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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자료

6ㆍ25 전쟁 때의 격전지: 백마고지(白馬高地)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백마고지는 6.25동란 당시 한국전쟁의 피비린내나는 격전지였다. 1952년 10월 6일, 철원의 위치한 작은 고지를 두고 대한민국 국군 제 9 보병사단과 중공군 제 38군 3개사단이 쟁탈전을 벌인 끝에 9사단이 승리한 전투를 백마고지 전투라고 한다.
중공군이 대공세에 의해 10일간이나 계속된 백마고지 전투는 약 30만발의 포탄이 이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며, 고지의 주인도 24번이나 바뀌었다.

Q. '백마고지' 이름의 유래?
A. 격렬하고 치열했던 전투가 끝나고 보니 395미터의 무명의 작은 고지가 1미터정도 낮아져서 마치 누워있는 백마처럼 보인다고 하여 '백마고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군사적관례에 따라 395고지라고도 불리운다.

 

 ▲ 백마고지 전승비

국군의 승리로 막을 내린 백마고지 전투에서 30만발 이상의 포탄이 퍼부어졌으며 국군 3,500여명, 중공군은 1만 4천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국군 제 9사단은 백마고지 전투의 대승을 계기로 백마사단이라 명명되었다.

 ▲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
 

당시 백마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운 국군 제 9사단 장병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이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가 건립되었다. 이 비에는 당시 전투의 격렬함과 많은 사람이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했는지 알려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Q. 백마고지 전투가 그토록 치열하였던 이유는?
A. 백마고지가 국군의 주요보급로를 장악할수 있는 전략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철원과 주변의 평강, 김화는 곡창지대로서 백마고지를 점령하는 쪽은 철의 삼각지 평야를 확보하고 군의 주 보급로를 확보하게 되어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할수 있다는 계산하에 남북이 치열한 공방을 벌인것이다.

▲ 5사단의 열쇠 부대마크

현재 백마고지는 육군 제 2136부대 5사단이 관리를 한다.


▲ 백마고지 위령비

 백마고지 전투에서 희생된 수많은 아군, 적군의 영혼을 진혼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위령비 앞에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전사한 유공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도 있다.

▲ 백마고지 전투 상황 언론 보도

 

▲ 백마고지 전투 당시 아군의 군장비


 

▲ 백마고지 전투 상황에 대한 설명

중국인민지원군은 총 병력 44,056명에 각종 포 55문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김종오 소장 휘하의 국군은 병력2만 명에, 제 51,52,53포병대대 그리고 제 53전차중대가 있었다. 또한 미군은 제 213자주포병대대와 제955중포병대대, 제 73전차대대 등을 지원하였다.

중공군은 이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전투의식이 박약한 노약자와 비당원을 제외한 정예병력을 동원하여 백마고지와 유사한 지형에서 3개월간 예행연습을 실시했으며, 공격 전 고지 동쪽의 봉래호를 폭파하고 역곡천을 범람시켜 국군을 고립 도살을 획책했다. 또한 이번 작전을 통해 철원을 중심으로 한 전략적 요지0확보, 수도권 지역 대공세를 위한 공격 발판구축, 중부전선 일대 국군 주 보급로 차단을 기도(企圖) 하였다.


   ▲ 백마고지 전투 기념비


 언덕위에 자리잡은 높이 22.5m의 기념탑은 아군의 기상을 널리 떨치는 듯 꽤 웅장한 모습을 띠었다.

Q. 백마고지 전투 전승 의의?
A. 국군은 12차례의 걸친 백마고지 공방전에서 승리하면서 중부전선의 요충지를 확보했다. 또한 중공군과 민족적 자존심이 걸린 격렬한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국민적 사기가 고양되었다. 이로써 중공군의 공세의지를 분쇄하게 되었고, 이는 휴전협상 중 남한 측 입장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전 세계에 유래없는 대승을 떨쳐 국군의 위용을 과시했으며 국군의 성장 발전에도 기여했다.

▲ 백마고지는 현 군인이 직접 안내한다.

백마고지는 대한민국의 DMZ 안에 위치하고 있어 민간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한철희 기자 (국방홍보원 어울림 기자, cp1613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