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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보는 군함도

 

 

일본인에겐 꿈의 섬, 조선인에겐 지옥섬 - 군함도

1890
1890년, 본격적인 석탄 채굴을 위해
미쓰비시 중공업은 작은 여울이었던 하시마섬
주위를 매립하기 시작했다.
건물이 세워진 섬의 윤곽이 군함의 모습을 닮았던
이 섬은 일본 내에서 광업도시로의 기대가 컸다.


1000
군함도의 갱도는 지하 1,000미터에 위치,
그 경사는 60도라 광부들은 기어서 다녀야 했다. 
12~15세 아이들은 갱내 깊은 곳인
개미굴에서 16시간 이상 작업을 하게 했다.

 

800
1943~1945년까지 조선인 노동자 강제 징용.
강제동원 피해자는 500~800여 명에 이른다.


120
군함도의 화장火葬 명부를 통해 밝혀진
조선인 사망자만 120명이 넘는다.
기록되지 않은 인원은 더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50
광부들이 탄광에서 일하며 받은 월급은 50엔

 

16
초기에는 8시간 3교대 근무,
전쟁 본격화 후 석탄 부족으로
2교대 12시간 씩 일하는 중노동을 했다.
하루 최대 16시간을 일할 때도 있었다.


광부들에게 주어진 것은 헬멧, 속옷, 고무줄이었다.
고무줄은 가파른 경사에 떨어지지 않도록
노동자끼리 묶어두기 위해서였다.
식사는 콩기름 찌꺼기로 만든 주먹밥 두덩이었다.

 

8
조선인 노동자의 거주지는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 또는 파도가 들어와 잠기는 저지대였다.
다다미 한 장크기면적1.6mx1.6m에
7~8명 씩 거주하게 했다.

 

여성 위안부는 이곳에도 있었다.
갱부들의 가동률 향상과 도주 방지 등을 이유로
운영한 3개 기업 위안소에는 조선인 여성도 있었다.

 

일본은 광부들에게  작업도구 대여비도 내게 했다.
속옷비, 식사비, 숙소비 등 의식주 비용부담은 물론,  
세금, 건강보험료도 내야했다.
그나마 남은 월급으로는 일본 정부의 채권 구입을 유도했다.

 

0
그렇게해서 남은 월급은 0엔이었다.


이를 견디다 못해 자살하거나
탈출하다가 익사한 사람도 많았다. 탈출을 해도
일본 본토로  떨어지게 되어 다시 끌려오거나 총살을 당했다.


1945년 8월 9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군함도의 조선인들은 처음으로 섬 밖을 나가게 됐다.
그들은 원폭 사후 처리 작업에 투입되었다.
이로인해 방사능에 피폭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군함도는
1970년대의 에너지 정책의 영향으로
1974년 1월 15일, 폐광되었다.

 

소유주인 미쓰비시, 그리고 일본정부는
지금까지도 강제 징용된 한국인 생존자들에게
어떤 보상도, 논의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5년 7월 , 군함도는
강제징용의 흔적을 지운 채 일본 근대화 사업의 유산이란
이유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리고 2017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말한 일본이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지
무려 72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