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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년] 그녀들의 용맹했던 투쟁 이야기는 제대로 풀어놓지도 못했다

日 경찰서에 폭탄 던진 임신부…조선 총독 암살 기도한 여성

‘안사람 의병단’부터 ‘호수돈 비밀결사대’까지 조직도 다양

유관순 열사 외에 수많은 여성 항일투사들 업적 되새겨야

 

 

유관순


 

 

 

   <불굴의 여성독립운동>

 

 “한낱 어제의 이름으로 그들을 두고자 하지 않습니다. 오늘 여기서 그들과 함께하고자 합니다. 더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광복 70주년을 맞아 지난 1일부터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돌아온 이름들’의 안내지에 적혀 있는 문구다. 이번 전시에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쓰인 12폭 대형 천이 ‘9옥사’ 벽면에 설치돼 있다. 바람에 소리를 내며 펄럭이는 대형 천은 그날의 치열했던 항일투쟁 이야기를 토해내는 듯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일제강점기 내내 치열하게 투쟁했지만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광복 70주년, 3·1운동 96주년인 2015년. 어머니로, 며느리로, 여성으로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가는 여성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해 본다.

 

 

정정화


 


 ●잊혀가는 248명의 여성 독립운동가

 국가보훈처가 올해 1월 밝힌 자료에 따르면 전체 독립유공자 1만3744명 중 여성 참여자로 등록된 대상자는 1931명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248명만이 독립활동을 인정받고 있어 전체의 1.8%에 그치고 있다. 이는 자료 미비나 기준 미달, 행적 미상 등으로 다수가 선정 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비록 공식적으로 인정되지는 못했으나 248명 이외에 수많은 여성이 독립을 위해 싸웠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의병활동부터 3·1운동, 국내 항일, 의열투쟁, 학생운동, 광복군 활동 등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의 전 분야에서 남성들 못지않게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들은 3·1운동을 비롯해 학생·문화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특히 3·1운동을 기점으로 지역·계층 간 소통에 기초해 항일 구국투쟁을 실천한 주역이었다. 이처럼 양반·지식인·학생·노인에 이르기까지 계층을 뛰어넘는 여성의 행보는 주목되는 부분이다.

 시골 아낙네들이 주축이 된 ‘안사람 의병단’부터 ‘호수돈 비밀결사대’까지 여러 조직이 있었으며 일본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임신부, 조선총독 암살에 나선 여성 투사와 기생도 있었다.

 여성단체 중 1920년 이전에 설립된 송죽회·애국부인회·상해 애국부인회·대한민국 애국부인회 등은 3·1 만세운동에서 활약한 여성 독립운동가가 주역이 된 단체였다. 또한 1920년 이후 근우회 등 많은 단체가 외부적으로는 사회활동단체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여성 단체였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지를 국내외로 구분해 보면 국내 66%, 국외 34%이며 주된 활동지역은 국내(163명), 중국(72명), 미국(10명), 러시아 (1명) 순이다.

 

기사사진과 설명

오광심


 

 

 


 ●여성독립운동의 근간이 된 교육

 1900년 이전 사립 여학교가 최초로 설립되면서 전국적으로 여성교육기관이 확산되고 교육열은 여성 주체의식과 항일의식을 형성하게 했다. 즉 여성의 교육이 독립운동 참여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 그 영향은 1886년부터 광복 이전인 1945년까지 설립된 여성교육기관의 개교에서 알 수 있다. 1886년부터 광복 전까지 전국에 설립된 교육기관은 사립 여학교 149개, 공립 여학교가 56개였다. 또 여성단체는 64개에 이르렀다. 여학교의 개교는 교육목적을 반영한 여성 지식인의 양산을 넘어서 독립활동의 주역인 여성 독립운동가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교육을 통해 여성들은 사회 일선에서 애국계몽운동과 문명퇴치운동에 앞장서며 구국 의지를 실천하는 주역으로 거듭났다.

 

기사사진과 설명

남자현


 

 

 


 ●남자 못지않은 열정으로 맹활약

 여성 독립운동가는 국내뿐 아니라 중국·미국·러시아 등 국경을 초월해 활동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각인돼 있는 이는 아우내 장터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 시위를 주도한 유관순 열사뿐이다. 하지만 유관순 외에도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이 우리 역사에 있다.

 일본군에게 남편을 잃은 남자현은 3·1운동 때 중국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약하며 12곳에 교회를 세우고 10개의 여성교육회를 조직해 독립운동과 여성계몽에 힘썼다. 1925년 국내로 잠입,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암살을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1932년 국제연맹 리턴조사단이 하얼빈에 도착하자 ‘조선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써서 끊어진 손가락과 함께 동봉해 전달하며 독립을 호소했다. 대한민국 첫 여자조종사인 권기옥은 평양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상하이 임시정부 활동, 중국군에서 10여 년간 복무하면서 항일투쟁을 했다. 

 독립운동가 김학규의 부인인 오광심은 만주에서 활동하며 1931년 조선혁명당에 가입했고, 1940년 이후에는 광복군에 입대해 선전활동 등을 담당하며 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김마리아는 정신여학교 교원으로 각지를 돌며 독립사상을 고취했고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회장, 상하이의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간부 등을 지냈다.

 윤희순은 ‘안사람 의병가’ 등을 창작 보급하며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이끌어내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이외에도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평남도청에 폭탄을 투척한 안경신과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밀사 역할을 한 정정화 등 많은 여성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며 활동했다.


 독립운동은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의 자유와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항거한 전 민족적 항일운동이자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외교적으로 국권을 상실하는 과정에서 전개된 구국운동은 민족의 역량 강화에 주목했던 애국계몽운동, 그리고 조국 광복에 이르기까지 민족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근대화의 흐름은 한국 여성의 의식개혁과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자각하게 되는 것과 동시에 독립운동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을 명확히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전통사회의 통념과 사회활동의 제약 속에서도 국경을 넘나들며 눈부신 활약을 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불굴의 정신으로 대한의 독립을 꿈꾸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낸 주인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