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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M-기네스] <1>6.25전쟁이 남긴 기록들

정전협정 61주년 및 유엔군 참전의 날 특별기획
[M-기네스] <1> 6.25전쟁이 남긴 기록들

 

 

 

'M-기네스' 는?! 기네스북에 오른 군 관련 기록이나

최고, 최초, 최대, 최소 등 기록과 군을 연결한 흥미로운 소재를 기사화한 블로그 컨텐츠 입니다.

 

 

는 27일은 '정전협정 61주년'이 되는 날이자 '유엔군 참전의 날' 입니다.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약 3년에 걸쳐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남북한을 통틀어 520만 명의 인명손실과 1,000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고 전 국토가 폐허가 됐죠.. 이산가족의 아픔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요.

 

오늘은 6·25전쟁이 남긴 다양한 기록을 살펴보며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을 새롭게 상기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이 글이 여러분께 튼튼한 안보의식으로 발아되길 기대해 보며~ 

6·25전쟁이 세계 기네스북에 3번이나 오른 사연과 6·25전쟁 최초 승전보부터 세계 역사상 가장 길었던 휴전회담 까지!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6·25전쟁의 숨은 이야기들을 함께 살펴볼까요?! 퐐~로퐐~로미 :)

  

 

 

 


 

6.25…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일 연합군으로 참전한 전쟁

 


 

6.25전쟁에는 우리 국군뿐만 아니라 미국과 영국, 터키 등 전 세계 67개국이 공산주의의 무력도발에 맞서 참전했습니다. 이는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일 연합군으로 참전’한 것으로, 이 기록은 2010년 기네스북에 공식 등재되기도 했답니다. 우리를 도와 함께 싸워준 67개국에는 유엔 파병 16개국과 의무 지원 5개국, 물자 지원 40개국, 전후 복구사업 지원 6개국 등이 포함됩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참전한 용사들은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가난한 나라의 국민을 보호하고,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조국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습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이 모든 사람들이 힘을 모아 지켜낸 소중하고 고귀한 자유인 것입니다.

 ▲ 기네스 증서 (출처: 월드피스 자유연합)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기적의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중공군에 밀려 고립위기에 처한 유엔 연합군이 장진호에서의 포위를 뚫고 흥남 항을 통해 탈출한 사실은 유명한 한국전 일화입니다. 세계 전쟁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해상 철수작전으로 꼽히는 흥남철수작전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10만여 병력과 장비, 물자를 이동시키고, 9만여 명에 이르는 북한 피난민들도 구출합니다.  

 

▲ [국방TV] 북한의 침략전쟁 6.25 - 홍남철수작전 

 

 이 때 피난민을 태운 배 중 유명한 것이 바로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인데요~ 철수작전 가장 마지막에 남은 상선들 중 하나였던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당시 건조된 지 5년 정도 된 7,600t급 수송선으로, 피란민을 위한 식량이나 화장실 같은 시설은 전혀 없었습니다. 게다가 300t의 제트연료를 수송하던 중이어서 피란민 승선은 더욱 위험한 일이었죠.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

 사실 메러디스 빅토리아호의 정원은 고작 60명이었고 이미 선원 47명이 타고 있어 피난민을 13명밖에 태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소장과 미군 10군단 사령관 알몬드 장군의 고문으로 있던 재미의학자 현봉학 박사는 피난민도 데려갈 것을 요청하였고, 다른 국군 지휘관도 피난민을 버리고 갈 바엔 국군이 걸어서 철수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강력히 피난민도 함께 철수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에 레너드 라루 선장은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립니다. 메러디스 빅토리아호에 있는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들을 최대한 태우라고 명한 것이죠.  

 

 그 결과 정원이 60명인 배에 무려 1만4천명이 승선할 수 있었습니다. 피란민들은 화물 창고와 갑판 등에 포개진 채 극도의 공포와 배고픔, 추위를 견디며 3일간 항해했습니다. 거제도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던 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오히려 3일 간의 항해 중 5명의 새 생명이 배 위에서 태어났답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기적!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피난민 구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전쟁 역사상 가장 인도주의적이고 성공적인 작전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1만 4천명의 북한 피난민들을 극적으로 구해낸 기적의 배, 메레디스 빅토리호는 ‘단일 선박으로 가장 큰 규모의 구조 작전을 수행한 배‘로 기네스북에 올라 역사에 길이 남게 됐습니다.  

 

기네스 증서 (출처: 월드피스 자유연합)          ▲ 메레디스 빅토리의 피난민들 (출처: 국가보훈처)                       ▲ 레너드 라루 선장

 

 

 


 

가장 오랫동안 이어진 생방송, 이산가족찾기 방송

 


 

 휴전 후에도 전쟁의 아픔은 계속됐습니다. 분단으로 이산가족이 된 이들은 헤어진 가족의 생사도 확인하지 못한 채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던 1983년 6월 30일, KBS 한국방송에서는 이산가족을 찾는 프로그램을 방영했습니다.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라는 타이틀로 밤 10시 15분부터 시작된 이 생방송은 애초에는 이튿날 새벽 1시까지 3시간 정도만 방영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산가족을 찾는 행렬이 예상을 뛰어넘어 장사진을 이루자 KBS는 모든 정규방송을 취소한 채, 5일 동안 '이산가족찾기'라는 단일 주제로 릴레이 생방송을 시작했어요.  

 

 이 기간 동안 가족을 만나기 위해 여의도를 찾은 이산가족은 5만여 명에 달했고, 그 중 500여 명의 이산가족이 극적으로 만났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78%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죠.

 

 이후에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생방송으로 상시 편성되었습니다. 6월 30일부터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그해 11월 14일까지 이어졌는데요~ 총 138일 간, 453시간 45분 동안 방송되었습니다. 이 기록은 기네스북에 ‘단일 주제 생방송 중 세계 최장시간 생방송’으로 기록 됐습니다. 이 기간 동안 이산가족을 찾는 신청은 총 10만 952건이 접수되었으며, 5만3천5백36명이 출연, 모두 1만1백89명의 가족이 혈육상봉의 기쁨을 나눴습니다. 

 

  

                                                        ▲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당시 세계 언론은 이 프로그램을 TV 방송 사상 가장 성공적인 프로그램으로 칭찬했습니다. 또 1983년 제 6차 세계언론인대회에서 그 해의 가장 인도적인 프로그램으로 선정했고, 1984년 세계평화협력회의 총회에서는 세계의 방송기관으로는 처음으로 ‘골드 머큐리 애드오시램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 또 다른 기록들 

 


 

 

6.25전쟁 최초 승전보는 ☞ 대한해협해전
대한해협 해전은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6일 새벽, 대한민국 해군의 첫 전투함인 백두산함이 부산으로 침투하던 북한의 무장 수송선을 격침해 승리한 해전입니다. 당시 대한해협 해전의 승리로 우리 군은 전략적 요충지이자 최후의 보루였던 부산을 굳건히 지켜낼 수 있었으며, 우리 후방지역을 교란하려던 적의 기도를 좌절시킴으로써 연합증원전력의 도착을 보장하는 등 궁극적으로 3년 간의 6·25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결정적인 단초가 됐습니다.

 

 

[국방TV] 북한의 침략전쟁 6.25 -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

 

   

             백두산함의 모습                                                    지난달 26일 열린 64주년 대한해협해전 전승행사의 모습

 

6·25전쟁 해병대 최초 승전은 ☞ 군산·장항·이리지구 전투

군산·장항·이리지구 전투는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7월13일, 한국 해병대가 참가한 최초의 전투로 당시 북한군 6사단의 호남지역 남침을 지연하기 위해 벌어졌으며 이 전투가 해병대 신화의 시발점이 됐죠. 창설 1년 만에 참전한 이 전투에서 해병대는 적의 남침을 1주일간 지연시켜 아군의 식량 반출작전과 방어진지 구축을 성공적으로 보장했으며 열악한 장비와 병력의 절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북한 군 300여 명에게 피해를 주며 북한군 남침의 예봉을 꺾은 매우 중요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어요. 

 

6·25전쟁 유엔군 최초참전 부대는 ☞ 미 지상군 스미스부대

 6·25전쟁에 최초로 투입된 부대는 미 제24사단이었습니다. 전쟁 발발시 제24보병사단은 일본 규슈와 혼슈 남부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6월 30일 밤(한국시간)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이에 맥아더 장군은 제8군 사령관에게 주일미군 중 규슈에 주둔한 제24사단을 파견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때는 한강선에서 공방전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출동시간을 단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제24사단이 제일 먼저 투입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부대는 대대장인 찰스 스미스 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로 불렸습니다.

 

한국에 들어오는 스미스 기동대 (출처: 6.25전쟁 기념사업회)

 

6.25전쟁 최초의 공정작전은 ☞ 숙천-순천 공정작전
(공정작전 이란?! 적을 공격하거나 아군을 지원할 목적으로 항공기를 이용하여 지상 부대를 적 후방에 침투하는 작전) 숙천-순천 공정작전은 1950년 10월 20일부터 22일까지 평양 북방 숙천과 순천 일대에서 미 제187공수연대 전투단이 북한군 주력의 퇴로를 차단하고 북한 요인들을 포획하며, 후송할 것으로 판단되는 수백 명의 미군 포로들을 구출할 목적으로 실시한 6.25전쟁 최초의 공정작전입니다.

숙천. 순천 공수작전 전투상황도 (출처:  6.25전쟁 60주년 사업단)

 

 

6.25전쟁 취재한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 ☞ 마거리트 히긴스 
미국 일간지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극동지국장인 마거리트 히긴스는 종군 여기자로 전쟁에 참가해 6·25의 비극적 현장을 전세계에 타전했습니다. 그녀는 전쟁을 취재한 300여 명의 종군기자 중 유일한 여성으로 서울 함락, 낙동강 전투, 인천상륙작전을 목격하고 기록했어요.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

 

 전쟁 발발 이틀 후인 1950년 6월 27일 히긴스는 서울에 잠입, 한강 인도교 폭파와 서울 함락을 직접 목격하며 맥아더 사령관의 한강 방어선 시찰을 취재했어요. 히긴스는 미 지상군의 첫 전투인 스미스 특수부대의 오산 전투 패배를 사실적으로 보도해 6·25전쟁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히긴스는 여 기자라는 이유로 전장에서 추방됐다 다시 최전방 낙동강 전선으로 복귀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미군과 한국군의 전투 현장을 취재하다 목숨을 잃을 뻔한 경우도 부지기수였다고 하네요. 해병대 하면 딱! 떠오르는 문구인 ‘귀신 잡는 해병대(They might capture even devil)’라는 한국 해병대의 별칭도 히긴스의 기사를 통해 나온 얘기라고 해요+_+

히긴스는 인천 상륙 작전 준비 과정부터 상륙 당일에 이어 서울 수복 현장까지 동행 취재하며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우리 정부는 2010년 히긴스 기자에게 외교훈장 흥인장을 추서했고, 그녀의 딸과 손자가 방한해 훈장을 수령했습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길었던 휴전회담 ☞ 6.25전쟁 휴전회담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걸린 회담 기간은 무려 2년이나 됐습니다. 이 기간은 세계 역사상 가장 길었던 회담 가운데 하나로 기록돼 있는데요~ 계속되는 전쟁에 부담을 느낀 당시 국제연합군과 공산군측은 전쟁발발 1년 여만인 1951년 7월 개성에서 첫 정전회담을 갖습니다.

 

▲ [국방TV] 북한의 침략전쟁 6.25 - 정전협정

 

 하지만 본회담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52년 7월 열렸고, 같은해 10월엔 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기게 됩니다. 당시 남한은 정전협정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전쟁포로 문제 등으로 지지부진하던 회담은 1953년부터 활발해 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습니다.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과 북한 수석대표 남일은 형식적인 악수나 인사 한 마디 없이 조인서를 교환했습니다. 협정에는 군사분계선 확정과 비무장지대 설치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 설치에 이어 전쟁 포로 교환등 군사부문과 정치회담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정전협정 체결로 남북 사이에는 현재의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이 그어졌습니다. 또 유엔과 공산군 장교로 구성된 군사정전위원회 본부가 판문점에 설치됐고, 스위스.스웨덴,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로 구성된 중립국감시위원단도 설치됐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지 3년 1개월, 그리고 2년 동안 760여 차례의 만남 끝에 체결된 정전협정.. 우리 민족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6.25전쟁은 세계 역사상 가장 긴 회담이라는 기록을 남기면서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국토통일 없는 휴전에 반대했던 우리 측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 중장(왼쪽)과 공산군 측 대표 남일이

휴전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다. 우리 대표는 최후까지 휴전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끝내 협정서에 서명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