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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우리 공군의 진정한 탄생] 바우트 원(Bout One) 프로젝트

우리 공군의 진정한 탄생

바우트 원 프로젝트

(Bout One Project)

 

이 땅에서 우리 공군이 창설되고, 비록 연습기였지만 ‘건국기’로 불리는 AT-6가 창공으로 날아오른 지 불과 한 달이 조금 지난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전면적인 기습 남침으로 우리민족 최대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는 이제 막 날개를 펼치려던 한국공군에게도 커다란 시련이었다. 오늘은 우리 공군이 진정한 전투공군으로 거듭나기 위해 걸어간 그 험난했던 여정을 살펴볼까 한다.

 

6·25 개전 당시 우리의 공군
개전 첫 날,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우고 북한군은 38선 전선에서 돌파를 감행, 당황한 국군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국군은 분투를 펼쳤으나 중과부족으로 후퇴를 거듭했다. 이 무렵 한국공군에게는 L-4/5, T-6 등 총 20여대 내외의 항공기가 작전 가능한 상태였지만, 이들은 순수 정찰기나 연습기로 기관총조차 설치되지 않아서 밀려오는 적을 향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T-6에는 급히 야전 개조가 행해져 주익에 폭탄을 장치할 수가 있었지만 L형 항공기들은 이런 개조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에 후방석의 관측사가 수류탄이나 15kg 폭탄을 2~3개 안고 날아올라 손으로 떨어뜨리는 눈물겨운 방법으로 북한군을 공격했다. 게다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수시로 서울상공에 출몰하는 북한군 Yak-9 전투기들이나 IL-10 폭격기의 공습으로 김포 비행장에 주기하고 있던 한국공군의 기체들이 상당수 파괴되었고, 결국 한줌에 불과했던 우리 공군기들은 작전을 계속할만한 근거지를 상실하면서 제대로 정비와 보급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사실상 한국공군은 소멸의 위기에 몰리게 된 것이다.

 

L-4 연락기에 시동을 거는 모습(위)T-6 연습기의 모습(아래). 전쟁 직전, 전투기가 한 대도 없는 열악했던 우리 공군의 모습이다.

 

바우트 원 프로젝트의 시작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한국공군이 회생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되자 크게 놀란 주일미군 사령부는 즉시 작전 가능한 미공군기들을 출동시켜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하는 동시에 한국정부가 이전부터 줄기차게 요청해오던 전투기의 원조요구를 드디어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김정열 공군참모총장은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주일미군사령부에 공군전력 강화를 위해서 신속하게 전투기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이 요구를 주일미군 사령부에서 드디어 수락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동안 우리정부의 공군력 지원 요청을 묵살한 미국정부는 전쟁이 터지자 자국 내에서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었으며, 바로 이런 시기에 미 정부는 북한공산군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한국군을 도와주는 장면을 통해 자국의 의회와 여론을 달랠 필요가 있었다. 특히 미군이 원조한 공군기에 한국공군 마크가 그려지고, 이 전투기들이 미군과 같이 작전을 하는 모습이야말로 더할 나위없는 선전효과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한국공군이 진정한 공군으로 다시 태어날 기회가 생긴 것 이었다. 한국공군에 대한 지원 계획은 미 공군에 의해서 '한판승부'라는 의미의 ‘바우트 원 (Bout one)'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전쟁이 시작된 지 하루만인 6월 26일 바로 본격적인 실행에 옮겨지도록 명령이 내려졌다. 또한 미 공군은 한국공군 조종사들의 훈련을 맡을 지휘관으로 ‘딘 헤스’ 소령을 선정했고, 제6146 군사고문단을 창설해 이를 지원토록 하였다.

 

우리 공군파일럿들을 교육중인 딘 헤스 소령(왼쪽 두 번 쨰). 딘 소령은 전쟁 후반 대령으로 승진할 때 까지 우리 공군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으며, 본인 자신도 250회의 출격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한국의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등 우리에게 너무나 고마운 사람이었다.

 

험난했던 여정
그러나 미군측은 전투기의 운용능력에 대해서 한국공군의 능력을 매우 의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번 원조 계획은 단지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어느 정도 명분을 얻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한국에 원조될 전투기의 숫자는 10기에 불과했다. 설상가상으로 불과 전쟁발발 바로 몇 달 전에 미 공군은 2차 대전의 주력기들을 일선에서 대부분 퇴역시키고 한창 새로운 제트전투기들로 기종 전환을 시행한 후였기 때문에, 주일 미 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들 중에 한국공군에 지원 할 마땅한 기체가 없었다. 당시 미 공군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공군에게 최신형 제트전투기를 제공할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결국 미 공군에서 폐기 처리된 F-51D 무스탕 전투기들이 한국공군에게 공여될 기체로 선정되었다. 이 무렵 주일미공군은 10여기의 비행 가능한 F-51D를 가지고 있었고, 즉시 이 기체들은 모두 재정비를 받았으며 비행가능 여부가 테스트 되었다. 동시에 미 공군은 한국군에 단발 프로펠러 전투기를 능숙하게 조종할 수 있는 조종사 10명을 일본으로 보내라고 요청했는데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은 즉시 T-6 연습기를 조종하고 있었던 최고 조종사들인 이근석 대령과 김영환 중령을 비롯한 10인의 조종사들을 선발하여 1950년 6월 27일 일본의 이타쯔게 기지로 파견해 미 공군 지휘 하에 기종 전환 훈련을 받도록 했다. 이러한 과정 모두가 불과 전쟁발발 2일 만에 추진될 정도로 전세는 급박했다. 우리 공군파일럿들의 훈련을 담당했던 딘 헤스 소령은 그저 홍보용 부대가 아닌, 실질적으로 작전에 투입될 수 있는 실전부대를 만들기 원했다. 한국 공군 역시 주어진 이 임무를 수행해서 반드시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여있는 조국에 보탬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딘 소령과 10명의 한국 조종사들은 의기투합해 강도 높은 훈련을 진행했다. 먼저 F-51D의 비행 특성을 파악하고 이어 공중전 및 지상근접지원 훈련을 실시했다. 10명의 한국 공군조종사들의 열의는 대단했으며, 훈련을 마치고 야간에도 이들은 활발한 전술토론을 하며 다음날의 훈련에 대비했다. 시간을 쪼개가며 노력한 당시 우리 공군파일럿들의 노력은 실로 눈물겨운 것이었으며, 이들의 피와 땀은 곧 전쟁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미군 교관으로부터 F-51D의 조종법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는 한국공군 파일럿들. 무스탕 전투기에는 Desert Rat이라는 미국식 노즈아트가 아직 지워지지 않은 상태이다.

 

F-51D의 시뮬레이션 훈련을 하는 공군 파일럿 예비 조종사들. 전쟁이 지속되면서 우리는 자체적인 교육시스템으로 파일럿들을 양성했다.

 

우리공군. 전장 속으로 나아가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훈련 시작 일주일 만인 6월 30일, 미공군사령부는 바우트 원 부대에게 즉시 한국으로 이동해서 작전을 시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서울이 적에게 함락되는 등 전황이 너무나 안 좋게 흘러갔기 때문이다. 바우트 원 부대원들은 10기의 무스탕과 함께 주저 없이 7월 2일, 한국의 대구 공군기지로 돌아왔다. 비록 딘 헤스 소령은 아직 한국공군 파일럿들의 훈련수준이 부족하다고 우려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반면 우리공군 파일럿들은 당장이라도 바로 출격을 원했다. 한국에 도착한 F-51D 무스탕에는 우리 한국공군의 태극무니가 그려졌고, 곧 한국공군의 무스탕 전투기들은 전장으로 날아올랐다. 비록 적 전투기와 교전의 기회는 없었지만, 우리 공군은 가장 위험한 지상근접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치열한 적의 대공포 탄막을 뚫고 거의 급강하폭격기와 같이 과감한 비행을 감행했으며, 조금이라도 우리 국군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의 머리위에 기체를 돌진시켰다. 지상에서 악전고투에 시달리던 많은 우리 국군장병들은 ‘우리도 공군이 있다’라고 환호하며 사기를 북돋울 수 있었다. 특히 우리 공군 단독으로 작전에 나서 북한군의 보급로를 결정적으로 끊어 놓았던 승호리 철교 폭격작전,​ 공중전의 판세를 완전히 결정지은 평양 대폭격 작전 등은6.25전쟁의 전황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6·25 전쟁기간동안 한국공군은 F-51D 무스탕 전투기 133대를 공여 받아 총 8,495회 출격했다. 신생국의 공군으로써 엄청난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이정도의 출격횟수와 전과를 세운 예는 그 어느 나라의 기록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만큼 우리 공군은 절박함속에서도 강철 같은 의지와 신념으로 조국의 하늘을 지켜낸 것이다.

 

작전 중인 우리공군의 F-51D 편대. 우리공군은 대부분의 유엔군 파일럿들이 꺼리는 지상군 근접지원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다대한 전과를 올렸다.

  

  우리공군 무스탕 전투기에 기관총탄을 적재하고 있는 공군 정비병의 모습. 파일럿들뿐만 아니라 정비병들의 피나는 노고도 잊어서는 안 된다.

 

19522, 적의 대공포에 피탄되어 가까스로 비상착륙한 우리공군소속 무스탕의 모습. 위험한 근접지원이 주 임무라 이런 피해는 일상다반사였다.

 

1,000회 출격기념에서 우리 파일럿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불과 2년여 만에 우리 공군은 정예의 공군으로 거듭나는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었다.

 

 

<글, 사진 : 이세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