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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6·25전쟁 당시 있었던 세계 최초 대규모 제트전투기 대결

미그앨리(MIG ALLEY)에서의 대결

F-86 세이버 vs. 미그15


6·25전쟁은 자칫 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위험이 있는 매우 위험한 전쟁이었다. 특히 미·소 대결의 가능성이 있었고, 실제로 스탈린은 미국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미·소의 대결은 결국 공중에서 이루어졌다. 세계 최초의 제트기 공중전이 한반도 상공에서 벌어진 것이다. 


배다른 형제, F-86 세이버와 미그15

2차 대전 말기, 나치독일은 여러 가지 신무기를 개발해놓은 상태였고, 특히 제트전투기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백 대씩 몰려오는 연합군 폭격기를 요격하자면 기존의 항공기보다 빠르고 강력한 제트전투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이미 Me262란 제트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엔진의 수명이 지나치게 짧은 등의 여러 가지 성능상의 한계가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P.1101이란 새로운 개념의 제트전투기를 개발해 시제품이 나온 상태였다. 여러모로 P.1101은 혁신적인 전투기였다. 공기흡입구를 기수 전방으로 배치하고 강력한 제트엔진을 공기흡입구와 하나로 연결했으며, 무엇보다도 후퇴익을 채용해 고속 비행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 전투기를 투입해 볼 여유조차 없이 전쟁은 결국 독일의 패배로 끝났고, 이전투기의 시제품은 설계도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하지만 이 전투기의 설계도를 소련도 입수하게 되었으니, 미·소는 이 설계도와 시제품을 바탕으로 새로운 제트전투기를 제작하였고, 곧 이 배다른 형제들은 한반도의 상공에서 마주칠 운명에 놓이게 된다. 


세계 최초의 실용화 제트전투기 Me262. 등장당시 연합군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으나 성능상의 한계가 분명했기 때문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없었다.


조립 최종단계에서 발견된 독일의 P.1101. 여기서 이미 F-86이나 미그15의 실루엣이 보인다.



미그 쇼크!

6·25전쟁이 발발하고 연합군이 참전하자 제공권은 연합군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이 때 까지만 해도 미 해군과 해병대는 프로펠러기인 F4U-4 콜세어 전투기와 제트기인 F9F 팬서 전투기를 운용하였다. 미 공군 역시 F-80 슈팅스타, F-84 썬더제트 등의 제트기를 운용하고 있던 터라 제공권의 유지에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1950년 11월, 커다란 붉은 별을 달고 공산군의 제트전투기가 등장한다. 미 해군의 F9F 팬서는 물론, 공군의 F-80 슈팅스타와 F-84 썬더제트들도 이 공산군의 신형 제트기를 상대할 수조차 없었다. 미그15의 등장이자 미그 쇼크의 시작이었다. 특히 북한에 대한 폭격을 실시하던 B-29폭격기의 피해가 막심했다. 


미그15의 건 카메라에 잡힌 B-29의 모습. 미그15의 공격에 의해 B-29는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폭격임무가 전면 중지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미 공군은 서둘러 당시 최신형이었던 F-86 세이버를 전장에 투입했다. 이윽고 두 전투기들은 한반도 상공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양측의 조종사들은 아연실색한다. 두 기체의 모양이 너무도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크기의 차이가 약간 있었지만 이는 여러 대의 전투기가 엉켜있는 상황에선 무시해도 좋을 만큼의 차이였다. 난전 중엔 적기의 붉은 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양측모두 아군기의 뒤를 쫓는 경우도 허다했다. 더군다나 미그15 투입초기, 소련공군에서 비밀리에 파견된 조종사들이 미그15를 몰았기 때문에 그 실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F-86 세이버()와 미그15()의 비교사진. 크기만 약간 다를 뿐 실루엣이 너무나 흡사해 양측 파일럿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화려한 기체 마킹도 별 쓸모가 없었다.



미그앨리에서의 공중전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노련한 미군 조종사들이 미그15를 제압하기 시작하였다. 미그15는 요격전용 전투기로 만들었기 때문에 경쾌한 기동성을 자랑했으나, 제트기의 특성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한 소련 파일럿들은 미 공군의 상대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미군 조종사들은 G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G슈트란 전투기의 긴급 기동 시 조종사의 다리와 복부를 압박해 피가 하체로 쏠리는 것을 막아주어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는 것을 방지해 주었다. 덕분에 미군 조종사들은 미그15보다 더욱 가파른 각도로 비행할 수 있었고, 이는 공중전에서 매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공산군측은 압록강 너머 만주에 기지를 두고 미그기들을 출격시켰다. 당시 미 공군의 전투기들은 조중 국경을 넘어 추격하는 일이 금지되어 있었다. 사실 이에 대해 맥아더는 허가를 거듭 요청했지만, 트루먼은 확전의 우려 때문에 허가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심지어 만주의 중국공군기지를 폭격하려는 계획도 고려했고, 여기에는 원자탄 투하옵션까지 포함되었다. F-86과 미그15의 공중전은 주로 미그 앨리(MiG-alley)라고 불리던, 개마고원과 평안북도, 함경북도 상공에서 벌어지는 일이 많았다. 제공권이 미군 측에 있었기 때문에 미그기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본거지에서만 출격했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미 공군은 꾸준히 이 미그앨리에서 미그기들을 소모시키는 전략을 썼다.


미그앨리를 표시한 지도. 공산군의 미그15들은 만주에서 출격하며 미그앨리라고 불리는 압록강지역에서만 출몰했다.


특히 1951년 봄부터 새로 투입된 F-86에는 신형 레이더 조준장치가 탑재되어 조종사들은 더욱 효율적으로 미그기와의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공산군측 파일럿의 숙련도는 기대 이상이었다. 미 공군의 경우 세이버와 같은 고성능 제트 전투기를 몰고 전투에 투입될 정도의 조종사라면 최소한 수개월간의 고등 비행 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에, 미 공군은 사실상 소련이 이런 최신예 전투기를 비행 훈련이 부족한 풋내기 중국 조종사들이나 북한 조종사들에게 맡길 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투 지역에서 감청된 공산군측의 무선에는 러시아어가 간간히 잡혔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전투에 참가하고 있는 대부분의 미그기들은 이 기종으로 몇 개월 이상 훈련을 받은 소련 조종사들이 탑승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그렇다면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만일 소련공군이 공식적으로 6·25전쟁에 개입하여 미 공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상황에 따라서 2차 대전이 끝난 후 치열한 이념대결을 벌이고 있는 세계의 양대 초강대국간의 전면적인 군사적 대결로까지 비화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제트전투기 최초의 에이스파일럿 제임스 자바라 중령. 그는 총 15기의 미그기를 격추시켜 6·25전쟁에서 미 공군 격추순위 2위의 자리에 올랐다.


아무튼 소규모 편대간의 간헐적인 전투가 있었지만 미그앨리에서 대규모 공중전은 흔치 않았다. 그러던 1951520, 미 공군의 2개 편대인 16대의 F-86 전투기가 미그앨리로 향했다. 이 편대의 선두에 있었던 제임스 자바라는 이제까지 4기의 미그15를 격추해 에이스 등극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순간, 갑자기 미그앨리에 50대의 미그15 대군이 나타났다. 이제까지 보지 못 한 대규모의 미그기 집단이었다. 자바라는 연료탱크가 분리되지 않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2기의 미그15를 격추시켜 제트전투기 사상 최초의 에이스로 등극했다. 이 날 세이버 조종사들은 자바라의 2기 격추를 포함해 총 4기의 격추를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미그기의 사격에 피탄 된 기체가 몇 기 있었지만, 세이버의 손실은 없었다고 한다. 냉전 종식 이후에 발견된 소련측의 자료에 의하면 이날의 공중전에서 미그151기가 손실되고 최소한 3기의 세이버가 격추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비교적 정확한 미 공군의 손실 기록과는 일치하지 않아 이날 공중에서 벌어진 최정예 부대 간의 대결에서는 미 공군의 F-86 세이버 편대가 승리한 셈이었다. 이는 미 공군에게는 상당히 고무적인 것으로서 폭격기의 호위가 아닌 순수한 전투기끼리의 제공권 다툼에 있어서는 소련의 최고 조종사들과의 전투에서도 미 공군 조종사들이 여전히 우위에 있음을 과시한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충격을 받은 듯 미그기들은 이후 10여 일 동안 상공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자바라는 2주 뒤 한국에서의 복무를 마무리하고 귀국했다. 그에게는 역사상 최초의 제트에이스라는 영광이 있었다. 그러나 자바라는 동료들과 함께 싸운 한국하늘을 잊지 못했으며 1년 반이 지난 19513월 다시 한국으로 복귀해서 미그앨리로 날아올랐다. 그의 최종 격추기록은 15기로서 이는 6·25전쟁 최고의 미군 에이스 제임스 맥코넬의 16기에 이은 2위의 위치였다


북한군 미그기 조종사 귀순작전이후 최초로 노금석 상위가 조종해 귀순한 미그 15bis의 모습. 사진은 아군기의 오인을 피하기 위해 미 공군 마킹과 도색이 칠해진 뒤에 촬영한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북한군 미그기 조종사의 귀순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공산군 파일럿들에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미군은 분명 미그기를 철저히 조사할 것이고, 이는 세이버의 성능적 개량과 함께 미군 조종사들의 전술적 개량으로 이어질 것이 자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자칫 미그15와 소련군 파일럿이 대규모로 희생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결국 이로 말미암아 소련의 파일럿들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 빈자리를 훈련도가 낮은 중국과 북한의 조종사들이 대체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는 거의 일방적인 공중전이 전개 되었다. 미그15에 대한 F-86의 우세가 더욱 공고해진 것이다. 이 이후로도 미그앨리에서의 공중전은 심심치 않게 일어났고, 항상 미 공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전쟁 종결 후 양측의 교환 비는 10:1로 압도적인 미 공군의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