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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66년전 그날 그리고 오늘

인천상륙작전은 국제연합(UN)군이 인천 월미도에 상륙하여 6·25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역사적인 군사작전이었습니다. 9월 15일 새벽, 미 구축함의 첫포탄의 발사로 시작되 연합군은 월미도 해안 그린비치 상륙에 성공합니다. 5000분의 1 확률을 뚫고 성공한 위대한 순간이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뒤바꾼 결정적 순간이기도 합니다.

한국 해병 4개 대대, 미국 제7보병사단, 제1해병사단은 전격공격을 감행하여 인천을 점령하고 김포비행장과 수원을 확보함으로써 인천지역을 완전히 수중에 넣었습니다. 이어서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여 26일 정오에는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서울수복에 성공하게 됩니다.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지 66주년이 됐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그날의 월미도 그리고, 오늘의 월미도 현장을 여러분께 소개해드립니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던 이 곳 월미도는 매년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행사가 열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인천 월미도 유람선 선착장입구에 들어서면 우측에 세워져 있는 인천상륙작전 상륙지점중 하나인 그린비치를 알리는 표지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이 실제 상륙이 이루어졌던 지점은 아닙니다. 월미도는 이후 매립이 진행됨으로서 실제 상륙지점에서 해안쪽 직선거리인 이 지점에 표지석을 세운 것입니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 상륙 자체가 쉽지 않아 성공 확률 5000분의 1로 평가되었던 작전명 크로마이트(chromite)1950년 9월 15일 새벽 7만5000명의 연합군은 1차 상륙지점인 월미도 그린비치(Green beach)에 성공적으로 상륙합니다. 이어 같은 날 오후 블루비치, 레드비치 상륙이 이어졌습니다.

 

 

위 사진은 라이프(Life)지가 보도한 인천상륙작전 진행도입니다.

그린비치에 정박한 연합군 함대의 모습과 월미도에서 인천시가를 향해 불뿜는 화기, 레드비치를 향해 질주하는 상륙정들의 모습에서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 목표지점으로 상륙이 이루어졌던 당시 그린비치의 실제 지역은 바로 이곳입니다. 현재는 매립되어 월미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당 월미산은 포격으로 인해 사진에서처럼 벌거숭이 산이 되어버렸습니다. 월미산은 2001년 개방되기까지 반세기 동안 군사보호구역으로 엄격한 통제가 되었었는데 현재는 월미공원으로 조성되어 관광객들과 시민들의 휴식처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월미공원의 나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의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린 밑둥이 잘려나가고 그 곳에 수많은 가지들이 자라서 큰 나무를 이루고 있습니다. 가지가 잘려나가고 몸통이 쪼개지고 뿌리에 폭탄의 파편이 박혀 있는 나무들.....모두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입고도 다시 꿋꿋하게 일어선 나무들입니다.

 

 

인천시 서부공원사업소는 인천상륙작전의 집중 포격 속에서도 살아남은 월미공원 내 대표 수목 6종, 7그루를 ‘월미 평화의 나무’로 선정하여 관리하고 있습니다.

월미 평화의 나무는 인천상륙작전 이전부터 월미공원에 생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목을 발굴하여 인천 상륙작전 이전 생육 근거(70년이상)가 확보되고(상징성), 왕성하게 성장하고 있으며(대표성), 견학이 가능한 나무(접근성)를 선정기준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월미 평화의 나무는 월미공원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나무들이 보여주는 생생한 이야기와 함께 그 날의 교훈을 함께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 첫번째 평화의 나무인 "치유의 나무(82년)"

 

은행나무는 할 수만 있다면 쏟아지는 모든 총알을 자신의 품으로 막아내고 싶었다.
인민군과 마을 사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나무가 쓰러졌다.
‘인천상륙작전’
승리에 대한 함성이 피로 물들인 숲과 바다를 떠나갈 듯 울렸다.
그러나 은행나무는 알고 있다.
최고의 전략은 전쟁이 아니라 바로 평화라는 것을.

 

▲ 두번째 평화의 나무인 "그날을 기억하는 나무(104년)"

 

은행나무는 오늘도 월미숲 입구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나무는 그들이 아무말 하지 않아도 그들의 마음속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슬픔과 아픔, 마음속 이야기들을....
결코 아픔을 경험해보지 않으면 결코 느낄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은행나무 역시 누구보다 아픔과 고통을 견디며 살아왔기에.....

은행나무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월미산에 함포사격으로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던 그날!
은행나무의 뿌리에도 파편이 박혀 들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폭격 속에서 살아 서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이후로 은행나무는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게 되었다.

은행나무와 같은 아픔과 슬픔을 겪은 사람들이 은행나무 밑으로 찾아왔다.
은행나무는 때론 어머니의 따뜻한 품처럼, 때론 친구처럼, 아무말없이 그들을 품어주고 평안을 주고 품어준다.

그들이 울면 나무도 가지를 떨며 함께 울었고, 그들이 기뻐할 때 나뭇잎을 흔들며 함께 기뻐해주었다.

사람들이 털어놓는 수많은 사연들이 나이테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어머니의 품처럼 넓고 넉넉한 가지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놀라운 소생력으로 은행나무는 자신을 스스로 재창조했다.
은행나무는 부드럽고 넉넉한 품으로 사람들을 품어주었다.
사람들이 은행나무의 넉넉한 품에 기대어 힘을 얻고 위로를 얻고 살아갈 힘을 얻었다.
오늘도 은행나무는 숲을 찾는 한사람 한사람을 기억하고 가슴속에 품어 주고 있다.

 

 

월미공원에는 2011년 예비역 대한민국 특수임무수행자 동지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해군첩보부대(UDU) 충혼탑이 있습니다. 1948년 6월 10일 창설된 해군첩보부대는 수백회의 대북 비밀공작을 수행한 부대로 특히 1950년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영흥도 탈환, 팔미도 등대 확보 공작을 성공시킴으로써 인천상륙작전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반세기 동안 이곳 월미도에 주둔했던 해군 첩보부대의 위령탑에는 맥아더사령관의 어록 중 해군첩보부대와 관련된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본인은 대한민국 해군의 우수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한민국 해군첩보부대의 활약은 훌륭했습니다. 그 첩보들은 나의 상륙작전 결심을 더욱 확고히 해주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 해군 첩보부대원들에게 미국의 은성훈장을 상신했습니다."라고...

 

 

 

 

아마도 인천상륙작전을 이야기할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더글라스 맥아더일 것입니다.

 

▲ 한국 전쟁 중 인천 상륙 작전을 지휘하는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는  6·25전쟁에서도 UN군 최고사령관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였습니다. 하지만 중공군과 전면전을 두고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 해임되었고 '노병은 죽지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최초로 조성된 서국식 공원인 인천 자유공원은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비롯해 인천 상륙작전, 인천 학도를 기리는 기념비 등 역사 유적이 자리잡고 있으며 잘 조성된 산책로 등으로 시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습니다. 이곳의 이름은 맥아더장군의 동상이 세워진 1957년 10월 3일부터 자유공원으로 불리워지게 됐습니다.

 

 

촬영중에 뜻밖에도 비둘기가 맥아더장군의 동상 머리위에 내려와 앉았습니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와 맥아더 장군 동상이 꽤나 절묘해보입니다.

 

 

맥아더장군의 동상 아래 건립문에는 "장군과 그 휘하의 용감한 유엔군 장병들이 우리와 자유를 위하여 이곳에서 취한 행동은 영원히 잊지 못할 이다. 그리고 공산주의 유독한 투에 대한 최후 투쟁에 승리를 거둘때까지 전쟁에는 승리에 대신할 것은 없다라고 말한 분 이 역시 장군이었"하고 쓰여 있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은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위기에 놓인 대한민국을 지켜내기 위해 자유수호의지를 불태웠던 우방국가 젊은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영원히 기리고 그 뜻을 소중히 기념하기 위하여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이곳에 1984년 온 시민의 정성으로 건립되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은 전쟁의 아픔을 제대로 모르는 전후세대들에게 조국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호국용사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느낄 수 있도록 실증적인 교육장으로서 당시 유물과 기록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66년 전 북한의 적화야욕에 맞서 자유대한민국을 위기에서 지켜내기위해 감행된 인천상륙작전, 그 위대한 역사의 현장을 66년전과 현재를 비교하며 돌아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불리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확를 5000분의1인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당시 연합군들이 얼마나 어렵고 치열하게 싸웠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며 참전국의 수많은 전우들이 힘들게 싸워서 되찾은 대한민국, 자유는 절대로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겠습니다.

 

 

 

<글/사진 임영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