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끝난 후 한국 해군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당연히 해군 항공기 확보를 위한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해군 공창은 함정 수리 항목으로만 예산을 확보해 두고 있었으며 해취호 등 항공기 제작을 주도한 해군 공창 항공반에는 항공기 개발·연구와 관련된 공식적인 예산이 없었다.

예산 문제로 해군 항공기 제작 사업이 난관에 빠지자 해군참모총장 정긍모 제독은 해군공창 항공반을 해군과학연구소 제1연구부 항공과로 개편하고 항공기 개발 사업을 적극 추진해 나가도록 지시했다. 해취호·서해호를 제작한 조경연 소령은 해군과학연구소 제1연구부의 항공과장에 임명돼 항공기 제작 임무에 계속 종사했다. 

해군과학연구소로 소속이 변경된 이후에도 항공기 제작 비용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조소령은 예산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25전쟁 당시 추락한 각종 항공기 잔해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조소령은 6·25전쟁 당시 설악산 인근에 수많은 미군 항공기가 추락했다는 소문을 듣고 설악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조소령이 발견한 것은 수많은 시신과 깨어진 유리 조각뿐이었다. 어려운 경제 사정 속에 고철 수집상들이 이미 항공기 잔해 부품을 수집·매각해 버린 것이다. 

조소령 일행은 다시 춘천에 있는 육군항공대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비행 사고로 추락한 많은 항공기를 발견한 그는 교재용으로 사용한다는 양해를 구하고 항공기 엔진 4대를 무상으로 획득했다. 

조소령은 이 엔진들을 이용, 세 번째 해군 자체 제작 항공기인 ‘제해호’(制海號·SX-3·사진)와 또 다른 시험 항공기인 ‘통해호’(統海號)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957년 3월30일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제해호가 완성됐다. 조소령과 정학윤 중위가 실시한 시범 비행도 성공했다. 제해호는 적재 중량을 크게 늘려 승무원을 6명까지 태울 수 있는 중형 수상 정찰기였다. 

제해호는 엔진을 제외한 기체 전부를 해군 기술진이 직접 제작했다는 점에서 해취호·서해호와 또 다른 의미를 가진 항공기였다. 

또한 처음으로 무기를 장착, 공격 능력을 보유했다는 점은 해군 항공 역사상 큰 의의로 남는다. 

해군은 제해호를 기반으로 57년 7월15일 해군 사상 첫 항공 부대인 함대항공대를 창설했다. 해군함대항공대로 예속된 제해호는 남해안 일대의 해상 감시를 비롯해 함정 엄호, 대공 훈련(표적 예인과 추적 훈련) 지원, 함포 탄착 수정, 긴급 수송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함대 항공대는 57년 말까지 10명의 조종사와 22명의 정비사를 확보하고 58년 해군과학연구소가 제작한 4대의 항공기를 추가로 배치·운용하게 됐다. 

50년대만 해도 국군은 자체적인 국방 예산이 부족, 미군의 군사 원조에 의해 무기 체계 운용 비용을 감당했다. 

문제는 해군이 자체 제작·보유한 항공기가 미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무기 체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미 군사고문단은 61년 제해호를 비롯한 한국 해군의 항공기에 대해 더 이상의 군수 지원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해군은 61년 2월23일 자체 제작 항공기를 모두 해양경찰대로 이관하는 가슴 아픈 결정을 내렸다. 항공기를 상실한 해군함대항공대도 63년 3월1일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처럼 초창기의 해군 항공대는 5년 8개월을 일기로 짧은 역사를 마감했다. 

하지만 해취호·서해호·제해호 같은 해군 자체 제작 항공기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초창기 해군 항공 역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항공기에 열정적이었던 한 해군 장교와 항공기 제작팀이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이룩해 낸 쾌거로 해군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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