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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자료/함께하는 이야기

가을이면 더욱 그리운 ‘향수’의 고장

충북 옥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배기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시인의 ‘향수’란 시는 가을이 되면 더욱 애잔하게 심금을 울린다. 이 계절마다 충북 옥천에 있는 시인의 생가가 그리운 까닭이다. 그렇지만 역사를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옥천은 백제 성왕이 목숨을 잃은 관산성 전투의 비극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백제 성왕이 관산성 전투 당시 전사한 곳으로 알려진 구천>


시인의 노랫소리가 들려올 듯한 초가


충북 옥천은 섬세한 이미지 표현과 서정적인 언어로 한국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정지용(鄭芝溶, 1902~1950) 시인의 고향이다. 옥천읍은 경부선 옥천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시가지’와 전통적으로 옥천 행정의 중심지였던 ‘구읍’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시인의 생가는 시에도 등장하는 구읍의 ‘실개천’ 옆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궁창이 되었던 실개천은 최근 보존 노력 덕분에 송사리떼도 몰려다니지만, 시인이 노래한 그 실개천은 이미 아니다. 그렇지만 실개천 둑길을 걷노라면 시에서 얻은 감흥은 서서히 되살아난다.


                       

<'향수'라는 시로 잘 알려진 정지용 시인의 생가>



시인의 생가는 아담한 초가다. 깔끔하게 정리돼 있어 이웃마을로 마실 나간 시인이 금방이라도 되돌아 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정겨운 집. 따가운 가을 햇살 한 움큼 묻어있는 마루에 앉으면 어디선가 시인의 노랫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생가에서 남쪽으로 난 사립문을 열고 나가면 도랑에 걸려있는 길쭉한 돌다리가 보인다. 그 옛날 생가 앞의 실개천에 놓여있던 청석이다. 이 돌은 일제강점기엔 ‘황국신민서사’라는 글귀가 새겨진 채 신사 앞에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후 실개천에 묻혀있던 것을 발굴해 생가와 문학관을 잇는 다리로 쓰고 있다.

                           

<정지용문학관 앞에 세워져 있는 정지용 시인 동상> 



다리를 건너면 시인의 높다란 동상 뒤로 시인의 시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
인 정지용문학관이 눈에 들어온다. 전시실 입구엔 방문객이 기념촬영을 할
수 있도록 정지용의 밀랍인형을 마련해놓았다. 시인과 기념사진(?)을 찍고
문학전시실에서 시인의 육필원고와 ‘향수’ 초간본을 구경한 다음, 헤드폰

을 쓰고 낭송되는 시도 들어본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 산꿩이 알을 품고 /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 (중략) //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정지용 시인의 ‘고향’ 중에서)


1932년 발표된 ‘고향’은 정지용 시인의 대표시라 할 수 있는 ‘향수’보다 10년쯤 뒤에 쓰였다. 이 두 편의 시는 10년이라는 세월을 두고 그리움과 상실감 사이를 오가고 있다. 외지를 떠돌다 고향으로 돌아온 시인에게 고향은 이미 옛 고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후세에 이 시를 읽는 나그네는 시인이 잃었다는 그 고향조차 그립다.


정지용문학관 관람시간은 09:00~18:00.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추석 휴관. 관람료와 주차료는 없다. 전화 043-730-3588 www.jiyong.or.kr


                            

<구읍의 춘추민속관은 1856년에 건축된 고택이다>



옥천읍엔 정지용 시인의 생가 외에도 볼거리가 여럿이다. 옥천향교 등 유서 깊은 문화재를 비롯해 육영수여사 생가, 그리고 유서 깊은 죽향초등학교 옛 건물 등의 볼거리가 남아 있다. 1960~70년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골목길도 아주 정겹다. 특히 1856년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진 고택에 꾸며진 춘추민속관을 기웃거리다보면 옥천 고을을 호령하던 양반의 헛기침 소리가 담장 너머에서 “어흠” 하고 들려올 것만 같다.


옥천읍 남쪽에 솟은 장용산(656m)은 옥천 주민들이 아끼는 산이다. 그 기슭에 터를 잡은 용암사(龍岩寺)는 552년(신라 진흥왕 13년) 창건된 사찰. 보물로 지정된 쌍삼층석탑(보물 제1338호)은 대웅전 앞이 아니라 경내가 한 눈에 조망되는 북쪽 낮은 봉우리에 세워져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성행했던 산천비보(山川裨補) 사상에 의해 건립된 것이라 한다. 사찰 뒤쪽 암벽의 마애불(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7호)은 신라 도공이 염불하는 마의태자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조각한 미륵불이라 전한다.


관산성 전투의 현장이었던 옥천


한편, 옥천은 삼국 시대엔 삼국이 쟁패를 겨루던 요충지였다. 이 고을에서 발굴된 고성(古城)만 해도 무려 40개가 넘는데, 그중에서도 옥천읍 서쪽 군서면 월전리의 관산성(管山城)은 삼국시대에 한반도의 패권을 바꾼 관산성 전투의 현장이기도 하다.


잠시 과거로 돌아가 보자. 때는 고구려·백제·신라가 한반도에서 패권을 다투던 삼국시대. 백제는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에 패하면서 개로왕이 목숨을 잃자 어쩔 수 없이 도읍을 웅진(공주)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웅진시대의 백제는 초기엔 국운이 침체됐지만, 무령왕이 즉위한 후엔 다시 중흥을 이루기 시작했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聖王, 재위 523~554년)은 국내적으로는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양나라·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등 국력신장에 힘썼다.


성왕은 절치부심한 끝에 551년 신라 진흥왕과 힘을 합쳐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553년, 백제가 병합하려던 한강 유역을 신라의 배신으로 빼앗기게 되자 성왕은 공격 계획을 세운다. 554년 벌어진 백제와 신라의 운명을 건 관산성 전투는 이렇게 시작됐다.


백제군은 가야와 왜국의 군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신라를 공격했다. 즉 관산성 전투는 4개국이 맞붙은 국제전이었다. 첫 전투에서 백제연합군은 승리를 거두었고, 신라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백제연합군은 곧바로 왜국에 원군의 증파를 요청했다. 이참에 확실히 승기를 잡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백제의 편이 아니었다.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한밤중에 관산성으로 가던 백제 성왕이 신라군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백제의 망명자들이 주축이 되어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서기>는 당시 전투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명왕(성왕)은, 아들 여창이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행군하고 침식을 거르는 일이 잦아 이를 걱정하여 스스로 가서 위로하려 했다. 신라는 명왕이 친히 온다는 말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 길을 끊고 쳐 격파하였다. 이에 고도(苦都)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청컨대 왕의 머리를 베게 해주십시오.’ 하니 명왕이 대답하기를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맡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고도가 말하기를 ‘우리 국법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도 마땅히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말하기를 ‘과인은 매양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참고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목을 늘여 베임을 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인 후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지난해 처음으로 열린 성왕 추모제>

성왕이 이렇게 처참하게 전사하자 전의를 상실한 백제군은 전투에서 참패했고, 아들 여창은 단기필마로 겨우 전장에서 도망쳐 살아나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조에는 ‘여러 부대들이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좌평 4명과 사졸 29,600명을 베었으며,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창은 패전의 책임과 부왕에 대한 애도 때문에 스님이 되려 했지만, 신하들의 권유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가 바로 위덕왕(威德王)이다. 그는 관산성 전투 이후 혼란에 빠졌던 백제의 민심을 추스르고 다시 국력을 모아 나간다. 하지만, 신라의 극적인 역전승으로 끝난 관산성 전투는 한반도의 세력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삼국 중에서 한반도 남동쪽에 치우쳐 있어 가장 뒤쳐져 있던 신라가 최후의 승자로 올라서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


지금 옥천읍과 군서면 경계에 솟은 삼성산(304m)을 적시고 흘러가는 서화천 일대가
백제 성왕 사절지(聖王 死節地)로 전해오는 구천(狗川)이다. 옥천 읍내의 4번 국도와 37번 국도가 만나는 삼양 사거리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금산 방면으로 2km 정도 달리면 서화천에 걸린 나지막한 다리가 나타나고, 그 다리 건너편으로 물줄기가 내려다보인다. 바로 백제 성왕이 신라의 복병에게 사로잡힌 구천이다. 주민들은 이 일대를 ‘구진베루’라고 부르는데, 주변엔 ‘진터벌’, ‘말무덤’, ‘군전리’ 등 옛 전장터임을 알려주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다.


전쟁사 전문가들은 당시 백제연합군의 전사자 수가 29,600명이라는 사서의 기록을 근거로 신라의 병력은 적게 잡아도 연합군과 비슷했거나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신라와 백제연합군의 병력을 합치면 최소 6만 명 이상이 이 부근에서 혈전을 벌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관산성 전투의 위치가 학술적으로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많은 학자들은 관산성을 ‘옥천 서쪽의 삼성산성과 그 주위에 이어진 용봉·마성산·장용산 등의 방어시설을 통틀어 부르던 이름’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삼성산은 군의 서쪽 5리에 위치해 있고 고성의 터가 남아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대동여지도에도 삼성산 위치에 고성이 있었음을 표시하고 있다.


이렇듯 관산성의 중심을 이루는 삼성산은 높이 300m 정도의 나지막한 산이다. 옥천 현지엔 관산성 이정표는 따로 없고, 옥천읍 양수리에서 삼성산 이정표를 따라가야 한다. 정상까지는 40분 정도 걸린다. 망대 위에서 동쪽을 내려다보면 옥천 읍내와 그 너머로 굽돌아 흐르는 금강 물줄기가 아득하게 펼쳐진다.


 사진 & 글 : 여행작가 민병준 
sanmin@empal.com


<생생 여행 정보>

●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옥천 나들목→옥천 (수도권 기준 2시간30분 소요)


●맛집 =
옥천의 별미는 올갱이(다슬기) 국밥이다. 올갱이는 맑은 물에서 사는 것이라야 제대로 된 국물맛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옥천의 식당들은 금강에서 잡아 올린 올갱이를 주로 사용한다. 옥천군청 부근에 있는 금강올갱이(043-731-4880), 별미식당(043-731-4423) 등이 유명하다. 올갱이국밥 6,000원, 올갱이무침 10,000~30,000원.


                                                                 <올갱이 국밥>


●숙소 =
옥천읍내에 옥천관광호텔(043-731-2435)을 비롯해 모텔급 숙박업소가 많다. 구읍에 있는 전통 가옥인 춘추민속관(043-733-4007)은 한식을 차리고 민박도 친다. 단체 손님도 고택 체험 숙박이 가능하다. 이외에도 마당넓은집(043-733-6350), 원조구읍할매묵집(043-732-1853) 등 숙식할 곳이 많다.


금천계곡을 끼고 있는 장용산자연휴양림(043-730-3474)을 이용하는 것도 괜찮다. 요금은 숲속의 집(산막) 43㎡(5동) 60,000원, 49㎡(2동) 70,000원, 66㎡(2동) 120,000원. 주차비 승용차 2,000원. 전화 043-730-3474 www.cbhuyang.go.kr/jangyongsan


※참조 =
옥천군청 문화관광과 043-730-3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