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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광복70년] 독립향한 '불굴의 투혼' 지금도 살아 숨쉬는 듯

탐방단, 국립현충원 참배 후 열흘 대장정

밭으로 변한 독립군의 요람 신흥무관학교

빛나는 승리 청산리대첩비 찾아 묵념·헌화

선열들의 뜨거운 독립 정신 가슴에 새겨

 

 8·15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전국의 대학생과 군 장병들이 중국 만주 일대에서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였던 독립군들의 전적지를 탐방했다. 올해로 10회째인 이번 탐방은 초기 대학생 위주로 시작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현역 장성을 포함한 군장병과 예비역 간부들도 다수 참여함으로써 ‘국군의 뿌리 찾기’로 그 의미가 확대 발전됐다. 지난 7월 5일부터 14일까지 중국 동북부 일대의 독립군 전적지를 순례한 탐방단의 일정은 광복의 밑거름이 됐던 독립군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값진 발걸음이었다. 그 현장을 취재했다.

 

 

지난달 9일 중국 화룡시 백운평계곡 25km 지점에 위치한 청산리 항일대첩기념비를 찾은 철기 이범석 장군 기념사업회의 광복청년아카데미 독립군 전적지 탐방단 단원들이 거수경례를 하며 독립군의 투혼을 기리고 있다.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옥수수밭 앞에 도열해 경례하고 있는 독립군 전적지 탐방단 일행.


 

 

 

  

 “대한독립 만세!”

 철기 이범석 장군 기념사업회의 광복청년아카데미 독립군 전적지 탐방단이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지난 7월 7일 독립군 사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 옛터에서 마음속으로나마 힘차게 만세를 외쳤다. 이들 탐방단은 비록 현지 중국 공안(경찰)에 의해 태극기 사용과 독립만세 외침이 금지되었지만 옥수수밭으로 뒤덮인 신흥무관학교 옛터 앞에서 한마음이 되어 독립군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겼다.

 묵념과 헌화를 하며 눈시울을 붉힌 탐방대원 나연주(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4년) 학생은 “독립군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외진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하며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벌인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표지 문구 하나 없는 황량한 이곳을 다시 찾은 탐방단의 목적은 독립군과 광복군 출신으로서 대한민국 초대 국방부 장관이 되어 국군의 정신과 기틀을 다진 철기 이범석 장군의 애국심과 민족혼을 기리고 배우기 위해서였다. 탐방단의 순례 출발지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영면해 계신 국립서울현충원인 것도 이 때문이었다.

 총 77명의 탐방단은 지난 7월 5일 전국 각지에서 모인 뒤 합숙 후 6일 서울 동작동의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동해 참배와 함께 탐방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탐방단은 6일 오후 인천 부두를 떠나 장장 16시간의 항해 끝에 다음날인 7일 오전 중국 단동에 도착했다.

 중국 단동에서 일정을 시작한 탐방단의 첫 코스는 버스로 3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졸본성이었다. 중국에선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 부르는 졸본성은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나라를 세웠을 때의 도읍지지만 고구려 역사를 왜곡 조작하는 중국 동북공정의 단면이 담긴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탐방단이 중국 첫날 순례지로 졸본성을 택한 이유가 젊은 대학생들로 하여금 호연지기를 키우게 하기 위해서라면, 둘째 날 신흥무관학교로의 이동은 이번 탐방의 핵심이자 하이라이트였다. 탐방단이 해마다 찾는 신흥무관학교는 항일 무장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였다. 1910년 설립, 1920년 일제에 의해 폐교될 때까지 수천 명의 항일 무장독립군을 배출했다.

  만주 독립운동의 거점이자 독립군을 체계적으로 양성한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된 가장 큰 이유는 일제와 벌였던 독립전쟁 중 최고의 승리인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 항일 비밀결사단인 의열단의 활동 때문이었다. 중국 만주 일대의 항일투쟁에는 언제나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정예 독립군들이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입교 학생들에게 학비를 전혀 받지 않고, 모든 것을 책임졌다. 학생들의 의식주 문제를 비롯해 시설과 운영을 위해서도 만만찮은 자금이 필요했지만, 이 모든 문제는 한 독립운동가 가문이 일거에 해결했다. 당시 돈 40만 원, 지금 돈으로 약 1000억 원이라는 막대한 재산을 기꺼이 내놓은 것이 바로 우당 이회영의 일가였다.

  이회영 일가는 정승 판서만 아홉이 나온 당대의 명문가였지만 우당의 6형제는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집단 망명길에 올랐다. 그들이 1910년 압록강을 건너 세운 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였고, 이후 정예 독립군의 요람으로 명성을 떨쳤다. 신흥무관학교가 운영된 기간은 꼭 10년이었지만 그 발자취는 우리 독립군의 역사이자 국군의 뿌리가 되었다. 오늘날 대학생들은 물론 현역 군 장병들까지 이곳을 찾는 이유였다.

  탐방단의 필수 코스인 청산리대첩비 참배는 다음날 이뤄졌다. 오전에 쾌청한 날씨 속에 백두산을 오른 뒤 해질 무렵 도착한 청산리는 중국 화룡시와 연변 해란강 줄기를 지나 계곡에 위치해 있다. 청산리대첩비 현장에 다가가자 뜻밖에도 중국 공안은 탐방단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참배하는 것을 허용했다. 중국에서도 청산리전투의 쾌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 감격스러웠다.

 청산리전투는 만주 일대에서 일제와 소규모 유격전을 벌였던 독립군 부대가 대규모의 일본 정규군과 혈전을 벌여 승리한 항일대첩이었다. 1920년 10월에 벌어진 이 싸움의 승리로 독립에 대한 우리 민족의 끈질긴 열망과 불굴의 정신이 세계를 놀라게 하며 시들어가던 항일투혼을 일깨웠다.

 오늘날 중국의 외진 이곳을 해마다 찾는 한국인들은 청산리전투의 주역인 김좌진 장군과 이범석 장군 기념사업회의 대학생 탐방단이다. 이 두 단체의 노력으로 현재의 청산리대첩비가 세워졌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민국 만세.”

  10기 탐방단은 청산리대첩비 앞에서 헌화와 참배를 마치자마자 일본군을 격퇴했던 독립군의 심정이 되어 만세를 외치며 광복 70주년의 의미를 되새겼다. 순례 후반부에는 1920년 6월 7일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처음으로 격파한 봉오동전투 전적지도 찾아 참배하는 등 뜻깊은 일정을 성공리에 마무리 지었다.

  탐방단의 생도대장으로서 두 자녀와 함께 온 최병두 중령(육군교육사)은 “지병이 있는 딸과 아들이 동료 대학생들과 똑같이 힘든 일정을 잘 견디면서 애국심과 국가관을 함양할 수 있게 돼 너무 좋았다”며 “이번 탐방을 통해 국군의 뿌리가 어디서 왔는지 확인한 만큼 앞으로 독립군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