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 개조해 만든 장갑열차로 일본군 진격 막았다

<25> 항일 중국군의 참모가 되다


만주사변으로 중국군 들고 일어나

무장투쟁 독립군에게도 기회 찾아와

야전군급 중국군 부대 참모 된 철기

일제와 정규전 치르는 경험 쌓고

중국군도 인정하는 軍지도자로 성장


중국 강교전투기념관 내에서 철기를 설명하고 있는 전시자료. 철기를 용감하고 지모가 풍부한 장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1931년 발생한 만주사변은 동북아 정세를 급변시켰다. 중국군이 들고 일어나자 만주지역에서 때를 기다리던 한국 무장투쟁 독립군에도 투쟁의 기회가 왔다. 당연히 외몽골 지역에 은거해 있던 철기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다. 철기는 중국군관학교를 나온 경력과 청산리전투의 명성으로 일제 관동군과 최전선에서 싸우던 흑룡강성의 소병문, 마점산 군대에 초빙된다.

일제 관동군이 만주지역 철로를 따라 만주지역을 점령해 나가자 일제가 지나간 후방에서 많은 항일 중국 군대가 일어선다. 여기에 한인 독립군들도 가담한다. 남만주에서는 양세봉의 조선혁명군, 북만주에서는 러시아에서 풀려난 지청천의 한국독립군이 중국군과 연합해 전투를 치렀다.

이 시기에 철기는 야전군급 규모 부대의 참모로 일제와 정규전을 치르는 경험을 쌓는다. 어느새 철기는 중국군도 인정하는 고위 군사지도자로 자라난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향후 광복군 창설과 광복 후 국군 창설 과정에 큰 도움으로 작용한다.


만선철도 위로 진격하는 일제 관동군. 일본군은 철로를 따라 항일 중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철기의 장갑열차, 일제 관동군에 타격

철기가 외몽골 땅에서 사냥으로 연명하고 있을 때 근처 중국 흑룡강성군의 하나인 소병문 장군이 철기의 소문을 듣고 그를 초빙했다.

이때 철기는 하나의 조건을 내세웠다. 그것은 흑룡강성에서의 한인 이주민 보호였다. 당시 일제에 의해 조작된 한인들이 일제에 협력한다는 잘못된 의심을 버리고 보호해 달라는 것이었다. 소 장군은 즉석에서 철기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철기의 깊은 애국애족 정신이다.

철기는 소 장군 휘하에서 일본군을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이때의 유명한 일화가 철기의 개조 장갑화차다.

당시 일제 관동군의 드넓은 만주 땅을 공략하는 방법은 철로를 따라 대도시 중심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철도를 이용해 최전방에 대부대를 보내고 철로와 기차역은 방호하는 개념이었다.

일제 관동군은 최초 중국 동북군이 보유하고 있던 7대의 장갑열차를 탈취해 이 장갑열차들을 선봉으로 중국군을 공격했다. 일제 관동군은 철로를 따라 파죽지세로 만주를 점령해 나갔다. 장갑열차는 탱크와 같아서 진격할 때는 보병을 지원하는 포병이요, 정지할 때는 방어진지의 거점이었다. 막강한 화력과 돌파력에 중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마땅한 대응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절절매는 소병문군에 철기는 ‘눈에는 눈’이라는 대응책을 제시했다. 즉, 중국군 지역 내에 널브러져 있던 무개 화차를 장갑열차로 개조해 일제의 장갑열차에 맞대응하는 안이었다.

철기는 소병문 장군의 승인 아래 1주일 만에 장갑열차를 만들었다. 무개 화차 위에 자른 레일을 말뚝 삼아 두터운 이중벽을 만들어 이 사이에 돌과 모래를 부어 방탄효과를 냈다. 그 위에 다시 레일을 촘촘히 걸치고 다시 모래주머니를 160㎝가량 쌓았다. 중간에 총구를 사방에 만들어 소총이나 기관총으로 자유롭게 사격할 수 있도록 했다. 또 기관차는 이들 개조 장갑화차의 중간에 위치시켜 앞뒤로 움직이게 하고, 앞뒤로 개조 장갑화차를 두세 량 달게 했다. 기관차는 가운데 있으니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이 낮았다. 장갑은 모래나 자갈 등을 잘 다져 넣어 만들었다.

철기는 중국군 보병 간부를 선발, 그들에게 개조 장갑화차의 전술적 운용을 가르쳐 관동군에 대응하게 했다. 중국군은 넨즈산 탈환작전 때 이를 이용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자 당시 흑룡강성 주석이자 최고사령관이었던 마점산 장군이 치치하얼에서 직접 달려와 격찬했다. 이 개조 장갑화차는 일본군의 진격 저지에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인의 우수성을 만주 땅에 드날린 것이다. 철기는 훗날 말했다. “창의에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도 있지만, 있는 것을 새롭게 쓰는 것도 창의다.”


중국 치치하얼에 있는 강교전투기념관 내의 철기 이범석(맨 오른쪽) 장군 흉상.


중국군 항일영웅과 전선의 선봉에 서다

철기의 개조 장갑화차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마점산 장군이 철기를 스카우트했다. 원래 소병문 장군은 중국 신식군관학교인 보정군관학교 출신이었다. 반면, 마점산 장군은 마적 출신이었다. 그는 작은 키로 ‘만주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릴 만큼 지도력은 뛰어났으나 군사지식은 약했다. 그런 마점산 장군이 철기를 탐내지 않을 수 없었다. 철기는 마점산 장군의 핵심참모인 작전과장이 된다.

중국에서 마점산 장군 하면 중국 최초의 대규모 항일 승리전투인 ‘강교 전투’의 영웅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동북군벌 장군들은 친일로 돌아서서 일제에 야합하거나 장개석의 지시로 산해관 이남으로 전투 없이 철수할 때였다. 그런데 마점산 장군이 흑룡강성에서 항일로 일어선 것이다. 그 항일의 핵심참모가 바로 철기였다.

강교 전투란 1931년 11월에 일제 관동군의 흑룡강성 성도 치치하얼 점령을 중국군이 저지한 전투를 말한다. 3만여 명의 일제 관동군과 1만3000여 명의 중국 흑룡강성군이 37일간 치른 전투다. 결과적으로 일제 관동군은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후퇴한, 중국군이 승리한 전투다.

오늘날 치치하얼에 있는 ‘강교 항일전투기념관’에 가면 철기 장군의 흉상이 우뚝 서 있다. 중국 관영 CC-TV는 지난 2007년 항일투쟁 명장에 철기 장군을 선정해 중국 전역에 방영하기도 했다.

강교 전투에서 철기는 두 가지 일화로 중국인들에게 유명하다. 하나는 강교 전투 중에서도 결정적 전투인 11월 17일 삼칸방 방어전투에서 철기의 고려혁명군 결사대 잔여 병력이 불굴의 진지 사수 모습을 중국인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또 하나는 당시 흑룡강성군이 일제 관동군의 장갑차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일방적으로 밀릴 때였다. 철기는 장갑차의 급소가 포탑 회전부이니 용감하고 날랜 병사를 선발해 이 포탑 회전부에 철공구 등 쇠붙이를 끼워 포탑을 돌지 못하게 하라고 제안했다. 중국군은 철기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를 실전에 적용해 큰 효과를 보았다. 그래서 오늘날 치치하얼의 ‘강교 항일전투기념관’은 철기를 “용감하며 지모가 넘치는 장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점산 부대의 치열한 항일전투로 일제 관동군은 큰 피해를 보았다. 그러자 일제는 마점산 부대를 완전히 궤멸시키기 위해 관동군 전 병력을 동원해 포위공격을 벌였다. 악전고투 끝에 마점산과 소병문 부대 등 중국군 수만 명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었다. 그리고 중동철도 서부 종점인 만주리를 경유해 소련령인 다후리로 탈출했다.

1933년 초가을, 철기는 만주에서 항일전을 더는 이어가지 못했다. 일본군에 쫓겨 러시아로 몰려든 7만여 명의 중국 군대와 함께 8개월 동안 피신한 것이다. 러시아 시베리아의 작은 도시 톰스크에서의 억류생활이 바로 이 시기다.


<박남수 철기이범석장군사업회 회장>

Posted by 어울림 국방홍보원 Trackback 0 : Comment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