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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이세환 기자의 밀친] 전쟁과 기상




전쟁과 기상, 그리고 날씨




보통 전쟁이나 전투에서의 승리라고 하면 압도적인 병력의 수, 우수한 장비, 유능한 지휘관등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전장의 상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변화무쌍하며, 전략이나 전술 이외의 요소에서 승패가 갈리는 경우도 많다. 특히 기상이나 날씨는 때로는 전쟁의 양상 전체를 뒤엎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오늘은 세계 기상의 날을 맞아 날씨와 기상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전쟁과 전투에 대해 알아보겠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1805년,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을 물리치며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륙을 장악했다. 나폴레옹은 유럽 제패의 걸림돌인 영국을 견제하기위해 대륙 봉쇄령을 내렸다. 그러나 러시아는 영국에 대한 농산물 수출의 길이 막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할 수 없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1810년 대륙체제에서의 탈퇴를 선언하고 영국과의 통상을 재개했다. 프랑스에게 그런 러시아는 적이었고, 이에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를 직접 응징하기로 결정했다. 이윽고 1812년,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 프랑스군은 폭염 속에서 러시아로 진군했지만, 러시아군은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꾸준히 프랑스군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질병과 탈영으로 크게 감소했지만, 모스크바점령에는 성공한다. 그러나 문제는 러시아군이 아직 완전히 궤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러시아인들은 적에게 모스크바를 내줄 바엔 도시를 완전히 불태워버리기로 했다. 많은 나폴레옹의 참모들이 즉시 모스크바를 빠져나가자고 했지만, 17세기 초반  폴란드와 카자크인 이후에 나폴레옹은 200년 만에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정복한 정복자로써의 자존심을 잃고 싶지 않아했다. 하지만 10월이 되자 유독 러시아 특유의 혹한이 일찍 찾아왔고, 굶주림과 추위에 떨던 병사들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10월 19일, 전면 철수를 하기로 결정한다. 11월 초가 되자 겨울은 갑자기 찾아왔다. 기온은 영하 20도 밑으로 떨어졌고, 막대한 전리품과 식량을 싣고 가던 말들이 먼저 지치기 시작했다. 겨울에 전혀 대비가 없었던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전리품과 식량을 버리며 후퇴했다.



절망의 후퇴를 하고 있는 프랑스군 병사들의 삽화. 제대단위도 없이 민간인들과 섞여 무질서한 모습이다.


러시아군의 산발적 공격과 추운 날씨, 거기다 식량문제까지 겹쳐 프랑스군 진영에서는 영양실조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말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버렸다. 재앙이 시작된 것 이었다. 11월 중순이 되자 애초 60만 대군은 10만 4천명으로 줄어있었고, 나머지는 사망하거나 탈영했다. 낙오자들의 일부는 러시아군의 전문 추격부대인 코사크기병에 의해 그야말로 도륙 되었다. 12월이 되자 상황은 더욱 절망적이었다. 기온은 영하 40도 가까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름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던 프랑스 병사들은 칼바람이 뼈 속까지 파고들고, 눈꺼풀이 얼어붙었으며, 손가락은 방아쇠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러시아를 향해 밀려들어간 60만 명의 병력 중 단 3만 명만이 돌아왔다. 이로써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제국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영국이 워털루전투에서 승리한 1815년, 프랑스의 국경은 1790년 이전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폴레옹시대의 종말이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실패는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러시아의 혹독한 기후는 분명 나폴레옹에게 치명적인 것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모스크바 공방전

130여년 만에 나치독일군은 나폴레옹의 전철을 밟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함께 전 유럽을 휩쓴 히틀러의 나치독일군은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깨고 전격적으로 침공하기에 이른다. 1941년 6월 22일부터 9월 말까지, 소련군은 무려 100만이 넘는 병력손실을 입으며 독일군의 전격전 칼날 앞에 무너져갔다. 10월이 되자 독일군 병사들은 멀리 크렘린궁의 첨탑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접근해 있었다. 하지만 10월 7일부터 비가내리기 시작했다. 이 비는 무려 보름간이나 이어졌고, 마치 우리나라의 장마 같은 모습을 보이며 모든 대지를 진창으로 만들었다. 모스크바를 공략하기위해 모인 무려 69개의 독일군사단들이 모스크바로 진격할 수 있는 루트는 단 3개뿐이었으나, 이 모든 도로들이 러시아특유의 가을장마로 인해 수렁으로 변했다. 독일군이 그토록 자랑하던 기계화 부대는 진창에서 꼼짝도 못했다.


진창에 빠진 독일군의 3호 전차. 러시아 특유의 가을장마에 독일군 기계화 부대는 꼼짝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겪었던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날씨가 독일군을 덮쳤다. 11월 중순부터 수은주가 급강하하면서 진흙바닥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잠시 독일군 기계화 부대는 진흙바닥을 모면하면서 기뻐했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곧 모든 차량의 냉각수가 얼어 터졌고, 심지어 엔진오일까지 얼어붙어 모든 기계화 장비가 사용 불능이 되었다. 장비뿐만이 아니었다. 나치독일군 수뇌부는 11월 전 까지 모스크바를 점령한다는 계획 하에 병사들에게 방한장비를 지급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는 크나큰 실수였다. 무려 12만의 동상 환자가 독일군에서 나왔고, 순식간에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이 상태에서 소련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었고, 독일군은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처음으로 대규모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이제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점령할 기회는 영원히 날아가 버렸고, 러시아의 동장군은 다시 한 번 위기의 순간에서 적을 물리쳤다.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포로가 된 독일군 병사들. 이들은 대부분 하계용 전투복을 입고 혹한의 날씨에서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


장진호 전투

현대전에서 벌어진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3대 동계 전투는 2차 대전당시 벌어진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6·25 당시 장진호 전투가 꼽힌다. 장진호 전투는 또한 가장 성공적인 철수 사례로 꼽히는 전투임과 동시에 미국 해병대 창설 이후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된다. 미국은 북한이 평양을 잃고 피신해 임시수도로 정한 강계를 공격하기 위해 장진호 방면으로 미 해병 제 1사단 1만 2천여 명을 전진시켜 주둔시켰고, 미 육군이 그들을 지원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이 임무를 맡은 것이 미군 제 10군단이었고 전체 병력규모는 10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공군은 계속해서 미군에게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경고를 하고 있었으나, 미군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예상과 달리 중공군이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미군이 중공군을 지나치게 얕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당시 미군 사령관들이 추측했던 중공군의 규모는 약 3만 5천 명 정도였지만, 실제 들어와 있던 중공군의 수는 무려 30만 명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미 제10군단의 일부 부대에는 차출 명령이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미군 지휘부의 오판이 재앙을 초래했다. 바로 중공군 포로가 실토한 정보인, 대군이 산 속에 숨어 있다가 일거에 포위한다는 작전을 무시한 것이다. 그리고 예정된 재앙은 서서히 10군단을 덮치기 시작했다.
급기야 미 해병 1사단은 중공군의 포위망에 제대로 걸려들었다. 무려 중공군 6개 사단이 그들을 포위한 것이다. 더군다나 11월부터 몰아친 혹한은 미 해병대에게 지옥을 선사했다. 러시아 혹한이 무색한 영하 40도의 강추위는 이제껏 미 해병대가 경험해보지 못 한 추위였다. 대부분의 개인화기가 작동불능에 빠졌고, 기관총과 차량, 전차는 2시간에 한 번씩 작동해주지 않으면 얼어붙어 사용이 불가능 했다. 박격포 포판은 꽁꽁 얼어붙은 지면과 부딪혀 박살나기 일쑤였고, 심지어 수류탄마저 불발이 속출했다. 하지만 병사들의 고통은 이보다 더 심했다. 제대로 된 식사는 꿈도 못 꿨고, 용변을 보는 일은 차라리 고역에 가까웠다.  수혈용 혈액과 몰핀이 얼어붙어 의무병은 겨드랑이에는 수혈팩을 끼고 입안에는 몰핀을 물고 다녔다.



장진호 전투에서의 미 해병대 모습. 전투보다는 동상과 동사로 인한 사상자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미 해병은 중공군의 집요한 공격을 버티어내며 철수를 완료하였고, 이는 역사상 가장 훌륭했던 철수작전으로 기록되었다. 비록 4천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중공군은 무려 2만이 넘는 병력손실을 입어 미 제 10군단에 대한 공세를 멈춰야만 했다. 그리고 이 덕분에 흥남철수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 6.25 전쟁 중 미군의 명예훈장 수훈자는 131명, 그 중 13명이 장진호 전투의 생존자였다.
장진호전투 당시 종군기자가 한 해병 대원에게 물었다. ‘크리스마스에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병사는 대답했다. ‘내일을 달라’
또한 장진호 전투는 미군으로 하여금 M-51 신형 방한복을 병사들에게 지급하는 계기가 되었다
.




미군의 신형 M-51 파카의 모습. 장진호 전투의 뼈아픈 교훈을 반영한 방한복이다.


발지전투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던 독일군은 점차 전열을 가다듬고 연합군에게 야무진 저항을 하고 있었다. 특히 독일군의 서부방벽 지그프리트라인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휘르트겐’ 숲에서 미군은 무려 2만 4천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9천명의 전장 공포증 환자가 나올 정도였다. 이미 끝난 것 같았던 독일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두 달 만에 실로 기적처럼 되살아났고, 후퇴 할 때조차도 연합군에게 최대한의 손실을 안겨준 후에 질서 정연하게 철수하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군 병사들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전투가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면 과연 크리스마스 때 까지 전쟁이 끝날 수 있을까? 아니, 그 때까지 살아있기나 할까?’




독일군의 신형 쾨니히스 티이거전차. 연합군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사실상 이 전자에 맞설 수 있는 연합군 전차는 없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서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발지’ 작전이다. 발지는 특정 지명이 아니라 영어로 ‘돌출부(Bulge)’라는 뜻이다. 1943년 이후, 모든 전선에서 도망가기 바빴던 독일군이 연합군의 ‘돌출부’를 없애는 반격을 계획 한 것이었다. 최초 독일군은 반격의 시기를 11월로 잡았으나 이를 몇 차례 연기했다. 물론 비밀리에 준비하는 이유 때문에 준비 상황이 더딘 이유도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연합군의 항공세력 때문이었다. 독일군 병사들 사이에서 이른바 ‘야보’로 불리는 연합군 전폭기들은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제공권이 완전히 연합군에 넘어간 이 시점에서 단 한 대의 독일군 차량만 보여도 5~6대의 연합군 항공기가 달려드는 상황은 이제 일상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독일군은 어떻게 해서든 연합군의 항공세력을 봉쇄해야만 했고, 바로 그 열쇠는 기상에 있었다. 독일군 기상대는 12월 초에서 중순 사이 짙은 안개와 악천후가 올 것이라는 예측하고 이를 사령부에 보고했다. 이윽고 기상이 나빠지기 시작한 1944년 12월 16일, 독일군은 전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에 대한 반격을 개시했다. 특히 신형 ‘쾨니히스 티이거’전차는 연합군 전차병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곧 연합군 병사들은 충격과 공포 속에 빠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독일군 보급선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전열을 가다듬은 연합군도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2월 23일부터 거짓말처럼 활짝 날씨가 개었다. 이 때부터 무려 1,000대의 연합군 전폭기가 날아올라 독일군 사냥에 나섰으며, 결국 독일군의 반격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이 후 독일군은 더 이상의 대규모작전은 감행하지 못 한 채 서부전선의 붕괴를 맞이하게 된다.


날이 개자 연합군 전폭기가 벌떼 같이 날아올라 독일군을 사냥했다. 기상상태의 호전은 연합군 승리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인천상륙작전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시작됐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에 밀려 7월 말 미군과 한국군은 부산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좁은 장소로 몰렸다. 유엔군은 포위됐다. 삼면이 적으로 싸였고 후면은 바다였으며, 북한군은 집요하게 공격을 계속했다. 유엔군의 병력은 계속 충원됐지만 북한군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급급했다. 무언가 전쟁의 양상을 바꿀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맥아더 장군은 교착상태에 빠진 전세를 뒤집기 위해 후방지역인 인천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계획하게 된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주장하자 미국의 군부는 온통 반대에 나섰다. 특히 미군 기상대가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인천에서의 조수간만의 차는 10m로 세계적으로 가장 큰 지역이며, 하루에 두 번 발생하고 조류의 속도는 상륙주정의 최고 속도와 비슷했다. 이는 상륙지 조건으로써는 최악이란 의미였다. 더군다나 썰물 때 인천은 해변으로부터 5,500m나 바다 쪽으로 뻗는 평평한 벌판을 드러내는데, 벌판은 작전하기에 부적합한 갯벌로 이뤄져 있었다. 과거 미군은 2차 대전 당시 지상최대의 작전이라고 일컫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한바 있었다. 노르망디 역시 조수간만의 차가 심했고, 잦은 폭풍과 안개, 악천후로 상륙작전에 매우 부적합한 곳 이었다. 하지만 미군 기상대는 과거 10년간의 기상기록을 바탕으로 상륙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날씨가 돌아올 확률을 계산해냈고, 이를 바탕으로 가까스로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많은 연합군 참모들은 다시 한 번 이런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반대하는 장군들을 설득했다.


“인천이 갖고 있는 이런 약점들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북한군은 우리가 인천에 상륙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허를 찌를 수 있는 이점이 있지요. 인천에서 동쪽으로 40㎞ 떨어진 곳에 한국의 수도인 서울이 있습니다. 서울은 북한군의 수송과 통신의 중심지입니다. 작전이 성공한다면 남북으로 이어진 보급라인을 차단해 낙동강 지역의 북한군을 지리멸렬하게 만들 수 있으며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또 서울 수복이 한국인에게 주는 심리적인 효과도 매우 큽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입안자인 맥아더 장군. 그의 날카로운 판단력과 유능한 참모들이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맥아더의 확신에 찬 주장에 8월 28일 미 합참은 인천상륙작전을 승인했다. 이번에도 미군 기상대가 활약했다. 미군 기상대의 계산에 따라 조수간만을 참조한 D-day는 9월 15일로 정해졌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속이기 위해 기만작전을 실시했다. 9월 12일, 미 육군 코만도 부대와 영국 해병 코만도 부대가 군산 해변 상륙 후 위력수색을 실시했다. 9월 13일에는 미국과 영국의 전함들이 진남포·삼척·원산 일대에 공격준비사격을 했다. 군산 지역에 대한 공중 맹폭격도 이뤄졌다. 이러한 기만작전 덕분에 북한군은 끝까지 연합군이 군산으로 상륙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번에도 역시 날씨가 말썽을 부리고 있었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9월 초 태풍 제인의 영향으로 일본 고베에 정박하고 있던 상륙함대의 배 7척이 파괴된 바 있었다. 미 공군 기상대는 9월 7일 두 번째 태풍 케지아(Kezia)가 마리아나 해협에서 일본 쪽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중심최대풍속 125노트인 특급 태풍이었다. 태풍 케지아는 인천상륙작전 전체를 침몰시킬 수 있었다. 미 공군기상대는 태풍이 9월 12일에서 13일 사이에 대한해협을 통과할 것으로 예상했다. 기상대는 미리 함대가 출항해 인천 쪽으로 진행하면 태풍의 좌측반원에 들어가므로 항해가 가능하다고 조언했다. 기상장교의 건의를 받은 맥아더는 일본에 있던 전 함대를 9월 11일 인천으로 향해 진군하도록 명령했다. 미 공군기상대의 일기예보는 정확했고, 거친 바다에 시달렸지만 함대는 예정대로 인천에 도착했다. 9월 15일 새벽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막을 올렸다. 상륙에 성공한 유엔군은 뛰어난 용맹성으로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한 뛰어난 장군의 리더십과 정확한 기상 예측이 13일 만에 6·25전쟁의 양상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것이다.


상륙지점으로 향하는 상륙주정의 대군. 태풍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미군 기상대의 정확한 예측이 승리의 열쇠가 되었다.


사막의 폭풍작전

1990년 8월 이라크의 후세인은 21개 사단을 동원하여 쿠웨이트를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이에 미국을 포함한 다국적군은 이라크를 응징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바로 ‘사막의 폭풍작전’이다. 걸프전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쟁은 항공력이 군사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결정적 요소임을 잘 보여주었다. 무려 39일간의 항공작전이 실시되었는데, 이라크 지역은 사막폭풍 등 기상변화가 항공작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곳 이었다. 따라서 다국적군 수뇌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공군전략사령부에 기상예보센터를 설치하여 중동지역에 대한 기상정보 수집과 분석에 착수한 것이었다. 예보센터 설치 후 약 1주일 만에 수퍼 컴퓨터를 이용한 걸프지역의 기상예보 모델이 운영되면서 군용기의 항로지원이나 작전수행, 작전계획 수립에 활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군은 각종 기상위성 자료 분석, 수치예보 모델 운영 등을 통한 최신 예보기법을 선보였다.
91년 1월17일 공중폭격이 시작되면서 ‘사막의 폭풍작전’의 막이 올랐다. 다국적군은 공중작전을 통해 이라크 공군기를 100여대 파괴함으로써 제공권을 획득하였고, 화생방 무기 생산시설 등과 중요 군수시설, 발전설비를 파괴함으로써 이라크의 작전 능력을 크게 저하시켜 버렸다. 또 지상전 시작 전에 전차 1700대, 장갑차 925대, 야포 1485문을 파괴하여 이라크 육군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다국적군의 39일간 공중공습에 이은 4일간의 지상 작전에 이라크는 결국 두 손을 높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라크는 연중 기압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을 때가 겨울이므로 1월에도 날씨가 흐린 날이 많다. 그러나 작전이 시작되었던 1991년 1월은 구름의 양이 40%에 이를 정도로 14년만의 최악의 날씨를 보였다. 이런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만반의 준비를 갖춘 기상부대는 항로예보, 작전지역예보, 특수예보 등으로 각종 작전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쿠웨이트의 유전 폭발로 연기가 작전지역을 뒤덮자 수퍼 컴퓨터를 이용한 연기추적 시뮬레이션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걸프전은 현대전에서 기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높아진다는 사실을 잘 입증해 주었으며, 기상예보에 있어 첨단 장비와 기술 못지않게 기상전문가의 판단이 중요함을 보여주기도 한 전쟁이었다.


사막의 폭풍 작전 중 바스라 유전지대 상공을 편대비행 하는 미 공군 제4전투비행단 소속 F-16A, F-15E F-15C. 이라크군이 도망가면서 유전에 불을 지른 모습이 생생히 보인다. 다국적군의 항공작전에서 수퍼 컴퓨터를 이용한 기상정보는 승리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