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자료

6.25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첫 전투지를 아십니까?

■ 내 고장 역사현장, 오산 유엔군초전비를 다녀와서

 
현재, 오산시를 가로지르는 세마역 부근에는 신도시 건설이 한창이다.
공사현장 인근에는 우뚝솟은 기념비와 돌격대형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많은 차량이 지나가는 1번 국도변에 세워져있는 이 조형물은 왜 세워져 있을까?

그 궁금증을 풀기위해 배경을 알아보았고, 그 현장을 직접 답사하였다.

▲ 유엔군 초전기념비 전경

옛부터 오산 세마지구는 전략적으로 요충지였다. 이를 증명하듯 근방에는 독상성이 있는데, 독산성은 백제시대부터 일대에 산성이 쌓아져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군사적 요충지로 사용되어져왔다. 특히, 조선시대때는 권율 장군이 이 곳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왜군 수만명이 길을 나누어 노략질 하며 북상하는 것을 차단함으로서 유명하게 되어졌다. 이곳에는 권율장군의 전설이 내려오기도 한다. 1593년 왜군은 독산성 내부에 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 한지게를 산위로 올려보내 조롱하였다. 이에 권율 장군은 물이 풍부하다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백마를 산위로 끌어올려 흰쌀을 말에 끼얹으며 목욕을 시키는 시늉을 하였다. 이를 본 왜군은 산꼭대기에서 물로 말을 씻길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고 오판하고 퇴각하게 되어 그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로 인하여 이곳을 세마(洗馬)로 불리우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같이 세마지구는 서울로 진입하는데 아주 중요한 위치였다. 6.25 한국전쟁 때도 매우 중요한 곳으로 주요 교전이 일어난 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1번 국도가 지나가는 죽미령에서의 전투는  6.25 한국전쟁 당시에 유엔군(美, 스미스 대대)이 북한군을 최초로 맞딱드려 전투를 치룬 것으로 유명하다. 이 전투는 오산과 수원 부근에서 죽미령 고개에서 전투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른바 '죽미령전투' 혹은 '오산전투'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 유엔군과 북한군의 전투현황을 보여주는 안내도

한편, 이 죽미령전투는 묘하게도 지난 해 "M본부"에서 인기리에 방영했던 '로드 넘버원'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드라마에서는 1번국도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는데, 이 전투 역시 1번국도가 지나가는 죽미령에 일어난 전투이고, 그 전투모습도 상당히 유사한 것이다. 우세한 화력으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을 유엔군은 소총과 박격포등으로만 수비를 했었으니 말이다.

그 '죽미령전투'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6.25 한국전쟁 발발이후 유엔군으로 선발대로 540명으로 구성된 스미스부대는 대전차무기없이 급하게 전선으로 파병이 이루어졌다. 그 곳이 바로 오산-수원의 죽미령이었고, 이 곳에서 부대원은 개인호를 파고 임시전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한국군은 이미 오산 이남으로 후퇴한 상황이었고 상황이 매우 급박했다.


서울을 함락한 이후 북한군은 파죽지세의 기세로 밀고 내려왔는데, 스미스부대 역시 커다란 피해를 입으며 패배를 맡보게 되었다. 북한군의 전차를 6대를 부수고 상당한 전과를 세웠으나 북한의 105전차여단과 인민군 제5사단의 막강한 공력력을 저지할 수 없었다. 스미스부대는 결국 이 전투에서 단번에 165명의 희생자를 내고 후퇴를 하였다.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던지 한 종군기자가 '스미스부대 전멸'이라는 기사로 전세계에 알렸다. 이는 곧 북한군의 공력수준이 내전 수준이 아닌 2차대전의 승전국 미군을 압도할 군사력을 지닌 공산주의 팽창 전쟁이라는 것을 시사하였다.

유엔군은 이 전투를 통해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유엔군을 본격적으로 결성하게 되었다. 한편, 6.25참전 장군 중 한명인 윌리엄스 장군은 60년 전 이곳에서 산화한 165명의 장병과 죽미령전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대들은 전과는 빛났다. 그 희생으로 당시 우리는 낙동강 전선을 성공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시간과 힘을 얻었고, 결국은 자유 대한민국을 살리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과 미국은 단단한 우호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여러분의 희생에 바탕이 된 것이라고 말하겠다"

즉, 죽미령전투는 유엔군 참전의 분수령이 된 전투였으며, 6.25 한국전쟁의 가장 주요한 전투 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 유엔군 초전기념비 안내판과 봄을 알리는 꽃들

나는 이렇게 치열한 전투를 떠올리며 그 현장을 직접 답사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주요 격전지를 직접 둘러보았으나 어디를 보아도 참혹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시끄러운 차량소리가 가득한 1번 국도 옆에 차가운 기념비만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 유엔군 초전기념비 앞의 1번 국도와 유엔참전국의 깃발들

그리고 유난히 커다란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보니 그 나무 밑에는 1986년 7월 5일에 Charles B. Smith가 심었다고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그가 바로 당시 죽미령전투의 대대장이다. 165명의 숭고한 희생에 그는 다시 이곳을 찾아 한 그루의 식수를 남기고 그들을 기린 것이다.
 



그 들은 머나먼 타국까지 날아와 이름도 모르고 얼굴로 모르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서 쓰러졌갔을 것이다. "자유"라는 이념 아래에 희생을 한 그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곳을 찾았을 때 날씨가 별로 안좋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방문객은 유일하게 나 뿐이었다. 일반적인 한가로운 공원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념비로 올라가는 길은 벚꽃으로 둘러쌓여 이뻤는데, 이처럼 유엔군초전비 공원은 봄꽃으로 둘러쌓여져 있었다.  한편, 바로 옆에는 유엔군의 참전을 기념하는 공원이 더 크게 조성되고 있었다. 유엔군초전비가 위치한 곳이 동탄신도시와 세마신도시의 사이에 있어 이 곳이 보다 더 잘꾸며지기 때문이다. 공사가 진행중이고 공원도 아직도 조성 중이라 비록 가까이는 갈 수 없지만 그 현장을 멀리서 사진으로 담아보았다. 호주 국기도 보이고 다른 여러 나라 국기를 보이는 것을 보아하니 유엔군으로 참전한 주요국을 기념하고 있는 듯 했다.


나중에 이곳이 조성이 된 이후에 다시 찾아보아야 겠다. 내가 다시 찾을 때에는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찾았으면 한다. 무엇보다 이 곳을 둘러보며 이 땅을 지켜주고 우리를 위해 희생한 것에 대하여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했으면 한다.

글/사진. 박종근 기자 (국방홍보원 블로그 "어울림" 기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