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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년] 고난·저항 머문 자리 시간마저 멈췄다

숱한 독립투사 투쟁·통곡의 기억에 ‘가슴 먹먹’

‘역사관’ 개관…자유·평화 수호 교육 현장으로

 

 

1908년 개소된 서대문형무소는 일제의 잔혹한 철권통치의 유산이자 독립투사들의 한이 서려있는 공간이다. 지금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이름이 바뀌어 우리의 아픈 역사를 후대에 전하는 교육의 장소로 탈바꿈했다. 처형당하거나 숨진 독립투사들의 시신을 몰래 반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구문(위)과 광복절을 앞두고 옥사에 걸린 대형 태극기(아래)는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서대문형무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제공


 

 

 

 

 온몸이 썩어 들어가는 ‘공포의 병’ 한센병에 걸린 이들을 격리시켜놓았던 작은 옥사. 그 옆으로 펼쳐진 언덕배기에서 내려다본 서대문형무소는 ‘판옵티콘’(원형감옥)이었다. 360도로 수감자들을 감시할 수 있는 중앙사를 중심으로 넓은 부지 안에 펼쳐진 형무소 곳곳에는 독립투사들의 한이 서려 있었다. 영국 공리주의 사상가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판옵티콘은 효율적인 구속을 위한 ‘근대식 감옥’의 표상이다. 판옵티콘 양식으로 지어진 서대문형무소는 절대권력에 대한 복종, 감시와 통제를 위한 지배도구라는 당시 일제의 목표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일제의 흔적이 고스란히…가슴 먹먹해지는 ‘기억의 공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51.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한이 서려있는 서대문형무소는 ‘기억의 공간’이다.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담장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시간은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눈앞에 펼쳐진 벽돌 건물. 억압과 고문, 살인의 기억이 머릿속으로 밀려오는 곳.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장소가 바로 이곳 서대문형무소다.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10월 21일 일제에 의해 개소됐다. 개소 당시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근대식 감옥으로 일제의 침략에 무력으로 맞섰던 의병들이 주로 수감됐다. 이후로는 3·1운동을 이끌었던 손병희 선생 등 민족대표 33인과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 안창호 선생, 유관순 열사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상상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서대문형무소 곳곳에는 우리 민족 최대의 수난과 저항이 남아있다. 보안과 청사 지하 퀴퀴한 취조실에는 물고문은 물론 손톱 찌르기 고문, 벽관 고문, 인두 고문 등 각종 고문의 흔적이 배어있다. 낡을 대로 낡은 옥사 나무문과 녹슨 쇠창살도 예전 모습 그대로다. 대화가 금지됐던 독립운동가들이 ‘타벽통보법’(벽을 두들겨 신호를 만드는 암호)으로 소통했던 벽도 세월의 흔적을 안은 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제의 흔적과 선조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서대문형무소는 둘러보는 것만으로 많은 힘이 들었다. 이곳에 갇힌 독립투사들의 한과 사연들이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기 때문이다. 천천히 건물을 옮겨다니다 연신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보게 됐다.


 ●시간이 멈춘 ‘단절의 공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광복 뒤로도 ‘서울구치소’ 등의 이름으로 기능을 유지하던 서대문형무소는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개관하면서 역사 의식과 자유·평화수호 정신을 키우는 교육현장으로 탈바꿈했다.

 일제의 철권통치를 상징하던 서대문형무소는 붉은 벽돌 담장으로 둘러쳐진 ‘단절의 공간’이기도 하다. 벽돌 담장 너머로는 아파트 단지가 둘러싸고 있다. 형무소 바로 옆, 푸른 잔디가 깔린 독립공원에는 8월의 햇살을 즐기러 나온 이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공포의 상징’이었던 서대문형무소와 시민들의 휴식을 위한 공원…. 이질감이 들었다.

 폭력과 억압, 처절한 투쟁이 뒤섞인 아픈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서대문형무소가 교육과 기록의 장소로 바뀐 지 17년. 오랜만에 이곳을 찾았다는 변종설(77) 씨는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왜정을 겪었는데 어릴 땐 ‘일본 순사’란 얘기만 들어도 울던 아이가 울음을 뚝 그쳤어요. 여기는 정말 무서운 곳인데…. 지금 와보니 젊은 친구들은 책으로만 봐서 그런지 웃고 사진도 찍고 그러네요.”

 변씨의 말처럼 이곳은 방학을 맞아 숙제를 하기 위해 찾아온 어린이·청소년들로 가득했다. 독립투사들이 죽기 전 부여안고 통곡을 했다는 ‘통곡의 미루나무’ 옆에서 인증샷을 찍는 아이들. 이들은 처절했던 과거를 어떻게 이해할까? 광복절을 앞두고 견학왔다는 홍이슬(17) 양은 이렇게 말했다. “정말 무서웠어요. 고문 받는 모습을 전시한 걸 보고 너무 끔찍했어요. 이곳에서 고문을 견디며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러워요.”

 형무소 곳곳에는 때 이른 잠자리들이 유유히 하늘을 날고 있었다. 옥사 곳곳을 누비는 아이들의 발걸음은 잠자리처럼 사뿐해 보였다. 70번째 광복절을 나흘 앞둔 8월 11일 오전 서대문형무소에서 바라본 풍경은 무겁고 또 가벼웠다.

 


 

※그땐 그랬던 것들이 지금은…

 

 일제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곳은 서대문형무소뿐만이 아니다. 전국 곳곳에는 아직 그 시절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상징적인 장소들이 있다. 특히 식민지배의 중심지였던 경성, 즉 서울에는 당시의 흔적들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경성역


 

 

 

문화역서울284


 

 

 

경성부청사


 

 

서울도서관?


 

 



●일제의 흔적,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일제의 대표적인 상징 건물 중 하나로 꼽히는 경성부청사는 근래까지 서울시청으로 이름을 바꾼 채 유지돼 왔다. 이 건물은 2008년까지 서울시청사 본관으로 쓰이다가 2012년 신청사 완공과 함께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도서관 1층 중앙홀과 외벽, 중앙계단은 초기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 정부는 시련을 잊지 않기 위해, 혹은 문화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일부 건물들을 유지하고 있다. 일제가 사법권을 빼앗아 전횡하던 장소인 경성재판소는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도 당시의 시대상을 볼 수 있는 전시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일제 수탈·야욕의 핵심 ‘경성역’, 지금은?

 일본-조선-만주로 이어지는 국제철도의 요충지였던 경성역은 단순한 역사(驛舍)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성역에서 단연 눈에 띄는 곳은 바로 한국 최초의 커피숍이자 양식당이었던 ‘그릴’이다. 이상의 소설 ‘날개’에 등장하는 것처럼 그릴은 당대 지식인들에겐 동경의 장소였다. 경성역은 대륙으로 뻗어나가려는 일제의 야욕을 한눈에 보여주는 장소이자 당시 최고의 문화수준을 자랑하던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경성역은 광복 뒤 서울역으로 이름을 바꿔 사용되다 2004년 새로운 민자역사를 신축한 뒤 폐쇄됐다. 하지만 2011년 복원공사를 마친 뒤 ‘문화역서울 284’란 이름으로 돌아왔다. 다양한 전시와 공연이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문화역서울 284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문화 플랫폼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