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독립기념관 공동기획

임시정부 100년, 고난의 3만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中)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국정을 운영하는 법치를 했다. 임시의정원의 역할 가운데 입법 활동이 가장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임시헌장을 비롯한 임시헌법과 임시약헌 등 헌법의 제정과 개정, 조국 광복 후 정식 정부 수립의 대강을 밝힌 대한민국건국강령의 제정, 임시정부의 제반 법령과 임시의정원법의 제정 등 실로 많은 입법활동이 눈에 띈다.그 가운데 권력구조를 결정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개정하는 일은 임시의정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자 권리였다.

 

임시의정원 권력 강화…임시정부 유지 위한 자구책

 

임시대통령 선출과 각료 임명을 알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호외(1919.9.11).

 

대통령제→내각책임제…권력구조 재개편
임시정부는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헌법 개정을 했다. 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이뤄진 것이다.

첫 번째 헌법 개정은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장을 대한민국임시헌법으로 고친 일이다. 통합 임시정부를 제도적으로 완성하기 위한 조치였다. 한성정부를 정통으로 상해정부와 러령정부를 통합해 통합 임시정부를 출범하면서 그에 걸맞게 헌법을 개정한 것이다.

 

초대 국무령으로 선출된 이상룡.

 

1차 헌법 개정의 핵심은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내각책임제 정부를 대통령중심제 정부로 개헌하는 권력구조 개편이었다. 논란 끝에 대통령제로 권력구조를 개편해 초대 임시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함으로써 1차 헌법개정을 마쳤다.

2차 헌법 개정은 1925년 4월 7일 이뤄졌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정부 소재지인 상해로 부임하지 않고 미주 한인들이 제공한 독립운동자금을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독단적으로 정부를 운영하자 이를 바로잡기 위한 헌법 개정이었다. 이러한 난맥상을 대통령제의 문제점으로 인식해 다시 권력구조를 개편한 것이다.

우선 문제를 야기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3월 23일 탄핵하여 면직하고 제2대 임시대통령으로 박은식을 선출한 뒤 이뤄진 조치였다. 대통령중심제 정부를 국무령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책임제 정부로 개헌한 것이다.

김구 국무령으로 선출…내각 새로 구성

하지만 국무령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책임제 정부는 성공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국민대표회의 이후 임시정부의 위상 변화 때문이다. 현재의 임시정부를 개편해 강화하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해소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자는 창조파의 대립으로 독립운동계는 분열했고, 그 여파로 임시정부의 위상은 크게 추락했다.

그래서 만주에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계의 원로 지도자로 신망이 높던 이상룡을 초대 국무령으로 선출했지만 조각에 실패했다. 국무회의 구성원이자 각료인 국무원으로 선임된 김동삼·김좌진과 이탁 등 국무원 모두가 사임했기 때문이다.]

 

윤기섭 의원 당선증.

 

다시 양기탁을 국무령으로 선출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에 안창호를 국무령으로 선출하였으나 그마저 사퇴하고 말았다. 1926년 7월 7일 홍진을 국무령에 선출해서야 겨우 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어렵게 출범한 홍진 국무령 정부이지만, 12월 9일 그와 국무원 일동이 사임했다. 전 민족이 대동단결한 정당 곧 민족유일당을 만들어 독립운동세력을 통일하겠다는 이유였다.

1924년 중국의 제1차 국공합작의 영향으로 민족대당을 결성해 나라와 정부를 운영한다는 ‘이당치국(以黨治國)’론이 대두하면서 발의된 민족유일당운동이 본격화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홍진의 후임으로 김구를 국무령으로 선출하여 내각을 새로 구성했다. 김구는 민족유일당운동의 광풍 속에서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한 대책을 마련했다. 국무위원의 집단지도체제로 권력구조를 개편해 난관을 돌파하기로 한 것이다.

임시의정원은 심의 끝에 1927년 4월 11일 3차 헌법 개정으로 ‘대한민국임시약헌’을 제정 반포했다.

 

제1차 헌법 개정안 토의 기사(독립신문 1919.9.6).

 

임시정부 최고 권력기관 된 임시의정원

3차 개헌의 특징은 첫째, 정부수반을 없애고 완전히 회의체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회로 개편한 것이다. 임시의정원에서 선출된 국무위원 5인 이상 11인 이하로 구성된 국무회의가 의사 결정기구이자 집행기관이었다. 국무회의는 국무령을 대신해서 회의를 주관하는 주석 1인을 국무위원이 선출하게 했지만 특권 없이 다만 회의를 주관하는 위치였다.

둘째, 임시의정원이 임시정부의 최고 권력기구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최고 권력이 임시의정원에 있음”(제2조), “임시의정원은 의원이나 정부의 제출한 일체 법과 예산결산을 결의하며 국무위원과 국사(國使)를 임면하며 조약체결과 선전강화에 동의하되 총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원 3분의 2의 찬동으로 함”(제11조), “임시의정원은 폐회 중 그 직권을 행사키 위하여 7인으로 조직한 상임위원회를 둠”(제15조) 등의 조항에서 임시의정원은 국무회의의 모든 결정을 추인하고 폐회 시는 상임위원회를 두어 그 동의를 얻게 하였다.

 

셋째, “광복운동자의 대단결인 당(민족유일당)이 완성된 때에는 국가의 최고 권력이 이 당에 있음”(제2조)이라고 하여, 이당치국론과 민족유일당운동을 수용하고 있는 점이다.

요컨대 제3차 개헌을 통해 권력구조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회제로 개편하고 임시의정원의 권력을 강화해 의회중심주의를 채택한 사실은, 당시 민족유일당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는 독립운동계의 정세를 반영한 것으로 임시정부 유지를 위한 자구책이었다.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Posted by 어울림 국방홍보원 Trackback 0 :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