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유럽, 하이브리드전 늪에…
유럽이 혼돈에 빠져있다. 북으로는 러시아가 불안정을 촉발시키고 있고, 남으로는 사헬지역(사하라 사막 남쪽에 길게 분포한 지역)과 중동불안과 연계되어 IS 테러, 난민사태가 야기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유럽의 혼란상은 미국의 대외정책과 얼마간 상관관계에 있다. 올해 대선이 있는 만큼 오바마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되돌아보는 작업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다.
혼돈의 유럽, 하이브리드전 늪에...
하이브리드전은 군사적 수단과 비군사적 수단을 융합하여 상대국뿐만 아니라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심리 및 인식영역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다양한 방편을 활용하는데 군사적 조치에 이어 외교 및 비군사 수단을 이용한 선전, 기만, 역정보 제공이 뒤따른다. 하이브리드전은 반드시 폭력의 사용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전쟁수행방법과 다르다. 사이버 공격, 경제적 협박, 정보전, 인종문제를 활용하는 것은 하이브리드전의 전형적인 양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많은 분석가들은 유럽이 이미 하이브리드전의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한다.
특히 러시아의 하이브리드전 수행과 관련하여 학자들은 ‘러시아는 유럽에서 새롭게 문제를 발굴할 필요가 없다. 단지 문제를 악화시키기만 하면 된다’고 평한다. 러시아는 정보, 문화, 돈을 무기화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외교적 괴롭히기, 전력투사를 통한 공포심 조장, 에너지 자원에의 의존관계 형성을 통한 압박도 자주 사용된다. 법 체계 및 법적 합의를 활용한 법률전도 수행한다. 사이버 공격은 이미 일상적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핵 공갈도 자주 활용되는 수단이다. 하이브리드전에 대한 대응은 어렵다. 범 정부적 접근(the whole of government)을 넘어 범 사회적 접근(the whole of society)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많은 안보분석가들은 최근 유럽 안보 상황이 혼돈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해, 이는 오바마 행정부 초기에 유럽 안보를 등한시 한 결과로 보고 있다. 2015년 포린어페어스 9~10월호에서는 ‘오바마의 세계’라는 제하로 오바마 행정부의 지역별 외교정책을 분석하는 논문들을 실었는데 유럽을 분석한 논문에서 이 같은 맥락의 주장이 나왔다.
오바마 행정부 초기 정책팀들에게 있어 유럽은 안전하고, 그다지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 단조로운 곳이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니스트 애플바움에 의하면 나토를 통한 결속을 보여주기 위해 미국은 유럽 지도자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 보다는 사진을 같이 찍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쓰고 있다. 당시 누구도 유럽의 안보상황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고 애플바움은 평가한다.
오바마 행정부 초기에 유럽에 대한 미국의 시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은 동유럽에서의 미사일 방어프로그램을 취소한 2009년 9월의 결정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부시 행정부에서 계획한 미사일 방어 프로그램을 다소 후퇴시켰는데, 이란 핵문제 해결을 위해 러시아를 배려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일부 분석가들은 이러한 양보가 이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태를 비롯하여 국제사회에서 폭주하는 하나의 단초가 되었다고 본다.
그 결과 최근 2~3년 동안 미국은 중·장기적으로 제기될 중국으로 부터의 도전에 신경을 쓰면서도 당장 눈앞에 닥친 러시아로부터 촉발되는 위협에 대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러시아는 국제질서 및 각종 현안 대한 시각차를 보여주었고, 양국간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양국은 이후에도 국제사회의 주요 이슈에 대해 상호 비난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예를 들자면, 시리아의 알 아사드, 우크라이나의 야누코비치 문제 등의 사안 처리에 있어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제한을 문제 삼고, 러시아는 개별국가의 주권에 대한 무시 및 개입의 정당성 관련 문제를 제기하면서 대립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러시아의 시리아 내전 개입을 초래했으며, 미국으로 하여금 중동에서 미군 전력의 퇴각 속도를 늦추고, 새롭게 군사력을 투입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악화되는 미·러 관계 때문에 유럽의 안정은 위협 받았다. 현재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평가가 있지만 러시아의 경제적 어려움은 석유 가격하락으로 인한 착시현상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평가들은 결국 제재를 통해 러시아의 양보를 얻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에 힘을 더해주며, 이는 미·러간의 갈등구도 고착화와 유럽에서의 불안정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에 힘을 더해 준다.
그리고 오바마 행정부 시기 미국과 유럽은 사헬지역과 중동에서의 문제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파리 테러 사건에서 보듯 이 지역의 불안정은 유럽의 안보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사안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그동안 이 지역에서 ‘뒤에서 리드하기(leading from behind)’, ‘가벼운 발자국 남기기(leaving light footprint)’로 대표되는 전략을 지속해왔다. 이러한 전략이 상황악화를 초래했다는 비판은 점점 증대되어 왔으며, 역내 문제해결에 필요한 리더쉽 공백을 지속적으로 노정시켰다. 결국 시리아 문제는 악화되었고, 이슬람 극단주의와 러시아의 폭주를 초래했으며, 유럽의 안보가 위협받았다.
사헬지역과 중동의 불안정은 난민 증가, 테러리스트의 양산, 극단주의의 발호, 인도주의적 위기로 이어졌다. 사헬과 중동지역 국가들의 거버넌스 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기 때문에 극단주의가 대중들에게 설득력을 얻었고, 이는 테러리스트의 안정적 공급과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 최악의 난민 사태가 발생을 초래했다. 그러나 파리 테러로 유럽 각국은 집합적 문제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분열되었고 난민유입을 방지하기 위한 장벽을 세우고 있다.
최근 유럽의 안보상황이 혼돈 속에 빠지고 있는 사이 유럽 안보에 위협을 가하는 세력들은 하이브리드전을 수행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일례로 2015년 밀리터리 밸런스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이슬람국가(IS)의 활동을 ‘하이브리드전’으로 해석한 바 있다. 그동안 유럽인들은 ‘항구적 평화’ 개념에 매료되어왔다.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테러나 전쟁이 일정기간 발생할 수 있지만 하이테크로 무장된 전력을 활용하여 상황을 장악하고 평화를 유지한다. 그렇게 유럽은 국제사회에서 발생하는 전쟁의 혼돈으로 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하이브리전의 세계에서는 수개의 전선이 동시적으로 형성되며 각각에서 ‘전쟁 같지 않은 전쟁’을 수행한다. 유럽이 하이브리드전의 세계로 진입한 이상 이제 유럽에서 항구적 평화는 종말을 고할 것으로 보인다.
부형욱 공공정책학 박사 / 한국국방연구원 국방전략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