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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대신 총을 들어야했던 학생들의 외침 -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펜 대신 총을 들어야했던 당시 학생들의 구국 일념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몇일 전 본 블로그에 포스팅 된 '장사상륙작전을 아시나요?' 를 통해 772명으로 구성된 대한민국 학도의용군들의 활약상을 포스팅해 드린 바 있습니다.

 

 

 

이렇게 6·25전쟁 당시 학생의 신분으로 국군으로 참전한 학도의용군들이 있습니다.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때 국내외 학생들은 펜대신 총검을 잡고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자진 참전하였습니다. 꽃다운 나이로 7,000여명이 산화하였으며, 국내학생 5만여명과 재일 유학생 641명이 전투에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약 20여만명이 후방 선무 및 공작, 위문활동, 잔당 소탕작전등에서 활약을 했습니다.

 

 

 

특히, 포항은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육군 제3사단 소속 학도의용군 71명이 포항여중(현, 포항여고)에서 단독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김춘식외 41명이 산화한 곳이며 전국에서 제일 많은 학도의용군이 희생된 격전지입니다.

 

 

포항 출신 생존 학도의용군은 1979년 8월부터 이곳 탑산에 터를 잡고 학도의용군 전적물 보존, 추념행사 및 현지 안보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1996년 6월 청와대 등 각계에 건의 및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건립을 추진, 국방부의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비중 일부 국비 지원으로 포항시에서 2001년 3월에 착공하여 2002년 7월에 본 기념관을 완공하게 된 것 입니다.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 학교와 학생수가 담긴 동판

 

 

기념관에는 학도의용군 연혁, 학도의용군의 유품, 사진 등 학도의용군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학도의용군의 주요 전투인 형산강전투, 천마산(96고지)전투, 학도병 단독전투 등의 활약상을 영상과 사진으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학도의용군의 자료가 담긴 사진과 신문기사들

 

6·25전쟁 당시 사용된 총기류와 학도의용군이 사용했던 총기류

 

6·25전쟁 당시 우리 국군의 군복과 북한군 군복

 

학도의용군 유품·유물 전시

 

 

 

전몰학도 명단

 

전시학생증

 

 

 

 

 

"어머니,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영화 '포화속으로'를 통해 알려진 포항여중전투에서는 학도병 71명이 북한군을 맞아 싸우다 48명의 목숨을 바쳐 적의 진격을 지연시킴으로서 학도의용병을 대표하는 전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전투에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포항여중전투에서 전사한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군이 어머니 앞으로 썼다가 부치지 못한 편지, 1950년 8월 11일 포항여중전투에서 전사한 그의 옷 속 수첩에서 발견된 편지가 있습니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 같습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71명 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두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 주시던 백옥 같은 청결한 내복과 내가 빨아 입은 내복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를 생각해 냈는지 모릅니다. 죽은사람에게 갈아 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 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다시 쓰겠다는 이우근군의 피맺힌 편지는 여기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17살이란 꽃다운 나이에 전쟁이란 공포와 닥쳐올 죽음 앞에서 유일한 믿음인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지막 글...! 6·25 전쟁 당시 이우근 학도병의 주머니속에서 유품으로 발견된 피로 얼룩진 메모지에 적힌 글로서 이를 오래도록 기리고자 기념관 내부와 기념관 뒷산 포항지구 전적비 옆에도 비문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 학도의용군 관련 사진자료들이 전시된 2층 로비

 

 

 

 

 

 

현재 포항여앞에  조성공사가 한창인 학도의용군 6·25전적비는 1950년 8월 11일 중무장한 북한군이 아군 3사단 후방지휘소를 기습해 올때 학도의용군 71명이 소총 한자루씩 들고 8시간 30분동안 버티며 혈전을 벌이다 숨져간 당시 학도병들의 희생으로 무방비상태의 피만민들이 몸을 피할 수 있었고 한국군의 진영이 재정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을 기념하였습니다.

 

 

포항시 북구 용흥동에 위치한 기념관 관람 및 관련문의는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 054-247-8000, 245-6706) 으로 하면 되며, 관람시간은 월요일은 휴무(기타 휴관일 : 추석, 설, 신정연휴 및 공휴일 다음날)이고 휴무일을 제외한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하절기( 3월 ~ 10월)는  09:30 ~ 18:00, 동절기(11월 ~ 익년2월)는 09:30 ~ 17:00 까지 이며 관람소요시간은 40분정도이고 료는 무료입니다.

 

▲ 포항지구 전적비

 

 

"관동의 요항, 여기 형산강변의 격전지, 충용한 국군 제3사단 및 지원부대 장병들은 유엔군의 도움을 받으면서 44일간의 혈전을 치루어 북괴 2개사단의 공격을 끝내 물리치고 말았으니, 이 터전은 지킴에 있어서는 호국의 생명선이요, 처너감에 있어서는 북진의 시발점이었다."  

포항지구 전적비 비문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군이 어머니 앞으로 썼다가 부치지 못한 편지 비문

 

 

▲ 1950년 8월 11일 새벽, 김춘식외 학도의용군들이 포항에서 장렬히 전사한 것을 기리고 6·25전쟁 당시 희생당한 학도의용군들의 넔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전몰학도 충혼탑   

 

 

 

소속도 군번도 없이 조국을 위해 목숨바친 학도의용군. 6·25 전쟁으로 많은 영웅들과 호국영령들이 있지만 우리는 이름없이 싸워준 이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글/사진 임영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