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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체계/항공무기

[M-기네스] <20> 대한민국 최초의 항공기는?!

[M-기네스] <20> 대한민국 최초의 항공기는?!

 

[M-기네스] 스무번째 마지막 퀴즈~~

Q. ‘대한민국 최초의 항공기’는 무엇일까요?!

 

 

1940년대 미국에서 생산,

제2차 세계대전 중 미 육군이 사용하던 2인승 연락용 경항공기,

1948년 우리나라 공군이 보유한 최초의 항공기,

6.25전쟁 초기 후방석의 관측사가 폭탄을 품에 안고 출격·투척하며 크게 활약,

여수·순천사건 진압과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에서 공중지원 임무 성공적으로 수행,

이후 육군에 파견돼 연락, 지휘관 수송, 조종사 양성과 정비사 교육 등에 사용되다

1954년 퇴역한 ‘대한민국 최초의 항공기’는 무엇일까요?! 

 

 

기록으로 보는 재밌는 이야기, ‘M-기네스’에서

 

 

오늘은 대한민국 최초의 항공기

『 L-4 연락기 』 에 대해 알려드릴께요~!

 

 

 

 

 


 

 

# 우리 육군·공군 최초 경항공기

 

 


 

 

L-4 연락기(liaison aircraft)는 우리 공군과 육군이 최초로 도입·운용한 경항공기 입니다.


그만큼 사연도 많고 일화도 많은 전설의 항공기 인데요~


정식으로 공군이 창설되기 전인 1948년 9월 8일,

우리 군은 미 육군 7사단 항공대로부터 L-4 부품 10대분을 인수했습니다.

같은 달 13일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자체 능력으로 완성품 항공기를 조립했죠.

 

 엔진

컨티넨탈 O-170 65마력 

 폭

35 feet, 3 inches 

 길이

22 feet, 5 inches

 높이

6 feet, 6 inches 

 최대 이륙중량

1,200 pounds 

 제작사

Piper Aviation 

 전체 생산량

약 6천대 

 최초생산

1941년 

 최고 속도

85마일 

 비행거리, 순항고도

190마일, 11,950피트 

L-4 연락기 제원 

 

 
도입 당시 L-4 연락기 기체에는 미 육군항공대 마크인 하얀 별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도입한 항공기인 만큼 미군 마크를 달고 비행할 수 없다고 생각한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제6대 공군참모총장)소위는 하얀 별 위에 태극 마크를 덧그렸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만들어진 마크는 현재까지도 우리 공군의 마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9월15일에는 최초로 서울 상공에서 전시 비행을 실시했습니다.

 

▲ L-4 연락기의 서울 상공 시위비행 모습(1948.9.15)

 

광복군 출신의 최용덕(제2대 공군참모총장) 당시 국방부차관은

“내 나라, 내 강토 안에서 태극 마크를 달고 비행하는 비행기를 보니 죽어도 한이 없다”고 감격했다고 하네요..

광복군에 있을 때는 비행기가 없었고 중국 공군에 근무할 때는 태극기 대신 청천백일기를 달고 비행한 그였기에

태극 마크를 단 비행기가 그토록 감격스러웠던 것입니다.

 

 

미군은 한국 측의 강력한 요구로 L-4를 인도하기는 했으나 한국 조종사의 능력은 불신했습니다.

하지만 김정렬(초대 공군참모총장)대위가 아무런 사전 교육 없이 바로 L-4를 이륙시켜

서울 상공을 선회한 후 착륙하자 미군의 태도도 달라졌습니다.

별도의 조종훈련을 받을 필요가 없겠다며 한국 조종사의 실력을 인정한 것 입니다.


김신 소위와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 김영환 소위는

L-4를 타고 서울 한강교 교각 아래를 통과비행하는 묘기를 선보여 서울 시민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습니다.

 

 

 

일명 O-59라고 불리기도 한 L-4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육군항공대와 해군이 운용한

대표적 연락기 중의 하나인데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연락·관측·정찰용으로 사용되는 경항공기를

은어로 ‘메뚜기’(grasshopper)라고 불렀습니다.

이때문에 L-4도 ‘그래스호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 파이퍼(Piper)사가 제조한 L-4는 1944년 생산이 종료될 때까지 약 1400대가 생산됐습니다.

이 항공기는 연락기인 만큼 일체의 무장이 없는 것이 특징인데요~

조종사·정비사 등 2명이 탑승하며 길이 6.4m·폭 10.67m로 기체 크기가 작은 편 입니다.

순항 속도 74km/h·최고 속도 140km/h 정도로 비행 속도도 자동차 수준에 불과합니다.

 

▲ 시동을 걸고 있는 L-4 연락기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L-4 연락기가 출동해 진압 작전을 지원하기도 했으나

큰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L-4는 기체에 무전기가 장착돼 있지 않고 무장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항속 거리가 짧아 서울에서 전남 여수까지 바로 날아가지 못하고

전주비행장을 거쳐 작전 지역으로 출동해야 했습니다.

1949년 정식으로 공군이 발족한 이후에는 지리산 지역으로 출동해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1950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L-4 연락기도 L-5·T-6 등 다른 항공기와 함께 출격했는데요~

물론 L-4는 별도의 무장이 없었으므로 후방석의 정비사들이 국산 15㎏ 폭탄 두 발을 휴대하고 있다가

손으로 적 전차에 투하하는 등 고군분투 했습니다.

이후 정식 전투기인 F-51 무스탕(Mustang)을 미국에서 도입하면서

1950년 7월8일부터 L-4 연락기는 공군 정찰비행대에 편성돼 지상군의 작전을 지원하는 임무에 투입됩니다.

 
1950년 10월1일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예하 육군항공부대가 재창설되면서

육군도 L-4 4대를 보유하게 돼 6·25전쟁 기간 중에는 공군과 육군 모두 운용하기도 했습니다.

육군에서는 51년 O-1 관측기를 인수하면서 L-4를 더 이상 운용하지 않았고

공군에서도 54년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퇴역했습니다.

 

 


 

 

# 문화재가 된 대한민국 최초 항공기

 

 


 


 

▲ L-4 연락기

 

1982년 11월 공군 군사재 제1호로 관리하고 있으며,

지난 2010년 6월에는 문화재청에 의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6·25전쟁 당시 북한은 전투기와 폭격기 등으로 중무장하고 있었지만

남한은 화기도 장착하지 않은 연습기 또는 정찰기만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국군은 2인승인 이 비행기 뒷좌석의 관측사가 폭탄을 품에 안고 출격해 투척하는 방법으로 북한군에 맞섰죠.

그때 사용됐던 군용기인 ‘대한민국 최초 항공기, L-4 연락기’가

6·25전쟁 발발 60년을 맞아 등록문화재 462호로 지정됐습니다.

 

 



 

 

# 이한장의 사진

 

 


 

 

▲ 1946년 9월 13일 우리 군 조종사들이 미군 교관으로부터 조종술 교육을 받고 있는 모습.

우리 군은 1948년 5월 5일 통위부(지금의 국방부 격) 직속으로 항공부대를 창설한 뒤

그 해 9월 13일 항공기지사령부로 개칭하면서 첫 공군기라 할 수 있는 L-4연락기 10기를 미군으로부터 인수했다.

 

 ▲ 1953년 겨울 육군2포병단 비행대 정비사들이 출격에 대비해 L-4 연락기의 엔진 보온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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