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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다녀와서~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민족의 아픔이 서려있는 곳

현재 독립문역 인근에 위치한 서대문형무소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으로서 일제강점기에 경성감옥이라는 명칭으로 준공되었다. 수용능력은 500명 정도이고 그 후 여러 차례 증축되면서 1912년 일제에 의해 서대문감옥으로,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불렸으며,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로 개칭되었다. 1961년 개정된 행형법(行刑法)에 따라 서울교도소가 되었으며 1967년 7월 7일부터 1987년 옥사를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할 때까지 서울구치소로 불리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시위관련자 1,600여 명을 포함해 3,000여 명이 수용된 것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에 허위·유관순·강우규 등 수많은 애국지사가 수감되었던 민족수난의 현장이다. 1945년 이후에도 간첩·사상범, 많은 운동권학생과 재야인사 등이 거쳐간 곳으로서 한국의 교도행정상 빼놓을 수 없는 기념지이다. 이곳에는 유관순굴·특수고문실 등이 있는 감방과 강우규·송학선이 처형된 사형장 및 일반사무실·교회당·공장·창고·취사장·식당·세면장·감시탑과 운동장 등이 있었다. 1987년 3월부터 서울특별시는 민족의 수난과 독립운동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곳 전체를 사적으로 지정,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조성했다.

이렇듯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과거 일제시대때 독립투사를 가둬둔 역사의 현장으로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를 통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역사 유적지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독립문 역에 올라서자 마자 역사내에 태극기가 걸린 나무와 여러 형태의 태극기들을 볼 수 있었는데, 이를 통해 이곳이 바로 우리 역사의 현장임을 알 수 있었다.

 

5번 출구를 통해 독립문역사를 나오자 서대문 독립공원을 알리는 간판을 볼 수가 있었고, 근처에 독립운동을 펼쳤던 서재필 선생의 동상과 독립문이 있었다.

독립문은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로 갑오개혁 때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대신 짓었다고 한다. 참고로 갑오개혁(1894∼1896)은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독립문을 세우게 된 것이다. 서재필 선생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한편, 서대문 독립공원 일대에는 비가 조금씩 내리는데 불구하고도 많은 시민들이 나와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서대문 독립공원을 가로 질러 서대문형무소로 이동하였다. 입장료는 어른 1,500원이고 청소년은 1,000원으로 부담없이 들어 갈 수 있다.

관람에 있어 서대문형무소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볼 수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볼수 있는 역사전시관에서는 각종 전시물을 볼 수가 있다. 이후 역사전시관을 나와서는 건물 뒤로 가면 감방을 실제로 볼 수 있으며, 천천히 둘러보면 대략 한 시간 정도면 다 볼아 볼 수 있다.

역사전시관에서는 일제시대 때부터 민주화 운동까지의 우리나라의 아픈 근대사를 볼 수 있다.


사 교과서에서 본 갑오개혁 무렵의 의병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각종 사진과 유물들이 전시가 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수용자들에게 이송시 탈주를 방지하고자 손목에 채웠다는 수갑과 고문도구 들은 녹이 슬어 있어 그 아픔의 세월에 대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전시관에 들어서니 벽면에 빽빽히 독립투사들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들이 바로 이곳에서 수용되었다고 하는데 과히 숫자가 어마어마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 간 것이다.


한편, 역사전시관은 2층건물의 복층 건물로 과거 서대문형무소의 관리동 건물로 역사전시관으로 리모델링으로 했다고 한다. 역사전시관 내에서 우리 역사의 흔적을 살펴보고 밖으로 이동하였다.


기록되어진 것과 달리 형무소의 몇몇 동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감옥이 아니었다면 기숙사와 같은 빨간색 벽돌들은 푸른 잔디와 어울릴 정도로 이뻤다. 건물외벽에 걸린 대형 태극기는 이곳이 아픈 우리 역사의 현장임을 알릴 뿐이었다.


안내도를 따라 외벽과 달리 건물 내부로 들어가보니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내부에 들어서면 벽돌 건물 특유의 서늘한 느낌이 나고 있었다. 지하실도 아닌데 지하실 같은 서늘함.. 이 곳이 감옥이구나 절실히 느껴졌다. 중앙을 향한 부채꼴로 모양으로 만들어진 건물들은 간수가 2층에서 내려다 볼 수 있어 감시에 소홀하지 않게 만들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특별 수감자들을 가두는 지하 감옥은 별도로 구비되어있었는데 천정이 뚫려있다. 주로 여죄수를 가두는 지하감옥으로 1916년에 만들어져 24시간 내내 감시를 했다고 한다.

 

유관순 열사도 서대문형무소 지하감옥에 투옥되었다고 하는데 1920년 고문과 영양실조로 이곳에서 순국하셨다고 한다. 차가운 지하감옥에서 숨을 거둬가는 과정 속에 얼마나 두려웠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 이후 지하감옥은 1934년에 매립되어 1992년 발굴되어 복원되졌다고 하는데 이곳에 대한 암울한 진실은 여전히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

한편, 당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독립투사들은 하루 10시간 30분을 노역에 투입이 되었다고 한다. 계절별로 달라졌다고 하기는 하지만 가장 더운 시기인 7월 무렵에 하루 10시간 30분에서 14시간을 동안 노역을했다고 하니 혹사에 시달린 것이다. 
 


이렇듯 혹사와 고문과 같은 고통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벗어나고 싶었을까? 담장 넘머로 도망가고 싶을 심정이 들었을 것이다. 서대문 형무소 담장들 살펴보니 높이는 꽤나 높았다. 곳곳에는 감시초소가 있어 수감자들의 동태를 면밀히 감시할 수 있었으니 도망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였다.


한편, 야외 한 복판에는 반구형 전시물이 있었다. 무엇인가 자세히 살펴보니 추모비라고 안내문에 적혀 있었다.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순국하신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자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 분들의 민족정신과 자유와 평화를 향한 의지를 한데 모으고 그 모아진 의지를 미래로 나아가는 원동력으로 삼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자 반구형으로 제작되어졌다고 한다.


서대문형무소 한 쪽 구석에는 사형장이 별도로 있다고 한다. 사형장으로 이끌려 가는 애국지사들은 마지막으로 미루나루를 붙잡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한 한에 못이겨 원통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불리고 있다고 한다.
 


사형장 안쪽에는 낡은 올가미가 있었다. 저 올가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애국선열들이 거쳐 갔을까? 낮 시간임에 불구하고도 어두침침한 목조건물에 음산한 기운이 들기도 했는데 이곳은 2000년대 초반 뒤쪽의 깨진 유리창 사이로 사람의 형상이 촬영되었다는 소동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 만큼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선열들의 아픔이 서려있는 곳이다. 1930년에 전국 각지의 감옥에 수감되었던 인원이 609만명이라고 통계에 나오고 있는데 당시 조선의 인구가 약 1889만명이라고 하니 그 야말로 가족 중 한 두명은 감옥에 갔다왔다고 볼 수 있다. 그처럼 당시 일제강점기는 감옥 밖 생활도 감옥같은 생활 이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많은 옥사의 방과 여러가지 볼거리가 많았지만 이상하게 더는 사진찍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뭔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기도 했다. 사진과 글보다는 직접 가셔서 보셔야 그 느낌을 더 와닿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와 우리나라가 이렇게 성장한 배경에는 많은 아픔이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이다.

전시물 시설이 어린아이들에게 다소 무서울지 모르겠지만
정말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직접 가봐야 할 것같다. 일제강점의 모든 역사를 정말 생생하게 보여주는 곳으로 우리의 역사와 진실을 체험하고 우리나라와 국방에 대해 소중히 깨달을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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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박종근 기자 (국방홍보원 블로그 '어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