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쟁사

[6.25 66주년 특집] UN군의 전투

6·25 발발 66주년 특집
UN군의 전투


 

6·25 전쟁에서 UN군이라고 하면 대부분 미군의 활약만을 생각하지만, 무려 16개국이 우리에게 군사원조를 해주었다. 미군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1951년부터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유진영의 수호를 위해, 그리고 우리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리며 분투했다. 이들의 숭고한 희생이 없었더라면 6.25 전쟁은 자칫 우리에게 패배의 전쟁으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6·25전쟁 시리즈 마지막 편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각국의 전투를 살펴보겠다. 치열했던 그들의 전투 속으로 들어 가보자.
 

 

 영국

 

 
고양전투(1951. 1. 2 ~ 3)
이 전투는 영 제29여단이 1.4후퇴 직전, 중공군과 치른 방어전투이다. 미 제1군단의 예비부대였던 영 제29여단은 방어선을 편성하고 후퇴하는 한국군과 미군을 엄호하고 있었다. 이윽고 1951년 1월 2일, 후퇴하는 아군의 꼬리를 추격하는 중공군과 접전을 치르게 된다. 이 전투에서 영 제29여단은 중공군의 수차에 걸친 인해전술에 대항하여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끝까지 방어선을 유지하여 한국군과 미군의 철수를 엄호하는데 성공하였다.

 

적성(설마리)전투(1951. 4. 22 ~ 25)
이 역시 영 제29여단의 전투로써, 적성 일대에서 임진강일대의 방어선에서 중공군의 3개 사단과 치른 격전이다. 이미 중공군과의 전투를 경험해본 영 제29여단은 인해전술에 대한 대비를 하였으며, 대규모의 중공군 인해전술을 3일간이나 방어하여 좌우 인접부대가 안전하게 철수하여 서울 북방에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영 제29여단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여단병력의 약 1/4이 희생되었다. 특히 중공군 2개 사단의 집중적인 포위공격을 받고 고립방어를 전개하고 있던 글로스터 대대는 철수과정에서 39명밖에 포위망을 탈출하지 못하는 고전을 겪었다. 글로스터대대의 이 전투는 6.25전쟁사상 대대규모로서는 그 임무를 가장 훌륭히 수행한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가평전투(1951. 4. 23 ~ 24)
이 전투는 영연방 제27여단(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군 혼성)이 가평 북방 7km 지점에 위치한 죽둔리에서 중공군과 치른 방어전투이다. 중공군은 한국군 6사단이 방어하던 사창리를 돌파하고 가평방향으로 진출했고, 한국군과 UN군의 후퇴로를 차단하기위해 죽둔리 방향으로 공격을 기도하였다. 이를 눈치 챈 영연방 제27여단은 이를 저지, 격퇴하였다. 영연방 제27여단은 비록 이 전투에서 많은 희생을 치렀으나, 중공군의 주력이 UN군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기도를 좌절시킴으로써 중공군의 춘계공세 전체를 지연시키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영국군은 미군과 맞먹는 강한 전투력으로 6.25전쟁 내내 활약하였다.

 

 

프랑스

 


지평리 전투(1951. 2.11 ~ 15)
1.4 후퇴 이후, 중공군의 2월 공세가 시작되자 제8군사령관이던 릿지웨이 장군은 중공군이 뚫고 나오려는 돌파구의 정면에 있는 지평리 일대를 사수하여 공세를 막아내기로 결심했다. 미 제2사단 예하의 미 23연대와 그에 배속된 프랑스대대가 맡고 있던 지평리 일대는 원래 아군전선의 후방에 있었다. 그러나 2월 11일 밤에 시작된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전선이 원주까지 내려오자, 미 제10군단의 최북단 돌출부가 되었고 이어 중공 제39군 예하 3∼5개 사단에게 포위되었다. 중공군은 11일 밤 집중포격과 탐색전을 벌이더니, 이어 대규모의 인해전술을 개시하여 2사단 진지에 수류탄을 던지며 몰려 와 사방에서 치열한 근접전이 벌어졌다. 특히 프랑스군 1개 분대는 4배나 많은 수의 중공군이 몰려 오는 것을 침착하게 기다리다가 20미터쯤 앞에 이르렀을 때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착검 돌격하여 이들을 격퇴했다. 결국 중공군은 마침내 2 사단의 진지의 한 모퉁이를 점령했으나 15일 새벽 날이 새자 미 공군의 근접 항공지원 사격을 견디지 못해 물러났다. 15일 지평리 남쪽의 후방에 있던 미 제1기병사단에서 나온 크롬베즈(Crombez) 특공대는 지평리로 들어가는 주보급로를 다시 열고 저녁 무렵엔 23연대의 원진으로 들어가 포위망을 풀었다. 지평리전투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화력으로 눌러 국군과 유엔군의 전의와 사기를 크게 드높였으며, 유엔군전사를 통해 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수원에 있는 프랑스군 참전비. 6.25전쟁에 참전한 프랑스군은 4,000여 명으로, 1951년 1월 10일부터 휴전될 때가지 크고 작은 전투에서 사망자 262명, 부상자 818명, 실종자 18명의 희생을 치렀다.

 

 

 호주

 

마량산 전투(317고지)(1951. 10. 3 ~ 8)
이 전투는 영연방 제27여단 소속 호주 제3대대가 특수작전을 통해 전곡 부근 방어선에서 10km 북쪽의 마량산을 공격, 점령한 전투이다. 휴전회담이 개시되고 휴전선의 설정이 논의되고 있을 무렵, 제3대대는 3일간 계속된 공격작전에서 호주 제3대대는 특공대를 조직해 히트 앤 런 식의 공격으로 중공군을 유린했으며, 이윽고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을 격파하고 마량산을 점령하였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의 철원-연천-서울에 이르는 도로망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영연방군 일원으로 참전한 호주군의 모습. 이들은 특히 ‘코만도’라고 불리는 특수작전에 능했다.

 

 

캐나다

 

고왕산 전투(1952. 10. 23, 355고지)
이 전투는 캐나다 제25여단이 임진강 북방 고왕산 지역을 방어 하고 있던 중 중공군과 치른 전투이다. 캐나다 제25여단은 고왕산에서 중공군의 파상공격에 일시 355고지를 빼앗겼으나, 곧바로 역습으로 이를 탈환하여 주저항선을 회복하였다. 캐나다 제25여단은 미리 중공군의 포격으로부터 안전한 비밀참호를 구축해 놓고 은신해 있다가 방심한 중공군을 급습하여 355고지를 재탈환하였다.


 

6·25 전쟁에서 캐나다군 포병이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이들 역시 영연방군의 일원으로 싸웠으나, 장비는 미국제가 대부분이었다.

 

 

 뉴질랜드

 
뉴질랜드군은 보병부대가 아닌 제16포병연대를 한국에 파견하여 영연방군의 일원으로써 참전하였다. 뉴질랜드 제16포병연대는 영 연방군이 수행했던 가평전투, 마량산 전투, 고왕산 전투 등에서 포병화력을 담당하였으며, 항상 영 연방군 위기의 순간에서 적극적인 포병화력을 지원하여 작전이 성공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포탄을 장전하는 뉴질랜드군 병사의 모습. 뉴질랜드군은 주로 포병화력을 담당하였다.

 

 

 필리핀

 


율동전투(1951. 4. 22 ~ 23)
미 제3사단 예하에 편성된 필리핀 제10대대가 연천 북방 율동에서 중공군 제34사단과 치른 전투이다. 필리핀 제10대대는 4월 22일 야간에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맞닥뜨렸고, 한 때 방어선의 일부가 붕괴되어 대대본부 지역까지 중공군이 침투하였다. 그러나 필리핀 제10대대는 치열한 교전을 전개해 끝까지 진지를 고수하여 미 제3사단 본대의 철수를 성공적으로 엄호하였다.

 

 

아스널, 이리 고지 전초전(1952. 5. 18 ~ 21)
미 제45사단에 배속된 필리핀 제19대대는 연천 북방 20km지점 ‘티본’ 고지에서 주저항선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1592년 5월 18일 밤, 중공군 제117사단이 이 지역으로 공세를 시작했다. 중공군은 강력한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2개 연대 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대대 또는 연대 단위로 이 양 고지를 파상공격 하였으나, 필리핀 제19대대는 사단본부의 치열한 화력지원을 받으며 백병전까지 수행한 끝에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고지를 방어하였다.

6·25 전쟁에서 전투 전 군종신부의 예배에서 기도를 올리는 필리핀군 병사들.

가톨릭 성향의 국가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터키

 

터키군의 전투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우리는 터키군의 참전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UN의 일원이었던 터키정부 역시 파병을 결정하고 5천명의 지원자를 받는다. 하지만 터키군은 ‘형제의 나라가 공산군에 짓밟히게 놔둘 수 없다’고 하며 무려 1만 5천명이 지원을 했고, 이 병력이 고스란히 6·25전쟁에 투입된다. 터키는 6·25전쟁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중 741명은 전사했고 2,068명은 부상을 당했다. 163명은 실종되고 244명은 포로로 붙잡혔다. 참전한 유엔군 소속 16개국 중 사상자 인원 규모로만 네 번째였다. 터키군은 그 어떤 UN 참전군보다도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해 우리 조국을 수호하는데 일조한 것이다.

금량장 및 151 고지 전투(1951. 1. 25 ~ 27)
금량잔 전투는 터키 여단이 중공군 제50군 예하 2개 연대와 치른 전투이다. 터키 여단은 UN군이 중공군의 공세를 평택-제천 선에서 저지 및 흡수하고 재 반격을 실시할 때, 핵심적인 반격부대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당시 중공군도 그 선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결전을 시도하고 있었으므로 안성과 송전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터키 여단은 각종 지원화력과 항공지원아래 중공군의 진지로 돌격해들어갔고, 금량장과 그 서측 151고지를 점령하고 중공군을 격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터키 여단은 다소의 손실에 비해 다대한 전과를 거두었고, UN군 본부는 이 전투로 터키 군을 재평가하였다. 

 

장승천 전투(1951. 4. 22 ~ 23)
이 전투 역시 터키 여단이 연천 동북방 장승천 전방에서 중공군과 치른 전투이다. 터키 여단은 금량장 전투 후 계속 반격작전에 참여하여 1951년 4월 22일 연천 북방 장승천 부근에까지 진출하였으나, 이날 중공군의 매서운 반격을 맞게 되었다. 터키 여단은 이날 밤 중공군 2개 연대의 공격을 받아 여단의 양 측방이 돌파되고, 후방지역의 포병대대 진지까지 위협을 받게 되자, 전방대대가 포병의 철수를 엄호하고 상호 유기적인 협조를 유지하며 지연전을 전개하여 약 10km 남쪽인 한탄강까지 철수하였다. 원래 공격작전보다 질서 있는 철수작전이 훨씬 어려운 것임을 감안할 때, 터키 여단의 장승천 전투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한국에 파병된 터키 병사들의 모습. 장비는 미제 일색이다. 영국 등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6·25에 참전한 대부분 나라들이 미군장비를 착용하고 전투에 임했다.

 

 

 태국

 
연천 지역 방어(1951. 7. 31 ~ 9. 7)
태국은 1개 대대 병력을 한국에 파병했고, 이 태국 대대는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되어 1951년 7월 31일부터 9월 7일 까지 연천 북방 율동 지역을 방어하였다. 이 기간 중 태국 대대는 주저항선 전방에서 강행정찰작전을 실시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8월 18일에 실시한 정찰에서는 2개 중대 규모의 중공군부대를 발견하고 이를 기습하여 전과를 올렸다.

 

포크찹 고지 전투(1952. 11. 1 ~ 11)
태국 대대는 다시 미 제2사단에 배속되어 연천 서북방 주저항선을 방어하는 임무에 투입되었다. 여기서 태국 대대는 중공군 2개 연대와 전투를 치른다. 중공군은 1952년 11월 1일, 11월 7일, 11월 10일 야간에 공격 준비사격으로 포크찹 고지의 방어시설물을 파괴한 다음, 대대규모의 병력을 고지에 돌입시킨다. 총 3회의 공격동안 태국 대대는 연대 및 사단의 지원화력을 이용하여 중공군을 저지시켰으며, 돌격하는 중공군을 백병전으로 물리쳐 세 번 다 이 전초고지를 지탱하였다. 이 전투를 통하여, 캐국 대대는 그 용감성을 인정받아 ‘작은 호랑이'라는 별칭까지 얻었으며, 중공군과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UN군에게 심어 주게 되었다.


 

미 제 2사단에 배속된 태국군의 모습이다. 역시 미군과 동일한 장비를 갖추고 있다.

 

 

 그리스

 
이천 381 고지 전투(1951. 1. 29 ~ 30)
그리스 역시 1개 대대를 한국에 파병하였는데, 이 그리스 대대는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되어 중공군 제112사단 제334연대와 전투를 치른다. 그리스 대대가 최초로 중공군과 싸운 전투이다. 그리스 대대는 이천에 위치한 381고지 일대에서 중공군의 야간 기습을 받는다. 중공군은 그리스 대대 정면에서 가장 중요한 고지인 381고지를 3차에 걸쳐 공격하였으나, 그리스 대대는 조명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포병지원사격으로 공격부대를 제압하는 한편, 근접전투를 전개하여 이들을 격퇴하고 381고지를 방어하였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 대대는 적은 손실로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그리스 대대의 전투력이 높이 평가되었으며 장병들은 중공군과의 전투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6·25 전쟁에 참가한 그리스군의 모습. 그리스와 터키가 앙숙이기는 하지만 같은 UN군에서 싸웠다. 물론 UN군 지휘부도 이러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이들을 같은 사단소속으로 작전에 투입되게 는 않았다. 통상 터키여단은 중동부전선에, 그리스 대대는 중서부전선에 배치되었다 .

 

 

 벨기에 및 룩셈부르크

 
금굴산 전투(1951. 4. 22 ~ 25)
이 전투는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가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 기간 중, 중공군 제188사단과 치른 전투이다. 이 대대는 영연방 제29여단에 배속되어 임진강 북방의 돌출된 금굴산을 방어하고 있던 중,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직면하게 된다. 그 지역이 중공군에게 점령당할 경우에는 전곡-연천-철원 축선의 도로가 차단되어 철수하는 UN군부대 전체가  포위될 상황에 이르게 되므로,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는 UN군이 철수를 완료할 때까지 그 진지를 고수하여야만 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이 사단병력을 투입하여 공격을 가했으나,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는 막대한 병력손실을 감수하면서도 끝내 진지를 고수하였다.

경기도 동두천시 소요산에 있는 벨기에 룩셈부르크군 참전 기념비.

이들은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인명손실을 입을 만큼 분투했다.

 

 

 콜롬비아

 
 180고지 전투(1953. 3. 10)
이 전투는 콜롬비아 대대가 연천 서북방 마거리에서 예비임무를 수행하던 중 주저항선 전방 500m 지점의 중공군 전초진지를 공격한 전투이다. 콜롬비아 대대 A 중대는 이날 새벽, 강력하게 편성된 중공군의 전초고지인 180고지에 은밀히 접근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콜롬비아 대대는 기습작전을 감행하였고, 중공군은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180고지는 콜롬비아 군에게 점령됐으나, 콜롬비아군은 막대한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A중대는 180고지를 점령한 후, 그들의 방어시설을 파괴하고 철수하였다.

6·25 전쟁에서 콜롬비아군의 모습. 역시 미제 장비들로 무장하고 있다.

 

 

 

 에디오피아

 
  요크/엉클고지 전투(1953. 5. 19 ~ 20)

이 전투는 에티오피아 대대가 6·25전쟁 말기에 연천 북방 천덕산(477고지) 전방의 주저항선을 방어하던 중, 그 전초고지인 요크/엉클 고지에서 중공군 제23사단과 치른 전투이다. 에티오피아 대대는 5월 19일과 20일 야간에 대대규모 중공군의 공격으로 한 때 주진지 일부가 돌파되었으나, UN군의 포병 화력지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해 백병전으로 중공군을 격퇴하여 진지를 회복하였다.

 

6·25 전쟁에서 에티오피아군의 모습. 6·25전쟁이 발발하자 아프리카에서는 남아공과 에티오피아 군이 파병되었는데, 남아공 군이 영 연방소속인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유일한 아프리카 파병군 이었다.

 

<글,사진 : 이세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