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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세계 물의 날 특집. 물을 무기로 이용한 전쟁사

전쟁과 물을 결부시키는 것은 좀 의아한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고금의 전쟁사를 살펴보면 물을 이용해 전술 및 전략적 목표를 달성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단순히 수군이나 해군을 이용한 것이라면 굳이 이런 제목을 붙일 이유도 없을 것이다. 오늘은 세계 물의 날을 맞이해 물을 하나의 무기로 이용해 전투의 향배를 바꾸는 전쟁사를 살펴보자.

댐 버스터

 

2차 대전당시 독일의 전쟁수행력을 뒷받침하는 원동력은 루우르지방의 공업시설이었다. 그리고 이 시설은 루우르에 있는 댐들에서 발전되는 수력발전에 의해서 가동되고 있었다. 대전 초부터 독일과 사투를 벌여온 영국은 보다 빨리 전쟁을 종결시키려는 여러 가지 계획을 마련한다. 그중 제일 효과적인 작전 중 하나는 독일군의 전쟁병기 생산의 근원이 되는 에너지원을 차단시키는 방법을 모색하는 계획이었다. 즉, 독일의 전쟁병기들을 생산하는 루우르지방의 수력발전을 저지시키기 위하여 수력발전의 근원인 댐들을 폭파시킬 계획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댐 주변에 설치된 독일군의 무수한 대공화망과 댐의 저수지에 적 어뢰의 공격으로부터 댐을 보호하는 철망을 수중에 3중으로 보강해 놓았던 상태였다. 이러한 독일군의 대비에 루우르지방의 댐들을 공중폭격으로 파괴시키기란 불가능하게 보였다. 독일의 댐에 저공으로 접근하여 폭격을 가할시 독일군의 대공화망에 격추될 가능성이 높은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설사 댐 폭격에 성공한다손 치더라고 댐 저수지에 폭탄들이 터져봤자 그러한 폭발력으로 발생하는 파도로는 독일의 댐에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하고 차후 댐의 방어태세를 더욱 강화시킬 것이라는 점을 영국군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의 바네스 윌리스는 이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던 중 어느 날 별생각 없이 물가를 산책하던 중 영국 어린이들이 물가에서 재미로 물수제비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고 퍼뜩 묘안이 떠올랐다. 물수제비놀이로 익히 알려져 있는 편평한 돌멩이를 물가에서 던지는 놀이를 보고 독일의 댐들을 폭파시킬 묘책이 떠올랐던 것이다. 즉, 돌멩이를 팔매질할 때 회전시켜 수면 위를 멀리까지 여러 번 도약시키는 원리를 폭탄에 적용할 생각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바네스 윌리스의 생각으로 고안된 계획은 즉각 영국군에 수용되여 비로소 댐폭탄(Dambuster)이 개발되게 된다. 댐버스터 폭탄은 물수제비처럼 여러번 도약 하도록 설계되었는데, 수면에서 도약을 여러 번 시키는 이유는 폭탄의 무게로 투하 후 곧 가라앉게 하지 않기 위함과 동시에 댐 안쪽까지 회전하여 목표물 끝에서 폭발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런 원리를 이용하여 개발된 폭탄의 형태는 보통 해전에서 구축함이 대잠수함작전에 사용하는 원통형 폭뢰형태의 모습이었지만, 폭뢰보다는 훨씬 폭탄의 부피는 커진 형태였다. 영국 공군은 댐버스터의 공중 투하실험을 영국의 댐에서 시도한 후에 617 항공대라는 특수임무부대를 창설해 독일에 잠입하여 1943년 5월17일 독일 뫼네댐을 처음으로 폭파시킨다. 이후 영국공군은 독일의 에데르(Eder)댐과 조르페(Sorpe)댐, 리스텔(Lister)댐, 스첼름(Schwelm)댐, 엔네페(Ennepe)댐들을 차례로 폭파시킨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독일은 군수산업 전반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결국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승리의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댐 버스터의 실물모습. 폭뢰를 대형화 한 모습이다.

 

댐 버스터 폭탄의 원리를 설명한 그림. 물수제비 원리이다.

 

 댐 버스터로 파괴된 에데르 댐의 모습.

 

 

 

드네프르 댐 폭파 – 독재자가 부른 재앙


1941년 독소전쟁당시 파죽지세로 소련을 침공해 들어간 나치독일군은 유럽에서 세 번째 긴 강인 우크라이나의 드네프르강에 다다르게 된다. 소련의 스탈린은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8월 23일, NKVD(KGB의 전신)에게 드네프르 댐을 폭파시키도록 명령한다. 즉, 댐을 폭파 시켜 홍수로 독일군을 막는다는 발상이었다. 결국 소련군에 의해 댐이 폭파되었지만 이는 곧 재앙으로 이었다. 비밀리에 작전을 수행한 NKVD는 인근 우크라이나 주민에게 대피경고를 하지 않았고, 갑자기 들이닥친 드네프르강의 홍수로 인해 수천 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 사망자 중에는 다수의 소련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련의 철저한 비밀작전이었기에 공식적인 사망자 기록은 없었지만, 역사학자들은 이 홍수로 약 2만 명이 사망하고 10만의 이재민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생존자의 증언을 들어보면 당시 홍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나뭇가지를 붙잡고 울부짖었으며, 가축들 또한 비명을 지르며 떠내려갔다고 한다. 현재 8월 23일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블랙 리본 데이’로 알려져 있다.

 

 

스탈린에 의해 파괴된 드네프르 댐의 모습.

 

드네프르 댐의 파괴로 홍수가 지나간 자리의 모습. 참혹하기 그지없다.

 

 

4차 중동전


이집트의 ‘파룩’왕을 폐위시킨 ‘네기’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은 ‘나세르’는 중동에서 아랍의 맹주였다. 그러나 1970년, 나세르가 심장마비로 급사하자, 뒤를 이어 이집트 대통령 자리에 오른 ‘안와르 사다트’는 무능했지만 탐욕스러웠던 나세르와 매우 다른 인물이었다. 사다트는 나세르 때와는 다르게 서방국가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면서도 아랍국의 단결을 도모했고, 구태의연한 국내조직을 개혁하기 위한 시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사실 이 때 까지 아랍군의 이미지는 무능과 부패의 상징이었으며, 이는 곧 아랍권 최고지휘관들의 무능과 부패를 의미했다. 하지만 사다트 대통령은 강력한 개혁으로 이집트군을 일신했고, 과거 이스라엘에게 빼앗긴 시나이 반도를 되찾기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사다트는 소련 고문단을 초빙하여 현대적인 전술을 연마함과 동시에, 최신예 소련제 병기들을 대거 도입해 강력한 훈련을 반복하였다. 하지만 이 전까지 세 차례의 중동전에서 아랍권, 특히 이집트는 항상 이스라엘에게 처절하게 두들겨 맞았고,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군대를 경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한편 사다트는 몇 개월에 한 번씩 곧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공갈협박을 하며 몇 년을 끌었고, 이스라엘은 사다트를 그냥 위협만 일삼는 허풍쟁이로 여기게 된다. 하지만 이는 기만전술로서 이스라엘을 안심시키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었다. 이윽고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의 명절 욤키푸르일(속죄일이란 뜻으로 이스라엘의 거국적 공휴일이며, 이 기간에는 그 어떤 노동행위도 허용되지 않고 금식과 종교적 행사가 주를 이룬다)에 많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휴가를 떠난 바로 그 시기에 이집트의 전면적인 기습이 시작된다. 개전 당일, 이집트군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창의적인 전술을 사용한다.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에서 이집트의 상륙을 저지하기위해 해안가에 거대한 모래방벽을 건설해놨다. 이른바 ‘바브레’선이라고 불리는 이 방벽은 이스라엘판단으로 돌파에 이틀이 걸린다는 방벽이었다. 이틀이면 이스라엘이 병력을 동원해 이집트군을 격퇴하는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집트군 공병은 ‘워터제트 펌프’를 이용해 단 9시간 만에 이스라엘의 모래방벽을 돌파해버렸다. 참으로 물이 최고의 무기가 된 셈이었다. 바브레선이 돌파 당하자 이스라엘군은 크게 당황했고, 서전에서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에게 이제껏 유래가 없었던 처참한 패배를 당한다.

 

워터 제트 펌프를 이용해 모래방벽을 무너뜨리고 있는 이집트 공병대의 모습. 전쟁 역사상 손꼽히는 창의적 전술이다.

 

무너진 방벽 사이로 이집트군이 교량을 설치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아연실색 할 상황. 

 

살수대첩


물과 관련된 전쟁했을 때 우리에게 가장 먼저 생각나게 하는 전투는 아마 살수대첩일 것이다. 고구려 영양왕 23년(서기 612년), 수나라 양제는 113만의 대군을 몰고 와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요동성 공략에 실패하며 진퇴양난에 빠진다. 다급해진 수양제는 별동대 30만(30만이 별동대라니.....)을 평양성으로 직행시킨다. 하지만 평양성에서 을지문덕의 기만전술에 철저히 농락당한 수나라군은 위장항복문서에 속아 그대로 철군한다. 그리고 지금의 청천강일대 살수에 다다르자 둑을 막아 강물을 막고 있던 고구려군은 일시에 둑을 무너뜨려 강을 건너던 수나라군사들을 단 한 번에 수공으로 쓸어버려 전멸을 시킨다. 지금 읽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장면이다. 하지만 살수대첩은 좀 재구성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토목기술로 강을 둑으로 막아 한 번에 터뜨리는 기술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도 이정도 일을 하려면 수개월의 준비와 엄청난 인력과 장비, 그리고 폭약이 필요하다. 현재 사가들은 아마도 수나라군이 후퇴하며 가을 절반정도 건널 쯤, 미리 강을 건너가 있던 고구려군과 수나라군의 후미를 추격하던 고구려군이 연합해 맹공을 퍼부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살수대첩은 강물을 이용한 고구려군의 절묘한 작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30만에 달하던 별동대는 약 2천7백명만이 살아남아 수나라로 도망쳤다. 완벽한 고구려군의 승리였다. 수양제는 이후 3차, 4차에 걸친 고구려 침공을 계속했으나 결국 고구려 정벌에 실패했으며, 이렇게 무리하게 고구려 정벌에 나선 수나라는 결국 국력이 고갈되어 당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수양제 역시 호위무사들에게 살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살수대첩의 민족기록화. 사실 그림과 같은 수공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물과 전쟁에 대해 알아보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물도 최고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물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수단도 동원될 수 있는 것이 전쟁이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모든 상황을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글, 사진 : 이세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