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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년] 이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사죄 못 받은 우리는 식민지배 중

애매하지 않은 명확한 표현으로

가혹행위 사죄해야 눈감을 것 같아

 

 미국 애리조나주에 거주하던 위안부(일본군 강제 성노예) 피해자 박유년 할머니가 지난 8일 새벽 향년 93세로 별세했다. 올해에만 여덟 분이 가슴의 한을 풀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일제에 의해 성적(性的) 희생을 강요당했던 할머니들이 노환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있다.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가운데 생존자는 이제 47명에 불과하다.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옥선(88) 할머니를 만나 ‘작은 소망’을 들어봤다.

 

 

지난 10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쉼터인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 이옥선 할머니가 강제로 끌려갔던 중국 위안소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하던 중 생각에 잠겨 있다. 한재호 기자


 

 

 


 # 중대한 범죄에 대한 법적 책임 지기를

 이옥선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은 고민의 연속이었다. 다시는 머릿속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을 끄집어내는 것은 고통과 괴로움의 재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할머니는 우려와 달리 반갑게 맞아주셨다.

 이 할머니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소망은 두 가지라고 말했다. 진심 어린 사죄와 명예회복 차원의 법적 배상이다.

 “광복 70주년이라고 난리지만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법적 배상이 없는 현재를 살아가는 나와 같은 피해자들은 여전히 식민지배를 당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들이 저지른 가혹행위를 애매하지 않은, 명확한 표현으로 사죄해야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아. 늙은이가 돈에 눈이 멀어 배상하라고 하겠어? 단순히 ‘보상금’을 받자는 게 아니야. 중대한 범죄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라는 거지.”

 이 할머니는 1927년 10월 10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가지 못한 그에게 학교도 보내주고 밥도 마음껏 먹여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 말에 속아 부산진역 앞 우동가게에 수양딸로 들어갔다. 하지만 주인은 학교를 보내주기는커녕 온갖 허드렛일에 술접대까지 시키다가 울산의 한 기생집에 이 할머니를 팔아넘겼다. 그리고 42년 7월 어느 날. 심부름을 다녀오던 길에 강제로 납치돼 중국으로 끌려갔다. 그때 나이 16살이었다.

 “트럭에 태워졌는데 내려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더니 입을 틀어막더라고. 여자만 대여섯 있었고 기차역으로 갔지. 처음엔 중국을 가는지 일본을 가는지 아무도 모르는 거야. 중국 도문(圖們 : 중국 길림성 동쪽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는 도시)에 도착해서도 중국인 줄 몰랐으니까.”

 

 

나눔의 집 앞마당에 세워진 ‘못다 핀 꽃’ 소녀상과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흉상.


 

 

 


 # 꿈에 그리던 고향땅 58년 만에 밟아

 이 할머니는 일본군 비행장 확장공사에 동원돼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일본군 장교가 집에 보내주겠다며 속여 지린성의 일본군 위안소로 끌고 갔다. 견디다 못해 수차례 탈출을 시도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지막지한 구타였다. 심지어는 칼로 배를 찌르기까지 했다.

 “강제연행이 없었다? 나이 어린 철부지를 그렇게 끌고 갔는데, 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도 언제까지 거짓말을 할지 답답할 뿐이야. 내가 제 발로 생지옥을 갔겠어?”

 이 할머니는 종전을 앞두고 만주 지역의 전황이 격렬해지자 일본인들의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피란을 다니다 산속에서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꿈에 그리던 고향땅을 밟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할머니는 19세에 결혼해 중국 팔도진(八道鎭)에 정착했다. 군대 간 남편이 10년 동안 돌아오지 않자 29세에 재혼해 전처의 아들 내외와 함께 살았다. 70세를 훌쩍 넘긴 지난 2000년 5월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58년 만에 영구 귀국했지만 사망신고가 돼 있었다. 다음해에 국적을 되찾았다.

 “피해를 회복하지 못한 채, 심신에 상처만 남긴 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지. 우리는 이제 생이 얼마 남지 않았어. 일본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거지. 지금이라도 사죄하고, 응분의 대가를 치르는 게 당연한 이치지. 내 생각이 틀린 거야?”

 이 할머니는 2002년부터 나눔의 집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미국·일본 등 전 세계를 돌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참상을 증언하고,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 할머니는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보내신다고 했다. TV를 보면서 뜨개질을 하고, 화투패로 점을 치기도 한다. 이 할머니는 어릴 때 못 배운 게 한이 돼 배움에 대한 열정이 많다. 지금도 한글을 잊지 않기 위해 틈틈이 책을 읽으신다.

 “일본정부는 바른 대로 말을 해야 해. 우리 명예와 권리를 그렇게 짓밟아 놓고 위안소를 민간업자가 만들었다니. 천벌을 받을 소리지. 사실을 왜곡하면 되겠어? 이제라도 진심으로 사죄하고 내가, 우리가 당한 역사를 일본 교과서에 기록해 주기를 바랄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