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쟁사

6·25전쟁에서 영화‘퓨리’의 실사 판이 벌어지다


                     6·25 발발 66주년 특별기획                   

실패한 북한군의 전차운용


 

6·25전쟁에서 북한군의 전차는 전쟁초반의 판도를 뒤흔드는 강력한 무기였다. 난생처음으로 전차를 본 우리 국군장병들에게 전차는 그야말로 괴물 같은 무기였고, 마땅한 대전차 수단이 없었던 국군은 육탄으로 적의 전차를 저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한군은 전쟁개시 6개월도 안 되서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전차 및 기갑전력을 말아먹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전차운용교리를 간과했던 북한
비록 북한군 전차는 초전에서 가공할 위력을 보여주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군의 전차운용상의 과오를 저지른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북한군 전차가 그야말로 속속 ‘퍼지기’시작했기 때문이다. 전차란 튼튼한 물건 같지만 결코 장거리 주행에 적합한 차량이 아니다. 엄청난 무게의 쇳덩이가 움직여야 하고 충격이 큰 포격을 계속 해야 하기 때문에, 전차는 전장에서의 기동이 아닌 장거리 이동을 위해서는 기차나 트레일러 등을 사용해 옮겨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적절한 전차운반수단이 없었던 북한군은 그야말로 전차를 ‘굴려서’ 경상도까지 내려왔고,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수의 전차들이 마모를 견디지 못하고 작동불능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되자 하늘로부터 불벼락이 떨어졌다. 제공권만큼은 확실히 장악했던 미 공군의 F-51D 무스탕 전투기와 미 해군과 해병대의 F4U 콜세어 전투기가 주저앉은 북한군 전차 사냥에 나선 것 이다. 설상가상으로 공습으로 인해 북한군 전차의 예비 부품이나 새 전차의 운반이 점점 어려워졌고, 이로 인해 북한군 전차부대의 사정은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비록 북한군이 소련군의 지원 하에 전차를 운용했다고는 하나, 전차를 이용한 실전경험이 전무했던 북한군은 운용기간 내내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이는 곧 북한군 전차 궤멸의 신호탄이었다.

 

낙동강전선 때부터 많은 수의 북한군 전자들이 주저앉거나 미군의 공습에 의해 격파되었다. 미군 병사들이 격파된 북한군의 T34/85전차를 살펴보고 있다.

 

전세역전! 라이벌의 등장
8월 초부터 미군의 셔먼 ‘이지에잇(Easy Eight)’이 투입되기는 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공격력은 그럭저럭 쓸 만했으나 방어력이 북한군의 T-34/85에 비해 부족해 먼저 보고 쏘는 쪽이 유리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89전차대대 소속이었던 셔먼전차들은 북한군의 45mm 대전차포에 얻어맞아 8대나 격파되는 대 굴욕을 겪었다. 북한군은 장갑이 약한 전차의 후면이나, 혹은 전차가 경사를 오를 때 전차의 바닥을 공격하는 교묘한 전법을 사용했다. 미군은 북한군이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리라곤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 했다. 하지만 8월 중순이 되자 드디어 ‘진짜’가 나타났다. 바로 미군의 주력 전차인 M-26 퍼싱이 도착한 것이다. 두터운 장갑과 막강한 90mm포를 장착한 퍼싱은 북한군의 T-34/85와의 정면대결에서 단 한 대의 손실도 없이 순식간에 5대의 북한군 전차를 날려버렸다. 특히 북한군 전차병들은 그동안 보병만을 상대해온 탓에 대전차전투에 매우 서툴렀고, 먼저 미군 전차를 발견했음에도 초탄이 빗나가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되려 퍼싱의 반격에 격파되는 사례가 속출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북한군 전차병의 습관도 한 몫 한다. 북한군 전차병들은 미군전차와 조우 시 습관적으로 대전차 철갑탄이 아닌 대인 유탄을 장전해버렸고, 전차에 아무 효과가 없는 대인유탄을 맞은 미군 전차들은 바로 반격을 해 북한군 전차를 격파하곤 했다. 이렇게 8월을 기점으로 북한군 전차들은 빠르게 소모되어갔고, 이제는 북한군이 보병만으로 미군의 전차를 상대해야 하는 괴로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독특한 호랑이 도장을 한 미군의 셔먼 이지 에잇’. 오직 6·25전쟁에서만 볼 수 있는 패턴이다. 북한군이 보유했던 T-34/85에 비해 전반적으로 열세였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숙련된 전차병들의 덕분으로 대등한 전투를 벌였다.

 

격파한 북한군의 전차옆을 지나가는 M-26 퍼싱 전차. 북한군의 전차부대는 공습과 퍼싱이라는 두 가지 재앙에 견디지 못하고 점차 소멸되었다.

 

영화‘퓨리’의 실사 판이 벌어지다
북한군은 보유한 전차가 점점 바닥을 드러내자 전차를 곳곳에 흩어놓는다. 전차를 한 곳에 모아뒀다간 미군의 공습에 녹아날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영화 ‘퓨리’처럼 전차에 대해 보병 수백 명이 달려드는 무식한 전법을 쓰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미군 전차의 해치를 열고 수류탄을 던져 넣는 등의 방법으로 아주 미미한 효과를 보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전차는 보병을 그야말로 짓밟아버리는 무기였고, 또한 이런 무식한 전법을 구사하기엔 북한군의 숫자도 턱없이 부족했다. 1950년 8월 31일, 아주 극적인 상황이 펼쳐졌다. 두 대의 M-26 퍼싱 전차가 지키던 방어거점에 500명이 넘는 북한군 보병이 돌격해 들어왔다. 설상가상으로 한 대는 고장으로 못 쓰게 되었고, 얼마 안 되는 미군 보병들도 철수해버리자 전장에는 ‘어니스트 코우마’상사가 지휘하는 단 한 대의 퍼싱 만이 남게 되었다. 무려 아홉 시간의 사투동안 코우마 상사의 퍼싱은 포를 쏘고, 기관총을 난사하며 분투했고, 심지어 전차포를 돌려 전차위로 올라온 북한군 병사들을 밀쳐내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전투가 끝난 후 다시 미군이 이 지역에 왔을 때, 무려 250여구의 북한군 시체들이 널려있었다. 이 전투로 코우마 상사는 중상을 입었지만, 6·25전쟁에 참전한 미군 전차병으로써는 처음으로 의회 명예훈장을 받았다.

 

의회 명예 훈장을 받은 어니스트 코우마 상사(앞 열 왼쪽 두 번째)가 백악관에 초청되어 트루먼 대통령(앞 줄 가운데)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북한군 전차의 파멸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낙동강 일대의 북한군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북한군 전차 역시 제대로 된 전투조차 치러 보지 못 하고 빠르게 소모되어갔다. 특히 서울 일대에서는 아직 3~40여대의 북한군 전차가 있었으나, 이들 역시 미 공군과 퍼싱 전차의 밥이 되고 말았다. 9월 17일에는 김포공항을 방어하던 여섯 대의 북한군 T-34/85전차들이 미군의 퍼싱 전차와 정면 대결해 미군에 전혀 피해를 주지 못 한 채 전부 격파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전차뿐만 아니라 미군 보병과 우리 국군들도 새로 지급받은 ‘슈퍼 바주카’를 이용 해 북한군 전차들을 사냥해댔다. 일이 이렇게 되자 미군 전차들은 이제 여간해서는 북한군 전차를 조우할 수 없었고, 주로 보병들을 지원하는데 힘을 쏟았다. 9월 말이 되자 경기도 일대에는 단 한 대의 북한군 전차도 남아있지 않았고, 10월에 접어들자 6·25전쟁 개전 당시 북한군이 가지고 있던 모든 전차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비록 그 사이에 소련에서 150대의 T-34/85전차들이 추가로 들어왔지만, 이미 1,300여대의 UN군 전차가 한반도에 우글거렸다. 북한은 개전 초 진격했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LTE급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서울 시가지에서 미 해병대와 함께 북한군을 소탕중인 M-26 퍼싱. 이 무렵부터 북한군 전차는 여간해서는 찾기 힘들어졌다.

 

 

 

<글, 사진 : 이세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