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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작전명령 제174호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던 국가의 운명에 분연히 일어섰던 학도병들, 그리고 같은 날 벌어진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해 그간 알려지지 못했던 그날의 잊혀진 전사, 장사 상륙작전의 비사(秘史)가 공개된다.











1950년 9월, 국군과 유엔군은 계속 되는 후퇴를 멈추고 기적과도 같은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한다.




[사진설명.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맥아더 장군]




인천 상륙작전에는 수백척의 연합군 함대, 미 10군단과 대한민국 해병대 병력 등 아군이 투입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이 투입 되었고, 약 5천 대 1이라는 도박과도 같은 이 작전은 성공 한다.



[사진.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 상륙함 모습]




그러나, 인천 상륙작전과 같은 날 감행된 또 하나의 상륙작전이 있었다. 이 작전은 ‘도박’이라는 수식어도, 수백척의 군함도, 엄청난 화력지원도, 수천 수만의 병력도 없었다. 여기에는 낡은 상륙함 1척과 호위함 1척, 그리고 이제 막 총 쏘는 것을 배운 772명의 학도병이 있었을 뿐이다.




[사진. 작전명령 제174호의 내용]






작전명 174호, 장사 상륙작전이다.


당시 전선은 낙동강으로 교착 된 상태.

국군과 유엔군은 비밀리에 인천을 통한 반격작전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7번 국도를 타고 내려가는 포항 지역은 여전히 북한군 2개 사단의 파상 공세로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포항지역을 사수하고 7번국도를 통한 적의 보급을 차단하기 위한 결단을 내린다.






소수의 군인들과 772명의 학도병으로 구성된 상륙전 부대를 보내기로 한 것.

그리고 마침내 1950년 9월 15일 새벽 그들을 실은 상륙함 문산호는 포항 장사리 해변 앞바다에 도착하지만, 때아닌 폭풍으로 배는 좌초되고, 상륙을 시도한 학도병들은 적의 기관총 공격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져만 가는데...




[사진. 좌초된 상륙함 문산함의 모습]





결과적으로 장사 상륙작전을 통해 학도병들은 7번 국도의 거점 두 곳을 확보하는데 성공, 북한군의 시설을 분산시키는 성과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작전성공 직후부터 시작된 북한군의 반격공세와 굶주림에 학도병들은 하나둘 쓰러져 가고, 급기야 이들을 구하기 위해 장사해변에 도착한 구조함인 조치원함 역시 학도병 모두를 태우지 못하고 적들의 반격 속에 많은 수의 학도병을 둔 채로 출발할 수 밖에 없었다.




[사진. 구조함 조치원함의 모습]




65년이 지난 현재, 장사 상륙작전에 대해서는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 혹은 북한군 기만작전 등 다양한 해석이 쏟아졌다. 하지만 당시 인천상륙작전은 가장 높은 수준의 비밀에 의해 시행된 작전으로 작전에 참가한 병사들 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진행된 작전이었다.

즉, 장사 상륙작전은 유엔군 예하에서 유엔군 사령부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작전이 아닌, 전황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육군본부가 작전명령 제174호에 의해 독자적으로 수행한 작전이었다. 또한, 낙동강 방어선에서 더 이상의 후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수사불패의 정신하에 우리 청년 학동병들이 만들어낸 성과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사진. 장사해수욕장 내에 위치한 장사상륙작전 전몰용사 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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