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은 온양온천으로 일반에게 잘 알려진 고을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 겨레를 누란의
위기에서 지켜낸 구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어린 시절을 보냈고 잠들어 계신 곳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다. 삭풍이 부는 계절, 장군의 숨결을 좇아 아산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우리 겨레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 감사한 마음 절실
아산의 온양온천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의 하나다. 백제 때는 온정(溫井), 고려시대엔 온수(溫水), 조선시대 이후엔 온양(溫陽)이라고 불렸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온천의 역사가 길다. 조선시대엔 태조·세종·세조 등이 이곳을 자주 찾았다. 특히 세조는 이곳서 효과를 톡톡히 보았던지 신천(神泉)이라는 이름도 붙여주었다. 영조·정조도 온궁(溫宮)이라는 별장을 지어놓고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이렇게 전통 깊고 물 좋은 온양온천에 들러 목욕재계한 뒤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을 뵈러 가자. 임진왜란 당시 절체절명의 위기에 닥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이를 오히려 대승으로 극복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두말이 필요 없는 우리 겨레의 영웅이다.
충무공은 1545년(인종 1) 3월8일 아버지 이정(李貞)과 어머니 초계(草溪) 변씨(卞氏) 사이의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한양 건천동(지금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그렇지만 충무공의 조부 이백록(李百綠)이 을사사화에 연류 되어 죽자, 부친은 벼슬에 나가지도 못하였다. 이렇게 가세가 기울자 부친은 처가가 있는 아산 백암리로 낙향하였다. 충무공의 나이 8세 때였다. 이후 충무공은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학문을 익혔다. 28세가 되던 해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했고, 4년 뒤인 32세가 되어서야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함경도 변방의 동구비보 권관을 시작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결국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23전 23승 무패로서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기면서 겨레의 신화가 되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는 현충사>
아산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1706년(숙종 32) 장군의 옛집 근처에 세운 사당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학창시절 한두 번은 현충사에 다녀왔겠지만, 나이와 성별이 무슨 상관이 있으랴. 언제 어느 때 찾아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들기는 세월이 흘러도 여전한데.
현충사 경내의 주요 시설로는 장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현충사 본전을 비롯하여 장군이 자란 옛집, 활을 쏘며 무예 연습을 하던 활터, 셋째 아들 이면의 무덤 등이 있다. 옛집은 지난 해 법원 경매로 나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다행히 충무공파 상위 종파인 덕수 이씨 풍암공파 문중이 11억5000만원에 낙찰 받아 옛집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유물관엔 국보로 지정된 <난중일기>를 비롯한 많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보물인 장검은 1594년 4월 한산도 진중에서 당시 장인들이 만든 것. 충무공은 이 장검을 항상 벽에 걸어두고 보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칼날엔 장군의 친필 검명(劍銘)이 새겨져 있다. ‘三尺誓天(삼척서천) 山河動色(산하동색) 一揮掃蕩(일휘소탕) 血染山河(혈염산하)’. 이 글귀는 ‘석 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두려움에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네’라는 뜻이다. 섬뜩하도록 당당한 명문이다. 이순신 장군의 내면을 그린 소설 <칼의 노래>로 화제를 모았던 소설가 김훈은 소설을 쓸 당시 글이 막히면 현충사에 와서 이 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현충사 관람시간(동절기) 09:00~17:00(매표 마감 16:00),
매주 화요일 휴관. 요금은 대인 500원, 소인 300원.
주차는 무료. 전화 041-539-4600 www.hcs.go.kr
현충사에서 6km 정도 떨어진 음봉면 국사봉 기슭에 자리 잡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는 주변이 널찍하고 솔숲도 잘 가꿔져있다. 따라서 천천히 산책하며 충무공의 호국 정신을 새기기에 더없이 좋다.
충무공은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1598년 11월19일 운명하여 지금의 남해대교 근처 충렬사에 임시로 모셔졌다가 20일 뒤인 12월10일 고향인 아산으로 옮겨 장사를 지냈고, 16년만인 1614년 이곳으로 이장하게 된다. 그런데 ‘16년만의 이장’이란 사실에서 충무공이 전쟁 때 죽지 않고 은둔했었다는 ‘은둔설’이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떠돌기도 했다. 이는 충무공이 일부러 총에 맞았다는 ‘자살설’과 맞물려 늘 관심을 끌고 있는 설이다.
고향 같이 정겨운 아산 외암마을
온천욕을 하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뵈었다면, 이젠 외암민속마을로 가보자. 온양 시내에서 39번 국도를 타고 공주 방면으로 달리다 고개를 하나 넘으면 읍내동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조선시대 온양의 중심지였던 현이 있던 마을이다. 온양향교, 온주아문과 동헌 등은 이곳의 위상을 잘 설명해주는 문화유산이다. 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그 옆의 당간지주도 이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든다.
읍내동에서 승용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외암마을은 ‘잃어버린 옛 고향’을 느껴볼 수 있는 전형적인 전통 마을이다. 외암마을은 약 500년 전에 강씨와 목씨 등이 정착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그러다 조선 명종 때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이정(李挺)이 이곳에 들어오면서 예안 이씨(禮安 李氏) 세거지가 되었으며, 그 후손들이 번창하고 인재를 배출하여 반촌(班村)의 면모를 갖추었다.
마을 안엔 민가 주택이 밀집되어 있고 그 주변 산야엔 농경 전답이 넓게 퍼져 있다. 이들 중 넓은 마당과 정원을 갖추고 여러 채의 목조기와집을 가진 큰 규모의 고가(古家)들이 20여 채에 이르고, 그 사이사이엔 작은 규모의 주택들이 섞여서 모두 60채에 이르는 민가가 모여 있다. 주민은 400여 명인데, 이 중 예안 이씨 집안은 절반이 넘는다.
외암마을의 특징은 정겹다는 데 있다. 집의 규모나 격식에 있어서도 집안의 세를 과시하려는 듯한 영남지방 등의 전통가옥과 달리 낮고 펑퍼짐한 뜰과 마당의 수목이 잘 어우러져 담백한 맛이 있다. 이렇듯 거부감이 들지 않고 정겹게 다가오는 마을 풍경은 어쩌면 충청도 사람들의 품성을 그대로 빼다 닮았는지 모른다.
마을은 젖줄인 설화산 계류를 끌어들인 수로가 모든 집들을 연결해 수로와 나무들이 어울려 마을 전체가 큼직한 정원처럼 보인다. 이는 설화산이 품고 있는 화기(火氣)를 다스리고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수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을의 반가엔 참판댁․병사댁․감찰댁․교수댁․참봉댁․국사댁 등 주인의 관직명을 따서 부르는 택호와 재직하던 고을명이나 출신지명을 따서 영암댁․신창댁․양성댁 등의 택호가 붙여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건재고택과 교수댁․감찰댁은 사람이 거주하는 살림집으로서 현재 일반에 개방 되지 않는다.
이 마을의 자랑거리는 또 있다. 바로 ‘선비의 향기’로 불리며 지금도 세월의 맛을 이어가고 있는 연엽주(蓮葉酒). 이는 예안 이씨 가문에서 대대로 빚어온 가양주로서 ‘참판댁’이라 불리는 고택에서 이득선씨 내외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연엽주는 이씨의 고조부 이원집이 직접 개발해 빚은 술로서 해마다 봄이 되면 고종에게 진상했다고 전한다. 이원집은 고종 때 왕실 비서감승을 지낸 사람으로 당시 궁중음식의 제조법을 기록한 <치농>이라는 요리책을 저술할 정도로 다방면에 능력을 보인 인물. 외암마을 관리사무소 전화 041-540-2654 www.oeammaul.co.kr
청일전쟁의 아픈 역사를 지켜본 영인산
아산 서쪽, 아산호와 삽교호 사이에 부드럽게 솟아 있는 영인산(364m)은 아산만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요지다. 이 산은 청일전쟁 때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청나라 군사들이 아산만 갯벌로 상륙하는 광경을 지켜보기도 했으니 우리 겨레가 겪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증인이기도 하다. 정상엔 백제 초기의 성으로 추정되는 영인산성이 있다.
영인산은 비록 나지막하긴 해도 너른 내포들판과 아산만을 지키는 지킴이로서 전혀 부족함이 없다. 아산 남쪽의 광덕산이 충청남도 내륙과 바다의 경계로서 역할을 했다면 서쪽의 영인산에선 아산만을 한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시 내포, 그중에서도 삽교천방조제와 아산만방조제를 한눈에 담고 내포의 너른 들판을 감상하려면 반드시 이 영인산을 올라야 한다. 휴양림에서 올라가는 능선길은 널찍하고 완만해 코흘리개 아이들과도 함께 걸을 수 있다. 왕복 2시간쯤 걸린다.
영인산에서 내려와 아산만방조제로 가다보면 국도가 갈리는 삼거리 언덕에 성당 건물 하나가 눈길을 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꼽히는 아산 공세리 성당. 300년 수령의 아름드리 나목들 빈 가지 너머로 보이는 성당 건물은 어디서보든지 중세풍의 유화를 감상하는 것만 같다. 이렇듯 고즈넉한 주변 분위기는 굳이 미사에 참석하지 않아도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해준다.
<고딕양식의 공세리 성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꼽힌다.>
지금의 고딕양식 성당은 프랑스 출신의 드비즈 신부가 1922년에 중국인 기술자를 데려와 지은 것이다. 설계는 드비즈 신부가 직접 한 것이라 하니 그는 건축학에도 일가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축 당시에 아산 지방의 명물로 이름을 날리며 멀리서부터 많은 구경꾼을 불러왔다고 한다.
드비즈 신부는 당시 자신이 직접 조제한 한방의술을 활용해 백성들을 살폈는데, 유명한 ‘이명래 고약’은 신부가 제조한 것이다. 이 고약은 당시엔 신부의 한국 이름을 따서 ‘성일론(成一論) 고약’이라 했고, 나중에 드비즈 신부의 심부름꾼이었던 이명래에게 전수되면서 ‘이명래 고약’이 되었다고 전한다.
<박스>
여행정보
●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천안 나들목→1번 국도(대전 방면)→4km→21번 국도→아산 / 서해안고속도로→서평택 나들목→38번 국도→포승→아산만방조제→39번 국도→아산. 수도권 기준 1시간30분 소요.
●맛집 = 송악면 외암마을 근처에 있는 ‘산과 들 묵집(041-541-7762)’은 들깨를 뿌린 도토리묵과 사골 육수에 밥을 말아먹는 묵밥을 잘한다. 공기 좋은 광덕산 주변에서 거둔 도토리로 묵을 쑤기 때문에 고소하고 담백하다. 묵밥 6,000원, 묵야채비빔밥 7,000원, 시골보리밥 5,000원, 뚝배기불고기 7,000원. 외암마을 앞에서 39번 국도를 타고 공주․유구 방면으로 700m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에 식당이 보인다.
●숙소 = 온양 시내에 온양관광호텔(041-545-2141), 온양그랜드호텔(041-543-9711), 온양팔레스호텔(041-547-2500), 뉴코리아관광호텔(041-542-8151) 등 호텔 급 숙박시설이 많다. 외암마을(041-541-0848) 안에 민박집이 여럿 있다. 요금 40,000원~60,000원. 민박집에서 매식이 가능하다. 한 끼에 5,000원. 영인산자연휴양림(041-540-2479)에서 숙박이 가능하다.
※참조 = 아산시청 대표전화 041-540-2114
<국방홍보원 - 신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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