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최고의 요새, 화성(華成)
우리 대한민국은 북한과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전면 대치하고 있는 상황으로 국지전이 몇 차례 일어났던 사례가 있어 긴장이 유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안함과 연평도 폭격 등의 북한의 도발이 발발함에 따라 서해5도 일대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전략요새로 만들어 북한의 재도발 시 응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다. 서해 5도는 인천과 서울과 근접하여 매우 군사적으로 전략적인 요충지이라고 할 수 있어 요새화하자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요새(要塞)는 군사적 목적의 건축물이며, 전쟁 중에 방어하기 위해 짓는 구조물이다. 과거 우리 인류는 수 천년 동안 다양한 종류의 구조형태의 조물을 세워 자신의 터전과 영역을 지키고자 하였다. 특히,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권시대에는 왕이 있는 수도로 향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에는 요새가 건설되어져 적군의 침략을 근절하고자 했다. 그러한 형태는 우리나라 역시 간직하고 있다. 그 중 가장 근대에 건축되어지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세워진 화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 최고의 방어 성곽인 화성은 어떻게 축성되었을까?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 13년(1789년)에 18세기 상업의 발달과 함께 서울로 향하는 유통의 요지로 부각되던 지금의 수원시 중심에 위치한 팔달산 아래를 선택하여 신도시를 건설하였다.
정조는 17세기 이후 청나라 연행사로 내왕하던 이른바 실학자들의 실용지학에 대한 견문, 정약용의 성제에 관한 의견과 과학적 기술과 지침을 바탕으로 중국 축성제도를 참고하고,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화성을 지금의 수원지역에 건축한 것이다.
화성(華成)은 이전의 우리나라 성과제도와 다른 점이 많다. 기존의 우리나라 성제는 삥 둘러서 담을 쳐서 막는데 지나지 않았는데, 화성의 경우는 이전의 성과제도의 단점을 보완하여 건축되어졌다. 완성된 화성은 “버들잎을 상징하고 있고 또한 川(내천)자를 본 받아 삥 둘러서 터의 모양을 하고 있다. 전체적인 형국을 보면 서쪽으로 팔달산이 높아 솟아 올라 진산(鎭山)이 되고 그 앞으로 일자를 한 안산(案山)이 있으며, 그 사이로 수원천이 가로지로고 있어, 마치 서울 한성의 모습을 옮겨높은 모습이다.
화성의 둘레 안에는 문루가 크게 네 개가 있다. 남문(팔달문)-북문(장안문)-동문(창룡문)-서문(화서문)이 있다. 이 밖에도 성벽을 따라 적군 몰래 드나드는 비밀통로인 암문 5곳에, 물이 드나드는 수문 2곳, 무기를 감추어 두거나 적군을 살피는 적대가 4곳, 적군의 움직임을 살피는 공김동이 3곳, 봉화를 올리는 봉돈이 1곳(화두 5개), 포를 쏘는 포루가 5곳,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가 2곳, 경비초소인 각루가 4곳, 중무장 진지인 포사가 3곳 등 모두 40여 군데의 커다란 시설물이 성벽을 잇고 있다. 특히 팔달산 정상에는 서장대가 있으며, 이곳에 오르면 수원시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이러한 화성은 벽돌을 구워 쌓은 최초의 성곽 건축물로서 성벽 아래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중간은 가파르며, 위쪽이 밖으로 튀어져 나온 ‘규(圭)자’형 구조로 우리 건축사에 새 지평을 열었다. 화성의 아름다움도 빼어나지만 무엇보다 화성이 널리 전술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과학적이고 최첨단 성곽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기존의 우리나라 읍성제도를 따르면서도 공심돈 포루 등 전례가 없던 새로운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원침의 수호는 물론 도성의 외번 날개로서의 기능도 아울러 갖추었다. 특히 조선성과의 단점을 보완하여 다른 성에서는 볼 수 없는 치(雉)를 두고 있다. 기존의 성곽에서는 성 안에서 성벽밖에 있는 적병을 볼 수가 없었으나 치를 통해서 외벽에 기어오르는 적군을 쉽게 발견하고 공격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는 경우의 예로서 임진왜란 때 부산의 동래성이 있겠는데 치라는 전략적인 성곽구조가 없어 왜군에 의해 함락되었다고 한다. 이에 서애 유성룡은 이런 결함을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하였고, 화성 축조시 이를 받아들여 요소요소에 치를 만들어 완벽한 방어진지로 성을 축조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화성을 축조하기 위하여 각종 서양 기술서적을 기초로 7편의 글을 지어 실해에 옮겼고 공사현장에 최초로 거중기까지 동원하여 소요되는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안전사고도 줄였다고 한다. 그는 축성과정 하나하나를 상세히 기록하여 <화성성역의궤>라는 서적을 남겨 화성이 세계유네스코로 지정되어지는 역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축성되어진 화성은 당시 실학 사상가들의 지혜와 이상이 결집된 최첨단 공법을 동원한 대규모 공사였다.
당시에 뛰어난 성곽기술과 건축미를 자랑하는 화성은 더 이상 요새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현대전으로 들어오면서 무기와 전술이 크게 변화하면서 농성 중심의 전술은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요새의 역할은 변화하지 않았다.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는 군사적인 거점으로서 반드시 사수하고 해당 주민들을 보호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화한 것은 없는 것이다.
한편, 화성 건축이 후 정조는 인근의 사도세자 능인 융건릉 참배를 할 때에는 화성에서 머물렀는데 지금도 그 터로서 행궁이 남아 있어 수원시민들이 주로 찾는다. 잠시 행궁에 대해 얶힌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수원 시내버스안에서 우연히 20대 연인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직접 듣게 된 적이 있었다. “오빠~ 오빠! 저기 한옥같이 생긴 건물이 뭐야?” 이렇게 여자친구가 물어보자 남자친구는 주저없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아~ 그건 드라마 세트장이야!”, "...." 순간 버스에 있던 시민들은 모두가 그 들을 쳐다보는 등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수원시 곳곳에는 문화유적지가 조성되어 있어 화성 성곽순례와 옛 군사훈련터인 연무대에서는 국궁체험장 등이 조성되어 많은 관람객들이 참여할 수 있는 문화행사도 이루어있으니, 가까운 화성에 찾아 직접 체험을 하면서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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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박종근 기자 <국방홍보원 블로그 '어울림'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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