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25사단에서는 37년전 땅굴을 처음 발견한 장본인인 당시 사단수색중대 구정섭 중사와 당시 수색중대장이었던 박광호 예비역소령의 강연이 있었다.
제1땅굴은 다른 땅굴과는 달리 비무장지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자료도 많이 없었을뿐 아니라 직접 취재하기도 쉽지 않은 곳이어서 그들의 증언이 무엇보다 궁금했었다.
그들도 37년만에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이야길 하는 것이라며 다소 격양된 모습이었다.
▲37년전 땅굴발견자 기자회견 장면
제1땅굴은 85년부터 88년까지는 안보교육을 목적으로 개방을 했었으나 땅굴 위치가 비무장지대에 있다보니 민간인 출입을 제약하고 아직까지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땅굴을 발견하게 되었을까?
당시 11월15일은 입동절기가 지난 후 기온이 영하로 급격히 내려간 때였다고 한다.
북한이 이 땅굴을 개설한 2년전은 7.4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더이상 상호 비방하지 않고 상호 불가침 조약이 체결된 해였다. 말로는 평화로운척 해놓고 지하로는 땅굴을 파면서 남침야욕을 늦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파오던 땅굴이 남쪽으로 가까워오자 감독하던 감독관도 감독이 소원해지고 파는 북한군도 어디쯤 팠는지 궁금하기도 했을것이다.
궁금했던 한 북한군이 코크리트 상판을 올리기전에 어디쯤 파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표토를 들어올려 살펴 본후 다시 표토를 닫았는데 그 부분이 바깥 온도와 굴안 온도 차이로 인해 수증기가 발생했던 것이다.
바깥으로 새어나온 수증기가 그 부분만 형성이 되었으니 수색하던 수색대에 발각이 된 것이다.
그부분을 삽으로 파내고 있는데 적GP쪽에서 기관총세례가 퍼붙기 시작했고 교전이 끝난후에 다시 땅을 파고 콘크리트 상판을 들어올리니 땅굴의 실체가
나오기 시작한것이다.
그 시각엔 이미 작업중이던 북한군들은 먹던 밥그릇이며 땅굴을 파던 작업도구, 갱차 모두 내팽개치고 도망을 간 후였다.
▲땅굴 길이와 발견위치
이후 현장조사반이 북한방향으로 땅굴을 수색해보니 엄청난 폭탄이 설치되어있었다. 북한쪽으로 오도록 그냥 내버려둘 북한이아니었다.
수색 5일째 그들이 매설한 폭탄이 폭파하면서 수색중이던 조사반중 미군 1명과 한국군1명이 사망하고 6명이 크게 다치고 말았다.
강연했던 박광호 예비역 소령은 부상자 6명중 1명이었고 나머지 5명은 부상정도가 엄청 심했으며 박광호 예비역 소령만 그나마 부상이 양호했다고 한다.
같이 동행하진 못했지만 강연이 끝나고 난후 이들은37년만에 땅굴 발견장소에 답사를 갔다고
강연히 시작되기 전 서두에 박광호 예비역소령은 잊혀져가는 그때를 되네이고 젊은 군인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했다.
며칠후면 연평도 포격사건 1주기가 되는 날이다. 북한은 아직도 남침야욕을 끊임없이 표출해내고 있다. 우리가 안보의식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한다면 그들은 또 어떤만행을 저지를지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어딘가에 더 깊고 더 긴 터널을 뚫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처음에 20개의 땅굴을 팠다고 하니 말이다.
언제 어디서나 또 다른 모습으로 뒤통수를 치는 그들의 이면을 잊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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