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무기체계/기타

6·25전쟁 당시 사용된 무기 시리즈 ②북한군 10대 무기

6·25전쟁 당시 사용된 무기 시리즈②

북한군 10대 무기

 

 

6·25 당시, 소련의 전폭적인 군사지원을 받은 북한군은 완전히 소련군식의 편제와 무기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북한군과 최초의 접전을 가진 미군의 스미스 특임대대는 ‘북한군은 독일군과 비교해 손색이 없는 군대다’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그 만큼 전쟁 초반 북한군은 꽤 훈련도가 괜찮았고, 장비의 질은 우리보다 수준이 높았다. 지난 국군의 6·25전쟁 10대 무기에 이어 오늘은 북한군의 10대 무기를 알아보겠다.

 

➀ M1891/30 모신-나강 소총
M1891/30 모신-나강 소총은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 시절 만들어져 6·25전쟁까지 쓰인 소련의 주력보병소총 이었다. 볼트액션 방식으로 장탄 수는 5발이며 유효사거리는 750m정도이다. 총신의 길이만 1m이상, 총검까지 꼽으면 거의 170cm가 넘어 다루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어깨에 전해지는 강한 반동, 생각보다 낮은 명중률, 그리고 몇 발 쏘면 볼트 핸들을 당기기가 어려워지는 현상 등 문제점이 적지 않은 소총이다. 이 총은 가격이 매우 싸 웬만한 권총 가격으로 이 총을 살 수 있어 비상시에는 이 총을 장작으로 써 우크라이나의 장작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6·25전쟁 당시에는 북한군 보병의 주력소총으로 사용되었으며, 중공군에서도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이른바 ‘따꿍총’ 이라고도 불렸는데, 쏘면 ‘따꿍’소리가 나서 그렇게 불렀다고. 또한 6·25 전쟁에서는 모신-나강 외에도 총신이 짧아진 모신-나강 카빈형도 쓰였다.

 

6·25 당시 동계전투복을 입고 모신-나강 소총을 들고 있는 북한군 헌병의 모습. 총신이 짧은 카빈형으로 보인다.

 

➁ PPsh41/43 기관단총
6·25 전쟁에서 북한군의 상징과도 같은 기관단총이다. 일명 따발총. 핀란드와의 겨울 전쟁에서 핀란드군의 수오미 기관단총에게 호되게 당한 소련은 수오미 기관단총의 소련판을 만들게 되고 이게 바로 PPsh41이다. 상당히 견고하여 보수에 큰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으며 분당 약 1100발을 쏠 수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등의 근접 시가전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여 독일군도 많은 수의 PPsh41을 노획해 썼으며, 자신들의 MP40보다 장탄수가 풍부해 더욱 PPsh41을 선호했다. 하지만 소련군은 PPsh41의 71발들이 드럼탄창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 이 탄창은 보기에는 강력한 화력을 제공할 것 같았지만 탄창에 65발 이상 탄을 넣을 경우 급탄 이상이 생기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였다. 따라서 소련은 독일군의 MP40처럼 바나나형 막대탄창을 쓰도록 개량한 PPsh43으로 기존의 PPsh41을 대체하게 된다. 이 두 가지 타입의 기관단총은 6·25전쟁에서도 북한군에게 대량 보급되어 기관단총의 개념조차 희박했던 국군을 당황케 하였다. 소련은 이 기관단총들을 ‘혁명을 수출 한다’는 명목으로 전 세계에 마구 뿌렸고, 지금도 아프리카나 중동의 분쟁지역에서 종종 보이곤 한다.

 

좌측 사진은 PPsh41을 들고 있는 북한군 병사의 모습이다. 오른쪽은 사살당한 북한군의 PPsh43을 살펴보는 미군 병사의 모습.

 

➂ DP-28 데그차레프 경기관총
DP-28 데그차레프 경기관총은 보병이 휴대하고 다닐 수 있는 분대지원화기 도입을 위해 개발되었다. 개발 후 바로 다음해인 1928년도부터 정식 채용되어서 DP-28이란 명칭이 붙었고, 1960년 PKM 기관총이 개발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특징으로는 기관총 본체 위에 독특한 모양의 47발들이 원반형 탄창을 장착해 사용하며, 부품수가 적어 별로 고장 날 곳이 없는 터프한 기관총이다. 하지만, 의외로 원반형의 탄창이 잘 찌그러져 송탄불량이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6·25 당시 북한군에도 대량으로 공급되어 화력이 부족한 국군을 많이 괴롭혔다. 마찬가지로 위성국이나 친소국가에게 마구 뿌려댔기 때문에 아직도 적지 않은 수가 분쟁지역에서 쓰이고 있으며, 리비아 내전 때 시민군이 사용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북한군이 사용하는 DP-28 경기관총. 아직도 많은 수가 북한군의 예비기관총으로 쓰이고 있다.

 

➃ Su-76 대전차자주포
2차 대전 당시 소련이 개발한 다목적 경(輕)자주포. 독일군이 사용하던 돌격포의 성격이 강한 자주포이다. 소련군의 대표적인 만능 포인 ZIS-3 76.2mm 야포를 탑재해 대전차 임무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다. 실전에서도 호평 받았고, 신뢰성이 우수해서 정비를 좀 소홀히 해도 작동되기 때문에 험악한 전장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벼운 중량과 높은 출력 비는 험악한 지형에서 쉽게 이동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북한은 6·25전쟁 당시 150대 이상을 남침에 사용하여, 초반에 장비가 부족한 국군에 크나큰 출혈을 강요했다. 이후 국군에 장비가 인도되고 UN군이 증원되면서, Su-76은 빈약한 방어력 때문에 UN군과 한국군의 바주카, 대전차포, 탱크 등에 차례차례 파괴되었다. 이후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해 조선인민군의 대다수가 장비를 버리고 산중으로 후퇴하는 바람에 다량의 Su-76이 UN군에게 노획되었으며, 이중 일부 차량은 정비를 하고 국군 표시를 페인트로 칠한 다음 국군에 의해 운용되기도 했었다.

 

북한군이 버리고 간 Su76을 살펴보는 국군 병사. 다수의 Su76이 우리 국군에 노획되어 북한군을 향해 불을 뿜었다.

 

➄ T-34/85 중전차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을 승리로 이끈 주역인 T-34/85전차는 애초에 76.2mm의 주포를 장착하고 있었으나, 화력강화 차원에서 85mm 전차포로 바꾸고 전장에서 대 활약을 했다. 따라서 제식명칭이 T-34에서 T-34/85로 바뀌었다. 6·25전쟁 발발 당시에 북한군은 소련의 지원으로 T-34/85를 242대나 보유하고 있었고, 반면 국군은 단 한 대의 전차도 없었을 뿐더러 제대로 된 대전차 화기도 부족했다. 사실 북한군이 보유한 T-34/85는 전쟁의 모든 것을 좌우할 만한 결정적 요소는 아니었다. 전쟁 발발 한 달이 지난 1950년 7월 말부터 미군의 지원으로 다양한 전차 저지 수단이 확보되면서 이를 격파하는데 그다지 애를 먹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 전선 이후에 북한군에서 전차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기에 속절없이 밀려났던 쓰라린 아픔과 서울 도심을 T-34/85가 질주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두고두고 아픈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T-34는 개발 국이자 최대 사용국이었던 소련에서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등장하여 조국을 구한 구국의 전차로 지금도 대접받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국토를 짓밟은 침략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서울을 통과하고 있는 북한군 기계화 부대의 모습. 사이드카 뒤로 T-34/85가 보인다. 개전 당시 변변한 대전차 무기가 없었던 국군은 육탄으로 적의 탱크를 저지할 수밖에 없었다.

 

➅ BA-64 경장갑차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이 사용한 장갑차. 독일군의 Sdkfz222 장갑차의 경사장갑 등을 분석하여 디자인하였다. 장갑이 빈약하고 화력 또한 기관총 한정 이므로 정찰용으로 사용하던 장갑차이다. 6·25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장갑차로도 사용되었다. 북한은 철수하는 소련군으로부터 2대의 BA-64B 경장갑차를 양도받은 후 개전 전까지 57대의 BA-64B를 추가로 지원받아 사단의 정찰용, 제105전차여단 예하 제603경기계화연대(사이드카 연대)에 편제하였다. 대부분이 낙동강 전선에서 소모되어 사라졌다.

 

우리 국군에게 노획되어 후방으로 옮겨진 BA-64 경장갑차. 빈약한 무장과 방어력으로 종종 이렇게 노획되곤 하였다.

 

➆ M1927 보병지원포
2차 대전 발발 전에 개발되어 6·25전쟁까지 사용 된 소련제 보병지원포이다. 1차 세계대전에서 형편없게 패전한 러시아군은 소련으로 탈바꿈 후, 1차 대전의 전투를 면밀히 분석했다. 결론은 보병과 함께 간편하게 이동이 가능하며 보병을 지원할 수 있는 화포가 필요하다는 것. 아직 자주포가 나오기 전이라 소련군은 경량화한 76.2mm 보병지원포를 대량으로 배치한다. 비록 2차 대전 때는 만능화포인 ZIS-3에 밀려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 했지만, 6·25전쟁에서 북한군에 공여되어 북한군 포병화력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포병은 전장의 신’이라고 할 정도로 포병 편제를 중요시하는 소련군의 영향을 받아 북한은 우리 국군에 비해 강력한 포병편제를 가지고 있었고, M1927은 그런 북한군에게 매우 중요한 포병전력이었다.

 

국군을 향해 불을 뿜는 북한군의 M1927. 이동하기 간편하고 다루기 쉬운 이 포는 우리가 보유한 M-3야포와 비슷한 성격의 보병포였다.

 

➇ M1942 야포
M1927 보병지원포와 함께 북한 포병의 양대 축이다. 정식명칭은 ZiS-3 M1942.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주력 대전차포 겸 경(經)야포로, 원래 개발목적은 경야포였으나 사실상 대전차포로 많이 쓰였다. 일단 저렴한 생산비용을 가지고 빠르게 양산이 가능하며, 운용하기 편하고, 발사속도도 빠르며, 보병을 지원하는데도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소련군이 여러 가지 용도로 다양하게 사용했다. 이후 6·25 전쟁 때도 등장하여 한국군을 괴롭혔다. 이미 구식인 소형화포지만 분해해서 산악지대까지 끌고 와 이른바 산악포로 운영했는데, 대전차포로 사용가능한 명중률을 가진 만큼 국군의 방어진지에 명중률 높은 직사공격을 해서 무척 괴로웠다는 참전용사들의 증언이 있다. 북한군은 아직도 M1942를 해안포로 대량운용하고 있다.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이 버리고 간 M1942를 살펴보는 미군. 북한군은 워낙 정신없이 도망갔기 때문에 소중한 포병전력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➈ Yak-9  전투기
소련의 전투기. 제2차 세계대전 시절 야코블레프 설계 국이 개발한 소련 공군의 주력 전투기 중 하나. 20mm 기관포 1문과 12.7mm 기관총 1문을 기본 무장으로 장착하고 있고 뛰어난 운동성을 가지고 있다. 6·25 전쟁 초기에는 북한군의 주력전투기가 되어 침략의 선봉이 되기도 했다. 다만 첫 공중전은 피난민을 공중에서 호위해주기 위해 나온 미 공군을 보고 겁도 없이 사격을 가했다가 바로 격추되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주로 지상근접지원을 하며 MIG-15가 나오기 전까지는 북한군 전투기의 대명사였으나, 미 공군과 미 해병대 전투기의 상대가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북한공군의 Yak-9. 제트기가 나오기 전 까지는 비교적 우수한 프로펠러전투기였다.

 

 

미 공군에 의해 격추된 북한공군의 Yak-9. 노련한 미 공군의 전투기에 적수가 되지는 못 했다.

 

➉ MIG-15 전투기
이른바 제트전투기의 시대를 연 소련공군 최초의 제트전투기.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기술을 적용해 개발한 제트전투기로써 연합군에게 이른바 ‘미그 쇼크’를 안겨주었다. 이로써 한반도 상공은 세계 최초의 제트전투기 공중전이 벌어지는 현장이 되었다. MIG-15 출현당시 기존 미 공군의 그 어떠한 전투기도 상대가 되지 못 했다. 미 공군은 급히 신형전투기인 F-86 세이버를 한반도에 전개시켰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역시 독일의 기술을 가져다 전투기를 만든 덕분에 크기만 약간 다를 뿐 두 전투기의 실루엣이 똑같다. F-86 이 제공전투기에 초점을 맞췄다면, MIG-15는 폭격기 요격용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F-86보다 상승능력이 좋았으며, 강력한  37mm 기관포와 23mm 기관포 2정을 장착하였기 때문에 12.7mm 기관총 6문을 장착한 F-86에 비해 화력에서도 앞섰다. MIG-15의 등장 당시 미국의 충격은 상당하여 이 기종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기체를 통째로 가져오는 사람이 있으면 10만 달러를 주겠다고 현상금을 내건 적도 있었다. 다행히 1953년 폴란드의 조종사와 북한의 조종사 노금석 대위가 각각 미그15를 몰고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캐낼 수 있었다. 노획한 MiG-15를 몰아본 미군 파일럿들은 전투의 승패를 가른 것은 조종석의 시야와 유압계통의 반응속도, 조준장치 같은 사소한 부분이었다고 이야기했다.

 

북한의 노금석 대위가 몰고 귀순한 MIG-15. 미 공군소속의 새로운 도장이 되어있다. 이 기체를 분석한 미 공군은 결코 만만치 않은 MIG기 성능에 충격을 받았다.

 



글/사진 제공 : 이세환 군사전문 기자





6·25전쟁 당시 사용된 무기 시리즈 ① : 한국군 10대무기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