암산을 확보 했을 뿐만 아니라 차후의 공격작전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고, ‘신 캔사스 선’을 구축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6월 20일 드디어 북괴군 2개사단을 격퇴하는 해병대의 개가로 교착상태에 빠진 아군전선의 활로를 개척하게 되고 이승리로 이승만대통령이 도솔산을 방문하여 무적해병대라 칭하면서 "무적해병"휘호를 하사했으며,1951년 8월 19일 해병대 제1연대에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여하고 국회에서는 감사문을 전달하기도 하였으니 이전투의 승리가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강복구(맨 오른쪽) 예비역 해병대 대령이 지난 18일 강원도 양구에서 열린 도솔산지구전투 위령제에 참석해 호국영령들의 넋을 위로하는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국방일보>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7월 해병대 간부후보생 2기로 소위로 임관한 뒤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수복작전, 도솔산지구 전투는 물론 베트남 전쟁까지 참전한 해병대 전사의 산증인인 강복구 예비역해병대령은 당시 제1해병연대 3대대 9중대장(중위)으로 전투에 참가했는데 그는 국방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해병연대는 미 해병대가 고전하던 작전 지역을 인수해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특히 누구도 엄두 내지 못한 야간작전을 과감히 감행하는 월등한 작전 능력도 보여줬습니다. 저는 해병대원이었다는 게 그 어떤 무공훈장보다 자랑스럽습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또한 당시 해병 제1연대 제1대대 2중대 3소대장으로 전투에 참가한 이근식 예비역해병대령은 그의 저서 노해병의 어제와 오늘에서 당시의 극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이거다. 처음에는 해병대의 명예를 위해 명령에 따라 공격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보다 먼저 목표를 점령하므로써 전사한 전우의 원수를 갚는다는 생각뿐 이었다. 그리고 전투에 승리하여 해병대의 명예를 높임으로써 해병대의 전통과 명예를 이어갈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이 때 우리에게는 생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같은 것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죽음이란 남의 일 같이 생각되었다. 오로지 목표를 점령하므로써 전우의 원수를 갚는다는 생각밖에는 우리에게 없었다. "라고...
이런 치열했던 해병대의 도솔산전투를 기념하기위한 1998년부터 개최된 도솔산전적문화제가 올해로 14회째를 맞아 2011년 6월 17일부터 19일까지 3일간 양구군 일대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개막식이 올해부터는 오후 늦은 시간으로 변경되어 개막을 준비하고 있는 양구 도솔산전적문화제 현장을 스케치해보았습니다.


행사가 열리는 양구공설운동장 입구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오는 것은 충령비

였습니다. 우측의 사진은 1951년 6월 19일 제9목표를 점령한 직후 해병대1연대 장병이 전사한 전우를 기리며 나무에 "충령"이라는 두글자를 새겨놓고 있는 사진입니다.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에서는 위 사진의 주인공을 찾고 있습니다.02-709-3197)

도솔산전적문화제의 첫번째 행사인 도솔산전투 충령비만들기대회에 출품된 여러가지의 충령비들이 행사장 입구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행사기간동안 행사장을 찾을 많은 예비역해병들을 위해 옛 전우 만남의 장에는 해병대의 각 기수별로 명단이 정리되어 쉽게 전우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었습니다.>

<해병대무기전시회>

<군무기 및 장비전시회>

이밖에도 해병대특별사진전, 625특별사진전, 모의지뢰체험,서바이벌체험, 세게군복체험 및 포토존, 군부대무료건장진단,반합라면과 전투식량체험, 찾아가는 박물관, IBS보트체험 및 용맹IBS대회, 올해 처음으로 열린 군복밀리터리패션쇼등 다양한 상설이벤트행사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해병대무기전시회장에서 대기중인 해병대원의 모습에서 도솔산전투의 신화를 이룩한 해병대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후배해병들의 늠름한 모습을 보며 뿌듯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끝으로 해병대지에 소개된 바 있는 도솔산전적문화제 추모제 헌시를 소개해 드리며 무적해병투혼을 보여준 호국영령들의 살신성인정신을 다시 한번 기려봅니다.

-도솔산 전적문화제 추모제 헌시 中 - 김건영 (해병대지 33호)

누가 우리를 이 자리에 모이게 했는가
누가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있는가
누가 우리에게 전율을 느끼게 하고 있는가
피부의 색깔은 달라도 목숨 바쳐 찾아야 했던 조국과 민족, 자유와 평화
아! 그 날의 전우들이여, 혼불이여!
1,147m의 도솔산이여!
대우산과 가칠봉과 대암산,
그리고 드넓은 해안분지를 조국에 바치기 위해
마의선이라 불렀던 KANSAS LINE을 뚫으면서
그 얼마나 많은 전우들을 끓는 가슴에 뭍으며 피눈물을 삼켜야 했던
잊을 수 없는 17일간의 그 나날들
새삼 되뇌이지 않아도 도솔산은 알고 있나니
아! 도솔산의 신화여!
청사에 길이 빛날 무적해병의 신화를 창조한 대한의 건아여
“싸워서 이기고 지면 죽어라”
하늘도 땅도 해병의 기백 앞에 물러섰거늘
불멸의 전통으로 영원히 이어갈 것이외다.
님들이여!
이름 부르면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 같은 전우들이여
지금 이 자리, 가슴과 가슴을 합치고
마음과 마음을 묶어 외쳐 불러보지만
끓는 피 심장깊은 숨결만을 느낄뿐 정녕 환한 얼굴이 없습니다.
또한 그때의 도솔산도 침묵으로 거친 호흡만을 간직한 채
증인으로 제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거룩하게 산화하시어 영원히 살아계시는 700여 영령들이시여!
하늘이여! 이끌어 주시옵소서
7천만 민족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통일의 문을 열어주시옵소서!

임영식기자
< 국방홍보원 블로그 어울림 기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